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의 친구’10주기 추모행사
9일 제정구 전 의원 추모미사·출판기념회
빈민사목위원회 ☎727-2427 www.poor.or.kr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박재천 사무국장 ☎018-326-9802
‘가난한 이들의 친구’, ‘철거민의 대부’ 고(故) 제정구(세례명 바오로) 전 의원을 기리는 미사와 출판기념회가 선종(善終) 10주기인 9일(월) 오후 6시 서강대학교 곤자가컨벤션(마포구 신수동)에서 열린다.
제정구기념사업회(이사장 김학준)와 예수회 한국관구(관구장 신원식 신부)가 함께 준비한 이번 추모행사는 「예수회 신부 정일우 이야기」출판기념미사, 책 헌정, 기념공연의 순서로 진행된다. 미사는 신원식 신부와 예수회 사제단, 이강서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와 빈민사목위원회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다.
제정구기념사업회는 고인의 뜻을 기리며 ‘제정구의 성경풀이-사람의길’(2007), ‘생명정치의 길’(2008)을 펴냈고 이번 10주기를 맞아 ‘예수회 신부 정일우 이야기’를 펴냈다.
제정구기념사업회 이사이자 제 의원의 부인인 신명자씨는 “제 의원이 살아계셨다면 당신의 스승이며 도반(道伴)이신 정일우(John V. Daly) 신부님에 대해 당연히 무엇인가 기록하셨을 것이고, 이 기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이 시대의 희망임을 알리셨을 것”이라며 “제 의원의 바람대로 많은 이들이 정 신부님의 삶과 신앙, 영성을 서로 나누고 소외된 이들 편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4일(토)부터 15일(일)까지 경남 고성의 제 의원 묘소 참배와 순천만 습지탐사․조계산 선암사를 둘러보는 추모기행도 마련돼 있다.
▣「예수회 신부 정일우 이야기」
제1장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다
제2장 진짜 사람이 되고 싶다
제3장 내 사명은 ‘공동체가 생기게끔 사는 것’
제4장 나의 갈 길을 열어주신 분
제5장 어진 눈을 가지신 분
제6장 가난을 증거 하는 삶
1장부터 4장까지는 정일우 신부의 인생 역정을 담았다. 5장 ‘어진 눈을 가지신 분’은 예수회 한국관구 회원들이 바라본 정 신부에 대한 인터뷰와 기고글을, 6장 ‘가난을 증거하는 삶’은 복음자리마을·한독마을·목화마을 주민, 천주교 도시빈민회, 상계동 철거민들의 증언을 엮었다.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펴냄. 10,000원. 구입문의 ☎747-9052, 9057
▣ 제정구(諸廷坵) 1944. 3. 1 ~ 1999. 2. 9
1944년 경남 고성군 대가면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유신정권시절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청계천판자촌에서 ‘도시빈민들을 내버려두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이며 위선’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청계천에 살기 시작해 ‘배달학당’을 여는 등 본격적인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다.
1977년 서울 양평동 판자촌이 철거되자 주민들을 이끌고 경기 시흥에 ‘복음자리’ 마을(www.bokumjari.or.kr)을 만들었으며, 1979년 한독마을, 1985년 목화마을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복음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 복음장학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주민들의 자립을 주도했다.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목동과 상계동 등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을 중심으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1986년 정일우 신부(예수회)와 함께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부문을 수상했다.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의장,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이사,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활약했다.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펼치다 1999년 2월 9일 폐암으로 선종했다.
▣ 정일우(John V. Daly, 鄭日佑; 1935. 11. 21 ~ ) 신부
존 빈센트 데일리.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1935년 11월 21일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다. 1953년 8월 8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위스컨신 관구 수련원과 주니어레이트 과정을 거쳐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0년 9월 21일 신학생 신분으로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 3년 동안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63년 7월 미국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6년 6월 8일 사제품을 받았다. 1967년 이번엔 신학생이 아닌 사제의 신분으로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예수회 부수련장, 수련장을 맡으면서 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1973년 11월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었다는 뉘우침으로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도반(道伴) 제정구를 만났다. 1975년 11월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으로 철거민 집단이주 마을로 1977년 복음자리, 1979년 한독주택, 1985년 목화마을을 건립하였다. 1980년대는 목동, 상계동 등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다.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회․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를 교구장 자문기구로 설립하는데 기여했으며, 1988년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 설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1986년 필리핀에서 제정구 의권과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예수회 한국관구에서는 1991년 사회사도직 한몸 공동체 초대원장과 부지구장 겸 양성담당을 맡았다. 1994년 11월부터는 ‘잊혀진 존재’인 농민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서 예수회 ‘누룩공동체’를 이루어 농부로 살았다. 2002년 4월 예수회 사회사도직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예수회 제3 수련장을 맡았다.
1960년대부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1997년에야 귀화 신청이 받아들여져 ‘정일우’라는 이름이 적힌 한국 여권을 갖게 됐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마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