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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1012년 5월 18일(금)
장소 : 경상남도 창녕군 일원
반월당(08:00출발) - (50.7km.50분) - 술정리삼층석탑(08:50도착.관람40분.9:30출발) - (0.5km.5분) - 창녕석빙고(9:35도착.관람30분.10:05출발) -(0.5km.5분) - 만옥정공원.진흥왕척겿비.창녕객사.퇴천삼층석탑(10:10도착.관람50분.11:00출발) -(0.6km.8분) - 교동고분군.창녕박물관(11:08도착.관람40분.11:48출발) - (1.1km.5분) - 창녕송현동마애여래좌상(12:53도착.관람10분.1:03출발) -(11.4km.20분.점심:1시간) - 영산민속박물관(2:23도착.관람37분.3:00출발) - (18.9km.30분) - 박진전쟁기념관(3:30도착.관람35분.4:05출발) - (27.9km.40분) - 석리성씨고가.양파시배지(4:45도착.관람40분.5:25출발) - (9.2km.14분) -산토끼노래비.이방초등학교(5:39도착.관람30분.6:09출발) - (52.5km.47분) - 반월당(6:56도착)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사적 제514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송현리 일대)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고분군으로,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1917년의 분포조사를 시작으로 1918년, 1919년에 걸쳐 11기의 고분이 발굴조사 되었으나 제21, 31호분을 제외하고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으며, 조사자에 따라 고분번호를 달리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조사된 고분이 어느 고분인지 정확하게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이 시기 조사를 통해 마차 20대와 화차 2량분의 토기와 금공품들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보관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 199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1~4호분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횡구식 석실 구조와 봉토의 구획성토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으며, 토기류, 각종 금속유물 등이 출토되어 창녕지역의 고분문화 및 편년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학술정보를 제공하였다. 한편 2004년에는 1917년 일본인에 의해 교동고분군의 분포조사가 실시된 이래 처음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이미 복원된 36기 외에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하였다.또한 2002년부터 경남문화재연구원(2002년~2004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04년~2006년)에 의해 실시된 송현동고분군 6.7호분의 발굴조사에는 국내 최초로 배모양의 녹나무관과 함께 280여점의 토기를 비롯한 장신구·마구·무구·농공구 등 90여점 이상의 철기와100여점이 넘는 목기가 출토되어 학계의 큰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06년~2008년 까지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대형봉토분인 15·16호분과 중형봉토분으로 추정되는 17호분, 7기의 소형석곽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15·16·17호분의 경우 이미 도굴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이기는 하였으나 봉토의 축조수법과 관련된 자료를 확득할 수 있었으며, 특히 15호분에서 확인된 4구의 순장인골에 대한 학제간 융합연구를 통한 복원연구는 고고학계에 큰 이슈를 남겼다.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통해 보면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을 비롯한 각종 철제무기류, U자형삽날을 비롯한 각종 농공구류와 금속용기류, 각종 토기류와 목기류가 교동·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일부 토기류룰를바롯한 대부분의 유물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그 양상과 형태가 거의 흡사하며, 고분의 구조와 함꼐 볼 떄 5~6세기 전반의 중심연대가 되는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있다.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 각각 사적 제80호와 제81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2011년 7월 28일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인접지역 고분군 통합에 의해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창녕박물관(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87-1번지)
화왕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2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 등을 갖추고 있다.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의 유물 총 166종 276점 (토기류 85점, 마구류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구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시관 중앙홀에는 가야고분의 축조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디오라마)이 설치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가야시대 고분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국보 제33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14년 2월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서 였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순수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부터라고 한다.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蓋石)이나 대석(臺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다.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년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字劃)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창녕척화비 (昌寧斥和碑.도문화재자료 제218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창녕읍 교하리에 있는 것을 광복 후 만옥정에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23㎝, 폭46㎝, 두께 20㎝ 화강암제로서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구한말 대원군이 서양열강들이 조선 내에 세력을 뻗치고자 하므로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이 이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창녕객사 (昌寧客舍.도유형문화재 제231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2)
이 객사 건물은 그 축조연대를 알수 없고, 또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주사(主舍)와 양익사(兩翼舍)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주사(主舍)로만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4년 12월 당시 군수 이장희가 시장이설계획에 따라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하여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5월 이곳 만옥정에 이전ㆍ보수 하였다. 높이 2.85m, 둘레 1.5m의 나무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용마루와 서까래, 이음부분 등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300~400년 전의 건축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주두(柱頭)와 익공(翼工)을 일부에 사용한 익공계의 건물이다. 수차례 해체와 이전으로 인해 벽체는 없어졌고 나무로 된 뼈대만이 남아 있다.
