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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개미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에, ‘로데오 거리’가 생겼습니다. 도심 중앙에 자리한 이곳은 옷가게며 식당들이 즐비한 곳이지요. 최근 이 길을 지나다가, 땅바닥에 촘촘히 박힌 보도블록 사이로 파랗게 돋아나는 이끼를 보았습니다. 어디 황소 똥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돋아나는 이끼가 자연스러우련만, 전혀 그렇질 않은 환경에 자라는 이끼는 젊은이들이 흘리고 간, 꿈과 푸르른 웃음인 듯 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꿈의 씨앗은 문명의 빽빽한 돌 틈 사이에서 겨우 블록 키만큼 자라 하늘을 향해 푸른 미소를 띠고 있었지요. 젊은이들의 얼굴에 피어나야 할, 해맑은 미소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현대 많은 사람들은, 웃음을 잃고 살아갑니다.해맑고 푸르른 웃음들은 삶의 괴로움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조직화되고 문명화된 세계의 척박한 돌 틈사이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로 웃기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평소에 늘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지고 즐거워했던 선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때, 제자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내가 죽거든 입은 옷을 벗기지 말고, 그대로 화장을 하길 바란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모두가 슬퍼해야 하고 엄숙해야 할 장례식 날! 스승의 시신을 올려놓은 장작불에 불이 당겨졌을 때! 갑자기 천지 요동하는 폭죽이 터지며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에 눈물을 흘려야 할 제자들도, 엄숙한 분위기에 장례식을 집행하던 자도, 숙연히 고개 숙이고 있던 모든 사람들도, 연실 터져대는 폭죽 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소, 웃음을 삶의 철학으로 삼았던 스승은 슬픔의 장례식을 환희의 잔치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지막 입고 가는 옷 속에 폭죽을 감추어 장례식장을 웃음바다로 바꾼 것은, 슬픔을 기쁨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꾼 기적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웃음이 되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꼭 필요한 기적이입니다. 요즘, 저는 2개월이 조금 넘은 아들 녀석을 키우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지친 영혼이 그 얼굴 앞에 가면, 웃음이 절로 나게 되지요. 아들 녀석은 나흘에 한번 똥을 눕니다. 똥을 누게 되면, 기저귀가 다 넘쳐 가슴위로 똥이 올라오기 때문에, 온 몸이 똥 범벅이 됩니다. 그래도 그 똥을 치우는 게 기쁩니다. 누가 카메라로 저의 모습을 담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사람 좋은 모습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들의 똥을 치우는 일이 그렇게 기쁘고 즐겁습니다. 웃음이 절로 납니다. 아들의 똥은 절대로 더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 똥을 제외하고는 모든 똥이 더럽고 무섭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줄기차게 여러 사람 쓰는 화장실을 청소해 오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화장실 청소의 도(道)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 굳게 먹고 변기 닦는 일을 웃음으로 일관해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똥물이 튀어 얼굴에 묻거나, 사방팔방 똥칠을 변기에 해 놓은 것을 볼 때면, 분노가 끓어올라, 변기 닦는 솔을 내던지기 일쑤입니다. 똥 치우는 일을 웃음으로, 기쁨으로 행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 똥과 사람들의 똥을 치우는 일이 이렇게 다릅니다. 화장실청소는 웃을 수 없는 나의 생활고(生活苦)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일랜드 에오카이드 왕의 다섯 아들 이야기를 해 봅니다. 에오카이드 왕의 다섯 아들은 사냥하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갈증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하나씩 물을 찾기로 했습니다. 큰형인 ‘퍼거스’가 먼저 떠났고, 이윽고 그는 샘을 발견합니다. 샘 옆에는 노파가 서서 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노파의 행색은 무시무시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의 마디마디는 석탄보다 검고, 머리통 위에만 자라 있는 잿빛 머리 단은 야생마의 꼬리에 비길 만하고, 초록빛의 반달 같은 이빨은 둥글게 말려 올라가 귀밑에까지 이르러 있는데 날카롭기로 말하면 참나무 둥치라도 능히 자를 만했습니다. 