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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마지막 일요일
김 종 윤
최선의 선택을 위해 월말임에도 모든 걸 다 팽개치고 복정역으로 발길을 분주하게 옮겼다. 손종구회원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버스 안에 좌석이 거의 반쯤 메워져 있었다. 한 달 만이지만 서로 반가워 악수하고 안부 묻고 한창이다.
몇몇 회원님들이 늦는 바람에 예정시간 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좌석은 빈자리 없이 꽉 찾다. 사무국의 노고가 읽혀진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긴장 풀고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과 설레임 가득 싣고 떠나는 탐방은 더더욱 그렇다.
사실, 우리 회원들은 참 진지하다. 매달 나름대로의 새로운 배움을 위해 모이지만, 서로의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만나는 17년이란 연륜은 남사모의 틀을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일 게다. 이게 우리의 정서다.
사무국장의 인사말과 오늘의 일정을 듣고, 새로 오신 분들 위주로 인삿말을 들은 뒤, 회장님으로부터 상당산성과 직지에 대한 충분한 말씀을 듣고 오늘 탐방의 의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버스가 상당산성 주차장에 멈추자마자 오늘 우리를 안내하실 해설사를 소개받았다.
편안한 복장에 마이크를 잡은 해설사는 처음부터 약간 위축된 듯 설명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6월의 마지막 날, 햇볕은 강렬했다. 모두가 그늘로 모여든다.
상당산성 남문 앞, 잘 다듬어진 넓다란 잔디밭 저쪽에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가 눈에 띈다.
우리는 남문 앞에서 남문을 포함한 상당산성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우측 대나무 숲은 화살로 쓰려고 심은 것이란다. 또한 북쪽은 워낙 경사가 심해 문이 없어도 방어하기에 충분하단다.
상당산성은 정문으로 무지개 형태로 무사석을 다듬어 11단으로 쌓았으며, 안쪽은 옹벽이 있고 문을 보호하기 위해 좌우에 치성이 있는 남문(공남문), 평문으로 거대한 무사석 2개 위 에 장대석을 올려놓고 성벽이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옹성처럼 되어있는 서문(미호문), 그리고 우리나라 산성의 일반적인 형태인 동문(진동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남문으로 들어가 그때 그 어느 장수가 그랬을 법한 "문을 열어라!"하고 우렁찬 소리로 박용규회원이 외쳤다.
해설사를 앞세우고 성곽을 따라 쭉 걷다보니 해설사 설명 없이도 남.사.모 회원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산성이다. 남한산성에 비해 단조로운 것도 특징이다. 남한산성이야 말로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산성 중 최고가 아닌가? 그래서 남.사.모 회원들의 산성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다. 성벽에 여장이 없는 걸로 보아 아직 복원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남암문에 이르렀을 때, 저 아래 우암산 너머로 청주와 청원의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상봉대와 것대산 봉수대도 눈에 들어온다. 남한산성 서문에 서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듯 말이다. 아마도 어느 산성이든 위치는 그래야만 되는 것 같다.
땡볕은 우리를 계속 괴롭혔다. 아이스께끼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힘에 넘친다. 어렸을 적 장작주고 사먹던 추억이 스친다.
우리는 그늘을 찾아 서둘러 서문으로 갔다. 그리고 서문 밖, 쑥 향기 그윽한 곳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한낮 내리쬐는 햇볕을 핑계삼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근처에 이르렀을 즈음 전답과 저수지가 눈에 띤다. 성안에서 자급자족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기만 제외하면 남한산성과 흡사했다.
점심은 오늘 일정의 분기점이다. 빨리 먹고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가야한다.
된장국과 시골냄새 물씬 풍기는 나물 반찬, 그리고 막걸리 맛을 한층 돋구어 주는 두부김치는 일품이었다.
인류 정보화의 1차 혁명은 정보를 주고받게 한 '말'이고, 2차 혁명은 정보를 원형대로 보관, 이전하게 한 '문자'이고, 3차 혁명은 지식과 정보를 대량 보급 시키게 한 '금속활자'이다. 그리고 4차 혁명은 지식정보 전달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없애 준 '컴퓨터'이다.
특히 3차 혁명인 금속활자는 지식과 정보를 대량 보급, 많은 사람들이 공유함으로써 의식혁명에 길을 열게 한 장본인이다.
버스가 고인쇄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자, 여러 개의 비행접시 같은 지붕을 한 나즈막한 박물관이 가까이 다가왔다.
안내소에서 인사를 하고나니 해설사가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박물관에 들어 설 때부터 정장차림의 해설사는 지식이 풍부하고 적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알고 보니 전직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이란다.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는 1200년 초, 이미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금속활자로 인쇄된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한참 나중에 발행 된 책,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중 세계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잘 보존되어 있어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켜 준다.
'직지'는 오늘 날 출판물처럼 맨 뒤에 판권이 있다.
판권에는 책 제목, 인쇄 시기, 인쇄 장소, 인쇄 방법 등이 적혀있다. 정가만 없을 뿐이다.
지은이와 책의 편집 형태, 책의 내용은 책 제목인 "백운화상초록불요직지심체요절"에 다 들어 있다. 1377년 일이다. 그때도 실명제(?)가 실행됐었고, 그 형식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 오고 있는 것이 놀랍다.
물론 그 이전 목판본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영상관으로 안내됐다.
