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베드 독백
out out briet candle !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꺼져라 꺼져라 가날픈(단명한) 촟불이여 !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장한 듯이 무대 위서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배우,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공포로 가득하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서 -
대권이란 무엇인가?
한시를 연재하다가 느닷없이 셰익스피어 비극의 한 부분을 소개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이야 말로 이번 대선을 보는 유권자 한사람의 심경이며 꼭 소개하고 싶은 글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전은 사람의 고유한 인성(人性)마저 버린 듯 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왕위를 놓고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과 왕권을 방위하기 위해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패륜(悖倫)의 전철, 권력을 잡기 위한 붕당정치의 파렴치한 형태가 민주공화국의 이 시대에 다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비정한 권력의 현실에 전율(戰慄)하고 서양의 정치고전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에서 “정적은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 라는 논술을 새삼 기억나게 합니다.
역사의 발자취에는 왕권방어에 대한 비극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고구려 유리왕이 태자 도절을 죽이고,
후백제의 견훤왕은 자식들과 불화하고 결국 그들을 죽이고,
후고구려의 왕 궁예도 왕비와 아들을 죽이고,
세조 수양대군은 족하 단종을 죽이고,
조선 16대왕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이고,
조선 21대왕 영조 사도세자를 죽이고,
현재 MBC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를 독살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태조 이성계도 이방원을 죽일려고했고,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이처럼 생명을 걸고 차지하려는
대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셰익스피어 비극중의 하나인 “맥베드의 독백”이 대신하여 주고 있습니다.
『대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왜 허무한가?』
『권력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특히 의(義)를 버리고 이(利)에 집착한 권력은 그 말로가 너무나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11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에 실재했던 인물 맥베드는 셰익스피어가 연대기 와 사실, 전기 등을 자유롭게 도입하여 완성 한 비극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명장 맥베드 장군은 왕위를 빼앗기 위해 동료인 뱅코우 장군과 왕과 왕족들을 무참히 죽이고 왕이 되지만 결국은 왕자인 맥더프에게 목을 잘리우게 되면서 권력의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독백한 한 구절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맥베드가 회안에 사로잡혀 내 뱉는 이 독백은
셰익스피어비극중 “햄릿”의 독백과 함께 맥베드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로서 미국소설가인 월리암 포거너는 이 독백에서 한귀절을 제목으로 따온 “소리와 분노” 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
-농월-
歲色紗窓已暮云(세색사창이모운) 비단창에 계절빛에 해 저문다 말들하고 一年佳節度紛紛(일년가절도분분) 일년 좋은 시절 분분하게 지나 가는구나 滿床風雪寒無寢(만상풍설한무침) 침상 가득 바람과 눈에 차가워 잠 못 들고 裁繡郎衣到夜分(재수낭의도야분) 낭군 옷을 마르고 수놓으며 그믐밤을 새운다 김삼의당(金三宜堂) 김삼의당(金三宜堂) 삼의당은 직필사관으로 이름 높았던 탁영 김일손의 후손이다. 김일손의 11대손 김인혁의 따님이 삼의당 김씨다. 명문의 자녀였지만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는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지금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뒤에 연산군이 임금이 된 후에 무오사화로 인하여 신진 사림인 김종직 김일손등이 정적인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등에 의하여 무참히 살육을 당한다. 무오사화의 이야기가 “조의제문”등 너무 길고 복잡하여 여기에 소개 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고향은 경북인데 전북 남원 김씨 댁에서 출생한 것을 보면 무오사화로 인하여 후손들이 숨어 사는 형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농월-
제가 1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집에 일이 생겨서 컴퓨터를 칠 시간이 없어서 겨울 한시를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어 갈가 생각합니다.