눈은 검고 연기처럼 흐렸으며, 코는 심한 매부리코인데 콧구멍이 유달리 넓었습니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배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고, 굵은 발목과 넓은 두 발 위의 정강이는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무릎은 큰 나무의 옹이 같았고 검푸른 손톱은 날카로웠습니다. 어쨌든 노파의 몰골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변기위에 퍼질러진 똥보다도 더 추악했습니다. 왕자가 샘을 지키고 있는 노파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제대로 찾은 모양이군요?” 노파가 대답했습니다. “제대로 찾았어요.” “그대가 이 우물을 지키고 있나요?” “그렇소.” “물 좀 길어가게 해주지 않겠소?” “어렵지 않지만, 대신 내 뺨에 입을 맞추어야 하오”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럼 나도 물을 줄 수 없소” “그대에게 입 맞추느니 차라리 목말라 죽는 게 낫지” 큰 형인 ‘퍼거스’ 왕자는 이 말만 남기고 형제들에게 돌아가 물을 떠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올리올, 피아크라, 브라이언이 차례로 그 우물을 찾아 노파에게 물을 달라고 했지만, 입맞춤을 거절했기에 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내 동생인 ‘니알’이 그 우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니알’은 노파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물을 떠가게 해주시오” 노파가 대답했습니다. “물을 드리겠소. 대신 나에게 입맞춰주시오”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아줄 수도 있소” 왕자는 노파를 껴안고 뺨에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왕자가 입을 맞추고 물러서는데, 그 노파는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결은 백설 같았고, 팔은 포동포동하면서도 여왕의 기품을 갖추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늘었으며, 다리는 곧고 길었습니다. 진주 같은 이빨, 딸기 같은 붉은 입술....... 왕자가 탄복한 나머지 중얼거렸습니다. “아 아름다움이 은하를 이루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하고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누구신가요?” 그러나 여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왕도(王道, Royal Rule)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만 보셨습니다. 왕의 길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아들의 똥 치우는 일과 화장실 청소를 같은 일로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질문을 가끔 어머니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 고구마하고, 무하고, 김치하고 섞어 먹으면 죽지 않을까? 엄마! 고등어하고, 장아찌하고, 고추장하고 섞어 먹으면 죽지 않을까?......” 그리고 종종 밥을 먹다가 밥 알갱이 하나를 떼어서 책상 밑이나, 벽 한구석에 몰래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혹 가족 중에 병에 걸리면, 그 밥풀 한 알갱이가 해독제가 되지나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금을 만드는 연금술의 핵심적인 원리를 ‘마리아 프로페티싸’(Maria Prophetissa)라고 합니다. 즉,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셋이 되며, 또한 셋에서는 넷인 하나가 생겨난다.”라는 원리입니다. 연금술은 지금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 철학과 정신은 우리 인간들의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사실 알고 보면, 연금술의 원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너무 셋만 고집해서 하나가 되는 도그마에 빠져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상상해 본다면 말입니다. “성부 + 성자 + 성령 〓 하느님에서, 성부 + 성자 + 성령 + 마리아 + 요셉 + 나 + 나무 + 우주... 〓 하느님으로” 연금술의 철학은 무엇을 섞어서 금이 될지 잘 알 수 없지만, 결국 그 종점은 하나의 진리인 금을 만드는 것인지라, 하나에다가 둘을 둘에다가 셋을 셋에다가 넷을 더해도 하나가 되는 것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아들의 똥 치우는 일과 화장실 똥 치우는 일을 같은 웃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잔치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에다가 무엇을 섞으셨을까요? 몇 가지 재료들을 섞어서 연금술의 원리를 터득하셨을까요? 웃음 짓기를 좋아했던 선사는 그 옷 속에 폭죽을 감추어 놓으므로 슬픔을 기쁨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오래전에 끄적였던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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