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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5년 5월 29일(금)
장소 : 산청군 일원
일정 : 반월당(08:00 출발) - (117.2km. 1시간50분) - 구형왕릉(9:50 도착. 관람 40분. 10:30 출발) - (1.1km. 6분) - 덕양전(10:36 도착. 관람 30분. 11:06 출발) - (4.7km. 9분) - 산청동의보감촌(11:15 도착. 관람 1시간45분. 점심(1:00 - 2:00) 2:00 출발) - (30.9km. 43분) - 남명조식 유적지(2:43도착. 관람 1시간30분. 4:13 출발) - (14.3km. 23분) - 성철대종사 생가(4:36 도착. 관람 50분. 5:26 출발) - (7.5km. 6분) - 문익점 묘(5:32 도착. 관람 30분.6:02출발) - (102.8 km. 1시간40분) - 반월당(7:42 도착)
버스타는 장소 : 경산 세명병원(07:10)-정평역(07:20)-고산역(07:30)-남부정류장(07:40)-대구은행(07:50)-반월당(08:00)
□ 구형왕릉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 구형왕릉, 이 능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이다. 구형왕은 구해 또는 양왕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 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 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고, 이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이 무덤은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 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덕양전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은 조선시대 사당으로 전구형왕릉의 재실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되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막향화를 드리고 있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양왕은 금관가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옮겨와 5년 뒤 죽었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는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1898년 승선전(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였다. 1930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991년 중건하였다.
가락국 제10대 왕인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양왕은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 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다. 광무 2년(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동의보감촌
지리산과 동의보감의 고장, 산청은 당대 최고의 명의인 류의태 선생과 허준 선생, 조선후기에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초삼, 초객 형제 등 명의들로 이름난 전통한방의 본 고장이다.
또 지리산 자락에서 자생하는 약초는 그 효능이 탁월해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산청군에서 금서면 특리 일원에 산청 한의학박물관을 짓고 매년 한방약초축제를 열어, 동의보감촌을 조성하는 등 산청을 한방약초, 한의학의 성지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
동의보감촌에는 우주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나무, 불, 흙, 광물, 물)를 주제로 한 산청 한방테마공원이 있다. 테마공원은 친환경적으로 기존 수림대와 계곡을 조성하였으며 산책로도 마련되어 있어서 관광과 휴식을 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국 최초 한의학전문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산청 한방테마공원으로 발길을 돌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곰과 호랑이 상징 조형물과 샘골이다. 조명 등과 울타리 장식이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상징거리 오른쪽에는 초정이라는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는 물긷는 소녀상이 있다. 샘골 바로 옆으로는 명의동네라 이름 붙여진 산책로가 있는데 지압보도가 설치되어 있어 신발을 벗고 지압을 해도 좋을 듯하다. 한방골의 대표적 조형물인 곰 조형물은 전망대 역할을 한다. 그 외 십장생 공원, 12 지신 분수광장, 인체의 내부를 표현한 조형물 등을 감상 할 수 있다. 놀이동네도 있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곳이다. 가족여행하거나 여름 휴가를 보내기에 좋은 곳이다.
□ 남명조식유적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유적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曺植遺跡은 朝鮮中期의 偉大한 儒賢이며 뛰어난 實踐 道學者였던 南冥先生이 晩年에 講學하던 山天齋를 비롯하여 死後 그를 모시던 (德川書院 등을 一括 指定한 遺跡地이다.
南冥 曺植(燕山君 7년 1501∼宣祖 5년), 字楗仲, 別號山海, 本貫昌寧은 남다른 才質과 用工((節制로 일찍부터 學德을 갖추어 大成하였으나 仕宦(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平生동안 선비와 處士) 山林로서 굳건히 一貫하였다.
38세 때 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除授되고 王이 面對하기를 請(징소(徵召)) 하였으나 매번 上疏(封事로써 疑見)을 開陣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66세(明宗 21, 1566) 되던 해 10月 初에 上京하여 王을 暫時 뵈옵고는 곧 歸鄕하였다. 死後 光海君 7年(1615)에 領議政으로 追贈되고 諡號를 文貞이라 하였다.
□ 성철대종사 생가
퇴옹 성철 큰 스님은 출가한 곳 해인사 백련암에서 1993년 10월 4일 7시30분 열반에 들었다. 그는 어지럽던 한국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가야산 호랑이었고 우리 한국 불교의 얼굴이었다.
타종교인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부처님 오신날 방한을 스스럼없이 환대하였던 한국의 거인 그의 속관은 합천이씨로서 임천처사죽각광우의 11세손으로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부율은공 이상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가소생으로 일찍이 단성초등학교를 거쳐 진주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20세때 전주이씨와 혼인하여 맞딸을 두고 젊은시절 사상적으로 방황하던 그는 불경에 이끌려 지리산록에 위치한 대원사에 참배하려 입사했다. 처자까지 거느린 그가 속인은 들어갈수 없는 탑전에 자리를 깔고 참수행에 들어간 것이다.
절집의 '룰'을 깨뜨린 셈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간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굳은 집념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던 동산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다.
여러 스님들이 그를 살펴보았고, 동산스님이 그에게 "중이되어라" 고 권했다. 동산스님은 그를 성철이란 법명을 주면서 머리를 깎였다. 그는 후일담을 "우습게 중이 됐어" 라고 했다. 그 때 나이 24살(1935년)이었다. 집에서는 맏아들의 출가에 대해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중이 안되면 내가 죽을 팔자라" 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위협을 했다.
