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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랑회 여러분!
미술가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다빈치나 미켈란제로라는 엄청난 거장들을 소개하고 나니 앞으로 어떤 미술가를 소개하여야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까 생각하니 고민이 되기도 하네요.
오늘 소개할 화가는 미술사에서 의미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지만 워낙 거친 성격때문에 짧지만 순탄치 못한 일생을 살았던 카라바조라는 인물인데...
사실 카라바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빈치와 미켈란제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 중의 한 사람인 라파엘로를 소개하여야 하나, 라파엘로 삶이 극적인 데가 별로 없기도 해서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혹시 앞으로 유럽 여행시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오늘부터 유럽의 유명한 미술관들을 하나씩 소개할 예정입니다.
* 카라바조의 자화상
[ * 바로크 미술의 시대를 연 다혈질적인 천성의 카라바조 ]
* 바로크 미술에 대하여는 마지막에 간략히 소개
르네상스 미술에 종지부를 찍고 바로크 미술을 연 화가 ,유럽 바로크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천재화가 카라바조.
그는 전통적인 주제(종교화)의 급진적인 해석,독특한 빛의 효과,일상생활에서 직접 찾아낸 소재 등으로 당시 로마 미술계에 일대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카라바조는 급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평생동안 도박,음주,폭력,살인,동성애 등의 문제를 안고 살았다.
[ 참으로 고달팠던 카라바조의 일생(1571-1610) ]
미칼렌제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1571년,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밀라노 근처 롬바르디주에 있는 카라바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미켈란젤로여서 전 시대의 거장이었던 미켈란제로와 이름이 같아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조로 불리웠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었다. 그는 열 한 살 때부터 밀라노에서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으며 1592년 경에는 로마로 갔다.카라바조는 초기에 잡일을 해서 생활비를 버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교황청의 유력한 고위성직자인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주목을 받으면서 후원을 받게 된다.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주제(종교화)의 급진적인 해석,독특한 빛의 효과,일상생활에서 직접 찾아낸 소재 등으로 인해 로마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한편으로는 아주 공격적인 성격 탓에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렸는데, 1606년 급기야는 내깃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동안 수차례 말썽을 피웠어도 든든한 후원자들 때문에 그때마다 무사히 풀려난 카라바조였지만 살인은 그 죄질이 틀렸을 뿐만 아니라 죽인자가 명망있는 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죄값은 사형이었다.
이때부터 카라바조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정처없는 도피생활을 시작한다.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카라바조는 항상 무장한 채 다녔고 잘 때도 옆구리에 찬 칼을 빼지 않았다고 한다.상대방의 복수가 두려웠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카라바조는 도주하여 머무는 곳(나폴리,몰타,시칠리아 등)마다 훌륭한 예술가 대접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로마에서의 살인 행각이 들통나면 어김없이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마지막에는 나폴리 근처 포르터 에콜로의 한 술집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 엉뚱하게도 이 사건으로 감옥에 수감되고, 로마에서 보낸 그의 사면장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요절은 예술계에서 볼 때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며, 그의 천재성은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 카라바조의 그림 ]
그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창백하고 유령같은 인물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세속적이고 현실감 넘치는 사실주의 양식으로 인물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종교화를 그릴 때 이러한 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기존의 종교화에서 보여지는 성직자들은 모두 이상화 된 모습으로 표현한 반면에 카라바조가 그린 성직자들은 보통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였고, 기적의 장면에도 일상생활에서 마치 이웃집사람들이 겪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종교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다루는 그림에 창녀와 부랑아들을 모델로 등장시켜 당대 미술계와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오기도 했다.당대 카톨릭 교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길을 가련다"라면서 그의 고집스러움을 지켜 나갔다.
* 성 마테오의 소명
카라바조는 그 누구보다도 빛과 어둠을 잘 이해했던 화가였다.그의 빛은 현실 세계의 절대적 견고함 위로 비치고, 그의 어둠은 가끔씩 그것과 다른 세계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복음서에 있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를 다루고 있다.성 마태오의 소명이 교회나 성당과 같은 성스러운 곳이 아닌 로마시내의 평범한 식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카라바조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리라.
갑자기 예수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가운데 있는 사람 좋고 편해 보이는 중간 계급의 세금 징세인이었던 마테오는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그는 지금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라는 분부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 있는데 그 존재만으로도 그림자에 어떤 빛을 주고 있는 듯하다.마테오가 본 것은 그것이 전부다.속세를 떠난 듯한,말랐지만 힘있는 얼굴과 부름의 손짓,그리스도는 교회를 상징하는 덩치 큰 베드로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카라바조는 영리한 사람이었다.그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을 하던 중에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그는 천사의 방문을 믿지않는 철저하게 현세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의 힘도 바로 이런 현세적인 것에서 나왔다.