퇴천삼층석탑 (兎川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0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원래 창녕읍 퇴천리 398번지에 있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완, 수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탑은 이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 일반형의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상층기단(上層基壇)과 갑석(甲石) 일부가 부서져 없어졌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고, 탑신 각면(各面)에는 양 우주(隅柱)만 새겨졌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 仁陽寺 造成碑.보물 제227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294)
일명 인양사(仁陽寺) 비상(碑像)이라고도 하는데, 인양사의 금당(金堂) 후편에 세워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일대의 전답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로 인정되는 문양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에는 대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각 안에 머리가 결실되고 없는 높이 55㎝가량의 석조좌상 1軀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창녕박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또 비석도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서쪽 편에 총탄흔적이 있고 북쪽 편 비상에도 총탄 흔적이 뚜렷이 생겼다. 귀부와 이수 대신에 장방형의 대석과 옥개형의 개석을 얹은 특이한 모양의 비(碑)로 불사(佛事)조성에 관하여 기록한 특수한 비석이다.인양사(仁陽寺)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등의 조성연대와 소요된 양식에 관하여 낱낱이 기재하였다. 앞면과 양측면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고, 뒷면 전부에는 우아한 기법으로 승상이 양각되어 있다. 앞면의 비문(碑文)은 비의 제목없이 10행으로 각(各) 행(行) 28자(字)를 자경(字徑) 4㎝의 육조체(六朝体)로 새겼다. 비문(碑文)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뒷면의 조상(彫像)을 지장보살(地藏菩薩像)이라고도 하고, 인양사 조관(造管)의 공로자인 한 고승의 조상(彫像)이라고도 하는 두가지 설이 있는 비(碑)이다.
창녕 석빙고 (昌寧 石氷庫.보물 제310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조선조 시대에 중수하였다고 보는 빙고(氷庫)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藏氷)의 풍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다. 빙실(氷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옆으로 건너 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換氣孔)이 두 곳 설치되었다.벽은 잡석(雜石)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房壁)이 되게 표면(表面)을 치석(治石)하였다. 이러한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적인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을 뿐이다. 빙고 우측에 남아있는 비에 의하면 “崇禎紀元後再壬戌二月初一日女四月初十日畢”이라 새겨져 있으며 조선영조 18년(1742)에 현감 신서(申曙)등이 축조한 것으로 되어있다. (빙실길이: 13.05m, 홍예높이: 약4.75m, 너비: 4.65m)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국보 제34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年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 보존 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의 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형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 유리제(製),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립(粒), 향편(香片), 유리소주(小珠)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복원시 사리는 다시 스테인레스용기에 넣어 탑내에 보관되었으며 다른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탑을 동탑(東塔)이라 하는 것은, 한 사찰내(寺刹內)에 쌍탑(雙塔)이 건립(建立)된 때문이 아니라 행정구역상 술정리 내에 2기의 석탑이 존재하는 이유로 붙여진 명칭이며, 서(西) 삼층석탑(三層石塔)은 약 1㎞ 떨어진 곳에 있다. 이중기단(二重基壇)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基壇)은 이중(二重) 4개의 면석(面石)과 4개의 갑석(甲石)으로 조립되었고, 상하(上下) 기단(基壇)의 면석(面石)에는 모두 탱주(撑柱) 2주식(柱式)이 각출(刻出)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매이며 옥개석(屋蓋石)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결실되었다. 세부 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작풍(作風)에 있어 장중명쾌(莊重明快)한 기풍이 있는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各部)의 수법도 통일신라(統一新羅)초기(初期)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불국사(佛國寺)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제작 시기 또한 석가탑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보물 제75호.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이 불상은 커다란 암석을 이용해 조각 된 마애불(磨崖佛)로 암벽을 이용했으나 통상의 평면조각이 아니고 좌불(坐佛)의 돋을 새김이 두드러지며, 특히 암석 자체가 보주형(寶珠形)으로 생겨 자연 광배(光背)를 이루고 문양은 없다.불상의 얼굴은 안으로 미소를 머금은 풍만한 모습이며,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1단의 선을 마련한 특징적 표현을 안고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下體)에는 두발을 표현하지 않았다. 우측만 걸친 법의(法衣)는 유려하게 표현하였으며 전체적인 체구, 얼굴, 의문(衣文)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과 같은 양식을 직접 모방했습니다. 그러나, 어깨가 당당한데 비하여 다소 움츠렸고 체구가 옆으로 지나치게 벌어져서 힘이 없어 보이는게 흠이다.