歲暮寒窓客不眠(세모한창객불면)-이해마저 저무는 밤 나그네 잠못들고 思兄憶弟意凄然(사형억제의처연)-언니생각 아우그리워 마음절로 처량쿠나 孤燈欲滅愁難歇(고등욕멸수난헐)-등잔불 까물대고 시름참기 어려운데 泣抱朱絃餞舊年(읍포주현전구년)-거문고 껴안고서 가는 해를 보내리. 평양기생(平壤妓生) 조선조 기생은 지금의 술집여자들처럼 몸이나 팔고 돈이나 버는 종류와는 다르다. 평양은 옛적 색향(色鄕-기생이 많이 나는 고을)으로 불리던 곳으로, 안대회 명지대 교수가 발견한 19세기 전반 평양의 기생 67명과 기방 주변의 남성 5명의 삶을 그린 산문(散文) 소품 녹파잡기(綠波雜記)에 의하면 67명의 기생은 환락(歡樂)적 풍모나 “성 노리개”식의 부정적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기예(技藝-예술수준의 재주)를 가졌고, 서화(書畵)를 겸비한 예술인이었다. “붓으로 노래하고 먹으로 춤을 대신하는” 이들이었다. 녹파잡기(綠波雜記)에는 한 기생을 두고 기록하기를 “영희(英姬)는 빼어난 미모에 가무를 잘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주렴(珠簾-구슬 발)을 걸고 서안(書案책상)을 놓고, 자기(瓷器)와 서화를 진열하고 온종일 향(香)을 사르며 단정히 앉아 있다. 방문 앞을 지나가도 적적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다. 난초 그리기를 즐겨 옛사람의 필의(筆意)를 깊이 터득했다.” 의로운 기생, 멋진 풍류를 가진 기생들도 소개하였다. “차앵(次鶯)은 비록 자신은 거친 옷을 입고 박한 음식을 먹었지만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옷을 벗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생열전(妓生列傳)도 상당히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요약(要約)하기가 어려우나 황진이와 서경덕, 이매창과 유희경, 홍랑과 최경창, 정도라도 기회 있을 때 자료를 읽던지 유적지를 답사하면 재미있는 내용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기생 홍랑묘와 전북 부안에 있는 기생 이매창 묘를 답사한 경험 있어 좋은 역사적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 -농월-
|
無爲虛送好光陰(무위허송호광음)-한 일도 없이 좋은 세월 다 보내고
五十一年明日是(오십일년명일시)-내일이면 벌써 쉰 한 살이 되는 구나
中宵悲歌將何益(중소비가장하익)-한밤의 슬픈 노래 무슨 위안이 되리요
自向餘年修厥己(자향여년수궐기)-남은 생애 몸 닦으며 살아 가야지
강정일당(姜靜一堂)
조선조 후기의 문필가 여류시인 으로 신사임당과 임윤지당 文의 장점을 겸하였다. 초서(草書)와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시(詩)와 문장도 능하였다. 강정일당(1772-1832)은 영조 48년 10월 15일 충북 제천 근우면 신촌에서 진주가 본관인 아버지 강재수(姜在洙)와 어머니 안동 권씨의 2남1녀 중 외동딸로 태어 났다.
세조 때의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진산군(晉山君) 강희맹이 10대조며 선조들이 대부분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고 단명한 채 빈궁한 은둔 선비의 집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청강처사 권서응(淸江處士 權瑞應)의 딸로서 부모 선대 양반문벌이었고 정치노선이 노론에 속하였으며 부계(父系)는 문인의 전통을 이왔으며 모계(母系)는 성리학 기호학파 계열의 신분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정일당 강씨는 학문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여 유교의 13경을 두루 익힘으로써 성(誠)과 경(敬)으로 심성을 수양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던 여류 도학자요 문사의 행보를 터덕해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월-
설매헌(雪梅軒) 섣달 눈이 매화위에 臘雪滿空來(납설만공래)-섣달 눈이 허공에 가득 내리는데 寒梅花正開(한매화정개)-찬 매화는 마침 꽃이 활짝 피었네 片片片片片片(편편편편편편)-흰 눈조각이 조각 조각 조각 조각이 散入梅花眞不辯(산입매화진불변)-매화에 섞이매 분간할 수가 없네. 태고보우(太古普愚) 보우(普愚, 1301~1382) 고려말기 선종 가지산문파의 승려로서 불교계 통합사업을 전개했다. 호는 태고(太古), 시호 원증국사(圓證國師), 13세부터 회암사(檜巖寺)에 종사 하였다 46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에 원나라에 들어가 당시 그곳에서 크게 떨치고 있던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의 제18세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밑에서 수학 후 그 법을 받아 귀국했다. 이어서 왕사(王師)로 책봉 받았다. 신돈(辛旽)의 집권기에는 그와 대립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신돈이 제거되는 1371년(공민왕 20)에 국사(國師)로 책봉을 받고 우왕의 즉위 뒤에도 같은 지위에 자리하였다. 1382년(우왕 8) 소설산(小雪山)으로 돌아온 후, 12월 17일에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방관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숨을 거두니(입적), 나이 82세였다. 고려 우왕은 그가 입적하자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국사의 비를 짓게 하였으며 이비석은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에 있다. 그의 제자로는 천여 명의 승려 이외에 당대의 조정대신인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농월- |