단단한 테이블과 그 아래의 근육질 다리,거기에 달려있는 칼이 그들이 살고 있던 세계가 아주 험한 세계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부름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이었다.오른쪽에 있는 두 젊은이는 관심을 보이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예수 쪽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젊은이는 거의 동물적인 호기심을 보이고 있고, 전형적인 미소년인 그의 친구는 반쯤 놀란듯한 섬세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왼쪽에 있는 두 사람은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성인으로 보이는 뒤쪽의 늙은이는 계산에 정신이 팔려 있으며, 자신의 돈을 세고 있는 앞쪽의 젊은이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같아 보인다. 이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그 부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은 아직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 부름의 현실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그도 놀랐다.안정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이 맨발의 사제 역할을 요청받았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기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제 곧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밀치고 그리스도를 따라 정처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며...궁극적으로는 우리 개개인에게 던져진 질문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 성 바울의 개종
카라바조가 오래된 성경의 내용을 그린 이 작품은 얼마나 현실감이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만약 다른 화가들이 이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다뤄야 했다면 천국의 왕관을 쓴 그리스도가 천사들에 둘러싸여 하늘에서 바울을 부르는 장면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바울이 말에 떨어져 땅바닥에 누워 있도록 표현하여, 마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림의 빛처리를 보면 화면의 일부만을 눈부시게 비추는 강렬한 조명이 마부 다리의 근육과 힘줄, 그리고 누워있는 바울 갑옷의 조임새와 같은 작은 사물을 환히 비추고 있으면서, 반면에 조명밖의 사물은 어두운 배경으로 묻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를 사실주의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는이유는 다른 화가들이 성직자들을 모두 이상화 된 모습으로 표현한 반면에 자신의 생각을 이처럼 일상화된 장면으로 표현했다는 점일 것이다.
* 도박꾼 들
순진한 청년이 카드를 들여다 보는 동안 2명의 사기꾼들은 청년의 패를 훔펴보고 등 뒤로 카드를 바꿔치기 하고 있다.훗날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이 모티브를 되풀이해서 사용했다.카라바조는 화가의 세심한 관찰과 섬세한 붓놀림만 있다면 평범한 일상도 얼마든지 훌륭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골리앗의 목을 자른 다윗
화면에서 다윗은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으로는 골리앗의 머리를 잡고 있는데, 골리앗의 목에서는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것은 밝은 대낮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 카라바조는 다윗과 골리앗의 모습을 어둠 속에 두드러지도록 그려놓았다.
이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은 골리앗의 얼굴이나 다윗의 얼굴 모두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는 점이다. 화가가 성서 역사화에 자신의 초상을 그려넣는 것은 르네상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골리앗의 얼굴뿐만 아니라 젊은 다윗의 얼굴도 화가 자신의 젊을 때의 모습을 그려넣음으로써 이 작품은 일종의 이중 자화상이 되었다.
순진했던 어렸을 적 카라바조가 타락한 현재 카라바조의 목을 자른 장면이다. 자기 스스로도 타락하고 자제가 안되는 자신을 확 자르고 싶었었으리라.카라바조가 살인을 하고 로마를 떠나기 직전에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 의심하는 도마(12 제자 중의 한 사람) >
부활한 예수를 믿지 못한 도마는 직접 손가락을 넣어 상처를 확인한다.나머지 제자들도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도마의 손가락을 주시하고 있다.순순히 도마에게 배를 내준 예수는 성스럽고 완벽한 신의 대리인이 아닌, 늙고 지친 평범한 중년 사내로 보인다.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부활한 예수는 후광이 비치는 완벽하고 거룩한 모습으로,사도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예수의 발 밑에 꿇어 엎드려 그를 찬미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길 원했기 때문에 카라바조의 혁명적인 작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 바로크 미술
*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의 건물인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바로크라는 용어는 포르투갈어의 barroco에서 온 듯하다.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眞珠)’라는 뜻인데, 이 말은 본래 16세기 유럽을 지배한 고전주의 르네상스 뒤에 나타난 양식에 대하여 모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 ·이상 ·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바로크는 미술사 ·예술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현재는 이 개념이 다른 예술양식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북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도상(圖像)을 일신하고 종교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 ·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다. 건물은 초대 토스카나 대공이 된 메디치가(家)의 코시모 1세(1519~74)의 정청(政廳)이며 우피치궁(宮)이라고도 한다. 미술관의 역사는 이 건축이 완성된 1584년에 시작되나, 미술품 수집의 역사는 더 오래 되어, 15세기 전반부터 피렌체에 군림한 메디치가의 코시모 일 베키오(1389∼1465)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치가의 최후의 6대 토스카나대공 잔 카스토네(1671∼1737)까지 거의 200년간에 막대한 미술품 제작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하고 또 작품이 수집되었다. 코시모 1세의 시대부터,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와 그 집에 연고가 있는 미술품을 여기에 모으기 시작하여, 1737년 메디치가의 최후의 사람으로서 우피치궁의 미술품을 계승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조토의 <성모자(聖母子>, 마르티니의 <수태고지(受胎告知)>,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다 빈치의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마돈나>, 티치아노의 <울비노의 비너스>, 카라바조의 <바커스>, 뒤러의 <삼박사(三博士)의 예찬>, 휘스의 <목자(牧者)들의 예배> 등이 유명하다
*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작곡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