창녕 영산 석빙고 (昌寧 靈山 石氷庫.보물 제1739호.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410-2번지)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창고이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와 조선 후기의 읍지에 따르면 현감 윤이일이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로 갈수록 낮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이다. 창고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 보면 빙고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개울에 물이 말랐지만, 이는 상류에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나, 쌓은 수법은 같다. 영산 석빙고는 1969년 2월 2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12월 23일 보물로 변경되었다.
창녕 영산 만년교 (昌寧 靈山 萬年橋.보물 제564호.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4)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고 하여 院(원)다리라고도 하는 이 다리는 다리의 경계에 세워진 남천석교비(南天石橋碑)에 의해서 1780년 석수 백진기(白進己)가 축조하였고, 1892년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암반 위에 대석(臺石)을 설치하고 편단석(扁單石)을 올려 반원(半圓)의 홍예(虹蜺)를 구축하였으며 외형은 무지개 모양이다.홍예(虹蜺) 재료는 화강암(花崗岩) 각재(角材)이며, 전후 양측의 다리 벽은 자연잡석을 쌓아 메꾸었으나 홍예 머릿돌 위에는 비교적 규격이 큰 각이진 돌을 배열하였다.홍예 석축 위는 상승각도가 완만한 흙으로 되어 있고 난적석벽(亂積石壁)은 더욱 길게 전후로 연장되어 양 개울가의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전체 길이가 13.5m, 폭이 3m이다.
창녕석리성씨고가(昌寧石里成氏古家.도문화재자료 제355호.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322번지)
성씨 고가는 대지 내에 안채, 사랑채, 창고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총 6동의 건물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앞에 사랑채와 중문채를 두고, 안마당 좌우에 토담집 구조의 곳간 2동을 배치했다.안채는 정면 6칸, 측면1.5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창건후 계속적으로 배면의 쪽간을 확장하여 內室化하여 평면상으로 겹집을 연상하게 한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안방 1칸, 대청 2칸, 건너방 1칸, 마루와 화장실(1칸)이 연접된 형태이다. 건축양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로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에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이며, 건축형식은 안채와 마친가지로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 가이며,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중문채는 사랑채 정면 우측에 연결되어 건축되어 있어 평면상으로 마치한 건물처럼 보이나, 입면상으로는 구분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누마루와 중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대문칸 1칸, 문간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석 외별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운 형태로, 건축형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장혀수장집이다.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가 이며,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이 건물의 안채와 사랑채는 공히 일제강점기 중반(1929년)에 건축 또는 이건하여 해온 것으로, 가구수법과 공간구성, 입면형식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박진전쟁기념관(경남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624번지)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차를 앞세우고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일거에 38선을 돌파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한강을 넘어 남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힘을 모아 혈전을 거듭하면서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군사력이 열세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계속하다가 개전 40여일이 경과한 8월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에 더 물러설 곳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왜관-상주-영덕을 연하는 전선은 국군이, 현풍-창녕-진동을 연하는 전선은 유엔군이 방어하게 되었다.