그후 금강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모친이 자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속세와의 단절을 위해 산위에 올라가 어머니를 접근 못하게 "후레자식" 처럼 돌을 던졌다고 한다. 모친은 한수 더 떳다. "너 보러 안왔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지" 라고 했다 한다.
큰 스님 그는 198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것은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퇴옹의 답변은 "출가란 조그마한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인 국가와 사회를 위해 사는게야!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일체를 위해서 사는데 있는 이것이 불교의 참 사상이야" 라고 했다 한다.
□ 문익점 묘
선생은 서기1331년 2월 8일 고려 강성현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배양에서 남평문씨 충정공 문숙의 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총명하고 온후하며어릴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큰 학자이신 가정 이곡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닦고 서기1360년 공민왕 9년 정동성 과거에 급제하시고 다음해에 경덕재를 수립하셨다.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을, 공민왕 10년에는 예문관 직강을 하셨고 그 다음해에는 순유박사, 이듬해에 좌정언이 되어 서장관으로서 원나라에 가는 사신 계품사 이공수 일행과 같이 가셨다.
이때 고려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 왕시가 원나라에 머물면서 고려에서 잠입한 최유와 음모하여 원나라 대신 삭사감과 환자인 독로첩목아와 박불화 그리고 본국의 김용과 내통 공모하여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세울 계략으로 원나라 순제의 승낙을 받고 명망이 높은 문익점 선생에게 동조하기를 강요하였으며, 원나라 임금 순제도 선생에게 예부사랑의 높은 벼슬자리를 주면서 음모에 가담토록 권하였다. 그러나 문익점선생은 절의를 지키고 거절하였다.
그후 서기 1364년에 이들은 고려를 쳐들어 오다가 고려의 장수 최영과 이성계에게 대파하고 말았다. 그들의 음모가 이렇게 실패하자 선생은 원나라 순제의 미움을 받아 서기 1364년 11월 지금의 월남땅 교지국으로 귀양길을 떠나 다음해 3월에 적소(귀양간 곳)에 이르렀다.
그 후 원나라 임금도 문선생의 의견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문선생을 귀양에서 풀어주게 되었으니 그때가 서기 1366년 공민왕 15년 이었다. 순제는 선생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으니 신하 되기를 원했으나 선생은 본국 고향에 노부모가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줄 수 없음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귀국하니 공민왕이 선생의 충의에 감동하여 중현대부에 예문과제학과 지제교의 벼슬을 제수하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는 성균관 학관에 뽑히고 그 다음해에는 동관의 사성이 되었다. 서기 1385년 우왕 11년에는 전의주부가 되고 그해에 청도군사를 강론하셨으며 서기 1389년에 좌사의대부로서 시학이 되어 학문을 위하는 길을 상소로써 논하였다. 이때 이성계와 조준, 이정 등이 전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선생은 반대한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가 59세였다.
문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이성계가 친히 청하여도 나가지 않고 거절하였고, 이태조 7년에 별세하였다.
그 후 태종이 문익점 선생의 높은 공덕과 충의를 높이 평가하여 강성군으로 봉하였고, 또한 충선이란 시호를 추서하셨다. 세종께서는 의정부의 영의정으로 증직하였고 부민후의 후작을 추서하셨다. 이런한 선생의 업적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절의를 지키다가 원나라 순제의 미움을 받다 귀양살이를 할때에 그곳에서 피어있는 목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동 김용으로 하여금 그 목화의 종자를 따게하여 금수품인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붓대롱에 넣고 귀국하여 번식시킨 점이다. 그때가 서기 1367 공민왕 16년 정월에 원나라에서 출발하여 2월에 개성에 돌아오셨다.
그리하여 고향인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배양에서 목화를 시배하였다. 시배지는 사적 108호인 단성면 사월리 106번지의 1 밭이며 이곳에 목화시배 사적비가 있다. 시배에 성공하고 종자를 선생의 빙장인 정천익에게도 재배케하여 해마다 많은 종자를 거두었으며, 전국적으로도 널리 보급하였다. 이렇게 재배된 목화는 씨아에 넣어 종자를 빼고 물레에 돌려 실을 뽑고 베틀에 올려서 면포를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 부유층은 명주나 모시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보통 평민은 갈포나 삼베로 옷을 입어 겨울을 지내는 고통을 겪었는데 목화로 면포와 솜을 가지고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의류생활의 일대 개혁을 가져왔으며 국민경제는 물론 국가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공덕이 이러하니 세종이 선생에게 부민후라는 후작을 추서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목화의 가공법은 선생의 손자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또는 선생의 장인 정천익 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다. 조선 초기 정종이 사액하고 태종 때 건립한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은 선생을 모시고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선생은 우리고장 산청이 낳은 유신이며 성리학자로서 당대의 충신과 애국 애족자이였다.
선생은 자호를 삼우당이라 하였다.
그의 뜻은
첫째 나라의 운수가 부진한 근심, 둘째 성학의 발달이 부진한 근심, 셋째 자신의 학문이 부진한 근심,
이 세가지 근심으로 평생을 충, 효를 바탕으로 몸소 실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나라에서 효자비라는 정려를 내렸다. 당시 선생이 계시던 지금의 배양에 그 정각이 존재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충과 효를 다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부를 안겨 주었으니 참으로 선생이 남기신 정신적, 물질적 문화는 우리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출처 : 산청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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