酒盡燈殘也不眠(주진등잔야불면) 술이 다하고 등블이 다해도 잠은 오지 않고 曉鐘鳴後轉依然(효종명후전의연) 새벽 종소리 울린 후에도 여전하구나 非關來年無今夜(비관내년무금야) 내년을 생각마라 오늘 같은 밤 다시 오지 않으니 自是人情惜去年(자시인정석거년) 이제부터 사람들은 가는 해를 아쉬워하리 姜栢年(강백년) 강백년(姜栢年, 1603~168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장원급제한 뒤 동부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강빈옥사(姜嬪獄事)는 남한산성의 치욕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온 소현세자가 귀국 2개월 만에 인조와 불화관계에 있던 중에 의문으로 죽자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태어난 원손(元孫)이 폐위되고,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이 세자로 책봉되어 강빈은 설 자리를 잃었다. 여기에 강빈과 반목하고 있던 소의(昭儀) 조씨(趙氏)의 무고로 궁중에서 일어난 인조 저주사건과 왕의 음식에 독약이 들어갔다는 사건의 배후자로 몰려 1646년 3월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강빈의 어머니와 네 형제가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농월- |
天晴新月照(천청신월조)-하늘이 개이니 초승달 비치고 江闊暮雲收(강활모운수)-저문 구름 걷히니 강이 훤히 트인다 逝者如梭疾(서자여사질)-가는 세월은 베틀 북처럼 빨라서 難堪尼父愁(난감니부수)-니부의 근심을 견디기 어려워라 손조서(孫肇瑞) 손조서(孫肇瑞) 조선 전기(前期)의 문신(文臣)으로. 143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봉산군수를 지냈다. 1456년 사육신의 옥사(獄事)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둔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장성하여 대가(大家)라고 불렸다.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제목의 만(晩)자는 저문다는 뜻으로 해(日)가 벗어나서 면(免)하는 것은 해가 져서 저문(晩) 저녁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는 낮에 빛을 주어 만물이 열심히 일하게 하는 대신 일한 우리들에게 쉴 수 있도록 자신은 자리를 피함으로서 어둠을 드리워준다. 이 시간에 절에서는 만종(晩鐘)을 울린다.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귀가하거나 돌아가는 길에 벗들과 만찬(晩餐)을 즐기기도 하고 조용히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세모(歲暮)는 이렇게 한해를 일한 우리들에게 조용한 휴식과 지나온 1년을 뒤돌아 볼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하여 그믐밤이라는 어둠의 조용한 공간을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새해아침 희망찬 밝은 빛을 값없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카리스마(charisma)다. 참고-“니부의 근심을 견디기 어려워라” 니부수(尼父愁)는 허송세월하는 공자의 탄식. -농월- |
旅館寒燈獨不眠(여관새등독불면) 여관방 차가운 등잔불 아래 홀로 잠못 이루니
客心何事轉凄然(객심하사전처연) 나그네 마음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처량한가
故鄕今夜思千里(고향금야사천리) 고향에서는 오늘밤에 천리밖에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霜鬢明朝又一年(상빈명조우일년) 서리 내린듯한 흰머리가 내일이면 한살 더 나이를 먹는구나 고적(高適)
고적(高適) 중국 당나라의 시인(?707~ 765)으로 자는 달부(達夫) 벼슬은 감찰어사·절도사를 지냈으며, 도연명과 더불어 전쟁터인 변경(邊境북쪽 전쟁터)의 풍물을 읊은 변색(邊塞-변방의 전쟁요새)시인으로 유명하다.
정해년(丁亥年)을 보내는 심사 한 해를 보내든 친구를 보내든 이별은 아쉬운 것입니다 특히 우리들 나이에는---- 대단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해마다 세모(歲暮)의 길목에 서서 뒤돌아보면 저녘연기 꼬리같이 사라지는 요지경(瑤池鏡) 희미한 영상들 뿐입니다. 마치 내 그림자처럼 큰 꿈을 이룰것 같이 따라 다니다가도 그늘이 드리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허무였습니다. 우리 인생처럼--- 섣달그믐밤 고향에 못가고 여인숙에서 한숨짓는 나그네 심사처럼 매년 찾아오는 12월의 허전함을 오늘도 그 길목에서 멍히 바라봅니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