<직지>의 뜻은, 조금 전 버스 안에서 회장님으로부터 들은 바와 같이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본래 대로 올바르게 바라 볼 수 있을 때 그 바라보는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다'라고 들었다.
비디오 상영을 보고 우리는 해설사를 따라 직지와 흥덕사관, 직지금속활자 공방 재현관, 인쇄 문화실, 동서양의 인쇄 화실, 기획 전시실, 활자 주조와 조판실 등을 들렀다. 오늘날 출판과정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지금은 컴퓨터로 글자를 입력시키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자판으로 인쇄를 했다. 오래된 출판사의 대학교재는 지금도 활판으로 인쇄하는 곳도 있다.
한 가지라도 더 알게 해서 보내려는 전직 교장선생님의 열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 직지는 한국에 없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단독 금고에 보관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없단다. 하루빨리 우리에게로 돌아오기를 빈다.
고인쇄박물관을 다 들러 본 우리는 해설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몇몇이 기념촬영도 했다.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박물관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오는데 왼쪽으로 흥덕사 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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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과 남한산성
김삿갓 이야기 중에서
김삿갓은 三田渡에서 청태종 공덕비를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이 번개처럼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임금 인조가 세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위 受降壇이라는 높은 단 위에 오만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저 북녘 오랑캐 청태종에게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를 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항복을 받은 후에 그들은 왕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무고한 백성을 50만 명이나 포로라는 이름으로 잡아가면서도 皇恩이 망극함을 감사하라면서 항복을 받았던 그 자리에 소위 <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우라고 하여 온 조정과 백성이 울면서 세운 그 비석이다. 먼저 비문의 초안을 써 받치라고 해서 張維등 대신들에게 쓰게 하여 瀋陽에 보냈으나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하여 다시 써 보내게 되었고, 그 때 仁祖는 문장력이 좋은 李景奭(호: 白軒 당시 부제학)에게 명하여 부득이 본의 아니게 치욕의 글을 천추에 남긴 이경석은 한 평생 글 배운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글 배운 것을 한탄하기로 하면 김삿갓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글재주가 아니었던들 영월백일장에서 자기 할아버지를 매도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남한산성 문루에 올라서서 방을 둘러보다가 문득 杜甫의 시를 연상하였다.
봄이 오니 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구나.
느끼는 바 있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노라.
國破山河在
春城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나라가 망한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역사를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호를 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십만 대군을 이끌고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14일에는 개성을 점령하고 16일에는 선봉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불과 두 이레만의 일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불과 40년이요, 10년 전 정묘호란 때도 왕이 강화도까지 蒙塵하는 곤욕을 치르면서 저들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지 않았던가. 그 동안 전쟁위협을 수 없이 받았고 그들의 침공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는데 朝野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당시 남한산성에는 13,000 명의 군사와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急使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고 8도에 勤王兵(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군사)을 모집하는 격문을 붙였으나, 제 코가 석자나 빠진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낼 리 없었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달려오는 용맹한 근왕병도 없었다. 45일이 지나면서 성 안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항복하자는 主和論과 다 함께 죽을지언정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斥和論이 대립하여 입씨름만 하고 있을 뿐, 10만대군의 포위 속에 고립된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삿갓은 한숨을 푸-푸- 쉬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성을 돌아보았다. 김삿갓이 오늘의 우리현실을 보았으면 무어라고 했을까. 전쟁위협은 그 때와 다를 바 없는데 한미공조냐 민족공조냐 하고 공론만 분분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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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상당산성 탐방 결산(2013. 06. 30)~
◆수입 / 활동비-38명 ×3만원=114만원.
공석붕 찬조-1명×2만원=2만원
수입 총합-116만원
◆지출 / 식대-37만원 / 버스대여료-45만원 / 기사수고료-5만원 / 주류. 물. 안주 외 -15 만원 / 회보제작-4만원
지출 총합=106만원
◆수입 / 지출 결산= 10만원
~참석자 명단~
무순/ 조한숙. 전보삼. 김진원. 김종윤. 이종화. 주미숙. 최종섭. 신청. 신동수. 박용규. 김경덕. 신현일. 정완길. 김인섭. 최종대. 최동욱. 공석붕. 김태섭. 김내동. 김종권. 정병순. 이민원. 김정숙. 손종구. 배윤옥. 심교준. 우건식. 박강단. 김영성. 우애경. 김영애. 박기선. 안대군. 민병희. 정세롬. 한춘수. 정순자. 조유선.-3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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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연회비 납입/ 신청. 최종섭. 공석붕. 문제길. 김진원. 신영수. 강상원. 박용규. 김태섭. 이종화. 이대훈. 최종대. 정완길. 신창규. 최동욱. 황규준. 이순임. 김내동. 고태우. 손종구. 전보삼. 신현일. 조한숙. 신동수. 정흥숙-2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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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모 동정~
* 다음카페 (남사모 청년포럼)에 회보 열람방이 개설되었습니다. 남사모 회보는 이곳에서 영구 보존되고 24시간 열람 가능합니다. 많은 방문, 흔적 바랍니다.
* 사무국장 김진원 이-멜 : kimjw59@naver.com 전화번호: 010-7502-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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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사모 소식지를 보면 그 속에 역사와 우정이 배어 납니다.
즐겁고 유익했던 지난 달 정모의 모습들을 김종윤님께서 잘 스케치 해 주셨네요.
김삿갓과 남한산성 그리고 두보의 시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