이곳 박진지역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던 북한공산군과 미군이 2주간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이 8월 5일 야간에 이목나루터를 이용,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11일에는 영산면까지 침공 당하기도 했으나,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였다.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중요한 전적지이다.
산토끼(고 이일래선생의 산토끼 동요.이방초등학교)
고 이일래선생은 1903년 5월 10일생으로 경남 마산시 성호동 62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며 마산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1920년도에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중동학교에 진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 이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나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한 천도교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거기서 이선생은 김영환 독주회를 보고 감동을 받고 난 뒤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김영환씨가 출강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해 김씨에게서 음악을 지도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던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때 김씨에게서 2년간 배운 바이올린 솜씨로 YMCA에서 홍난파 선생이 퍼스트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이일래 선생이 세컨드바이올린을, 김영환씨가 피아노를 맡아 트리오를 구성해 연주회를 갖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다시 창녕군 이방면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창신보통학교를 재직하면서‘고향’을 작곡한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에 와서‘산토끼’와 ‘단풍’을 작곡한다. 1936년부터 40년까지 5년간은 마산 제비산에 있던 호주선교사의 어학교사로 재직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 과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1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국 후 이선생은 마산여자 가정학원을 설립해 여성들의 개화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학원은 1943년도 폐쇄되었고, 이선생은 이듬해에 만주로 넘어갔다. 만주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7년도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으로 취임해 2년간 공직 생활을 한 후 퇴직, 일반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특히 이일래 선생은 마산의 호주선교사 와의 인연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해방 후 미 군정 당시 CIC 마산대장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51년 마산 민선시장 선출 때는 청년활동 등 의욕적인 움직임으로 출마설까지 나돌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일래 선생의 음악생활은 연희전문학교의 김영환씨에게서 배운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마산문창교회 성가대를 맡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당시 문창교회에는 유명한 주기철 목사가 있었는데 주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성가대 지휘와 신앙심에도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은 호주선교사 어학 교사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 다닐 때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약 1백 여 곡의 노래가 따로 기록된 책자가 있었으나 6.25 당시 모두 분실 됐고 지금은 아쉽지만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를 제외하곤 발표된 곡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1938년 1천부의 초판을 찍었으나 출판사에서 몽땅 다 가지고 가버려 다음해에 호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재판 1천부를 다시 찍었다. 이때 이선생은 마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영어가사를 붙여 2백부는 자신이 가졌으며 7백 여부는 호주 등 세계 여러나라에 보내졌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우리나라 에서는 홍난파 동요집 다음으로 발행된 소중한 동요집이다.
이일래 선생은 1947년에 15년간의 교직생활을 떠나서 초대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맡게 됐으며 이후 임영신씨가 운영했던 중앙대 관사에 머물다 6.25를 만나 소장 중이던 동요집을 단 한권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분실하게 된다. 이선생은 시간이 지나간 뒤 책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중 마산에 있던 친구가 책을 구해줘 1975년 영인본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마산의회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그 해 7월 7일 오후 4시 서울 YMCA회관에서 한국동요 동인회 주최로 복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동요집에는 ‘산토끼’. ‘봄노래’, ‘봄’, ‘해바라기’, ‘노고지리’, ‘엄마생각’, ‘아침’과 ‘시편23’ 등 주옥같은 동요와 성가21곡이 실려 있다. 이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했으며 평생을 두고 음악을 떠난 1944년 이후에는 사회활동에 비해 음악활동을 소홀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의 성격은 인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 재직 시 산토끼를 만든 계기가 된 고장산을 자주 올라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혼자서 노을이 질 무렵이면 고장산에 올라가 자주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는 나라의 상황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이선생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고장산에 올라가 산책을 하는 등 신학문을 공부해 개화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제자들은 회상한다.
이일래 선생은 1975년을 전후해 첫딸 명주씨의 집인 서울에서 거주했으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202번지로 이사를 해 1979년 가을께 76세의 연세로 작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