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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 국가의 도덕성 향상과 종교의 역할
교육평론 원고
저자 : 안재오
제목 : 국가의 도덕성 향상과 종교
1. 서론 : 한국의 불법, 부도덕성의 재고(再考)
2017년 교육평론 1월호 평론에서 필자는 한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근본이 박정희 정권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산업정책에 있다고 밝혔었다. 즉 중상주의 때문에 정경유착이 발생하고 이것이 한국 사회 지도자들, 정치인들, 법조인들 그리고 기업인들의 불법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등도 모두 정경 유착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이를 막을 근본적인 대책이 없기 때문에 다음 정권에서도 불법과 비리 타락은 피할 수가 없다. 특히 대통령 임기 발의 친인척 비리 그리고 측근 비리 등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문재인씨가 집권을 하더라도 박근혜씨와 달라질 것을 크게 기대할 수가 없다. 1988년 2월 25일에 출발한 대한민국 제 6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아들 비리, 형님 비리, 그리고 언니 비리(?) 등으로 정치적인 경력의 말로를 더럽히고 말았다.
국민은 정직한데 상층부는 부패한 한국 현상의 주범은 BBC방송의 한국 특파원 스티븐 에반스 기자가 명백히 밝힌 것처럼 정경 유착이다. 그는 또한 이런 정경유착의 원인을 박정희가 주도한 경제개발, 즉 국가주도의 경제, 산업 개발의 부작용으로 보고 있는데 이 역시 아주 적확(的確)한 분석이다. IMF경제 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를 비롯한 제 6공화국 전직 대통령들이 모두 친인척 비리 혹은 측근 비리에 휩싸였던 것도 역시 국가 주도의 산업 개발의 부작용이다. <2017년 교육평론 1월호 안재오 칼럼“국민은 정직한데 상층부는 부패한 한국”>
그러나 한국 지도층들의 부도덕성은 그 뿌리가 근대사회 이전에 이미 배양이 되어 있었다. 즉 조선 시대 후기부터 지도층들의 부정ㆍ부패가 삼천리 강산에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국가 시스템은 혼란스럽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국민정신의 각성과 산업 부흥에 맞추어 부정 부패는 흔적을 감추었다가 이제 다시 그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간 정치권에서도 “김영란 법”을 만들어 뇌물 수수의 풍조를 뿌리 뽑고자 했으나 최순실 사태를 당하고 삼성 기업의 총수가 구속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공무원에게 밥 사주고 교사들에게 돈봉투 돌리는 것을 막는다고 국가의 도덕성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워낙 높은 곳의 비리는 김영란 법 등으로는 관리할 수 없다.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요원하지만 여기서는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 강화의 방법을 한번 연구해 보려한다. 그 방향은 종교, 특히 크리스트교를 통한 도덕성의 향상 가능성과 현실성 등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2. 본론 : 이사벨라 비숍 여사와 조선의 비참한 모습
한국 사회의 부정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글이 19세기 후반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여사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rs> (1897)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왕을 비롯한 한국의 지도층들, 관리들, 양반들의 부패가 얼마나 심한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비숍 여사의 진솔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최순실 사태를 통해서 극적으로 나타난 현재 한국의 부정 부패가 당시에도 그대로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차이도 있다. 즉 당시는 권력자가 관직 매매 등을 통해서 자신의 창고를 불린 반면 요즘은 무슨 공익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서 기업들로 하여금 그 재단을 후원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목적은 자신의 이익이다. 당시와 큰 차이가 바로 기업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를 왜곡시켜 탐욕을 취한 것이다. 이 과정이 다소 현란하여 일부의 국민들은 “대통령이 무슨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있어서 기업의 돈을 착복(着服)을 했겠냐?” 라고 항변하기는 하나 실은 사태의 복잡한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만큼 부정, 부패의 방법이 교묘하게 된 것이다. 박근혜는, 교육평론 1월호에서 필자가 기술한 것처럼, 벌써 몇 십년 전부터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을 시켜 기업의 돈을 착복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영국의 여행가. 그녀는 1894년과 1897년 두 번 조선을 방문하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Korea and her neighbors
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조선의 관리를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전통사상에서 명예와 정직의 전통들이 설령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조선에서 그것들은 몇세기 동안 잊혀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선말 관리에게는 청렴결백한 전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극도로 혼탁한 수준이었다. 일본이 조선의 개혁작업에 착수했을 때 조선에는 크게 두 신분계급인 착취계급(兩班階級)과 피착취계급(常人階級)이 있었는데 착취계급에는 관직에 임명된 막강한 병권을 가진 무반도 포함되었다.
착취계급으로서 양반 관료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국고의 공금을 횡령하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모든 관직은 매관매직되었다. 심지어 양반계급의 지위를 사고파는 현상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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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는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쾌락과 사교를 위해 대부분의 관리들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그의 부하를 책임자로 남겨놓았다. 재임기간은 아주 짧기 때문에 그들은 진보를 위한 백성들의 능력을 배양하기보다는 그들을 착취하는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조선 관료의 부정행위는 마치 히드라의 머리와 같아서 아무리 잘라내도 끝이 없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Korea and her neighbors - 에서 발췌>
비숍여사는 조선의 관리들을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100회 이상 일어난 민란을 보면 가이 짐작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매관매직(賣官賣職)으로 인해서 조선의 하층민들은 온갖 수탈을 당했고 그것이 급기야 민란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매관매직(賣官賣職)과 관료들의 농민들에 대한 수탈의 근저에는 삼정의 문란을 비롯한 각종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 원인으로 놓여 있었다. 아니 더 큰 원인은 조선이 쇄국주의를 택하여 급변하는 외부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국왕이 매관매직을 행한 것은 성리학적 왕정의 윤리가 중앙정치를 강하게 규제했던 18세기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1886년 한국에 도착한 미국의 헐버트 목사에 의하면 모든 관직은 그 가격이 결정되어 있는데, 예컨대 관찰사 자리는 5만 달러 정도라고 하였다. [이영훈의 조선 바로읽기①]-사대주의 허상 좇다 열강의 제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에 고령인 63세의 나이로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답사했다. 그는 한국을 정확하게 연구하여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이 시기 한국에 있었던 모든 유럽인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가 답사한 시기는 청일전쟁이 있었고 아관파천이 있어서 한국의 역사가 숨가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그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맨 처음 만난 것은 가난과 불결함이었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이 나라의 미래는 암담하다고 체념한다. 그가 더욱 절망한 것은 상류사회의 사치와 방탕이었다. 단양의 어느 토호 집에서 목격한 것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마님이었고, 남편은 스카치위스키와 프랑스제 샴페인과 꼬냑을 두루 갖춘 채 영국제 시거를 물고 있었다. 집 안은 수단제 카페트를 깔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이 걸려있었고 탁자는 미국제였다. 그가 족히 절망함직한 한국 주류들의 민낯이었다. <“잘못된 「주류들의 민낯」을 돌아보다” 시민의 소리 이홍길 고문 2017.01.12>
이런 여러 조선시대의 모습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구심이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저술하여(1818) 목민관들의 바른 자세를 상세히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조선의 관료들은 더욱 부패되는 현상을 보인다. 위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나오는 단양의 어느 토호는 요즘도 그렇게 하기 힘든 정도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나무 껍질을 먹고사는 백성이 있는 세상에서 단양의 토호(土豪)는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마님이었고, 남편은 스카치위스키와 프랑스제 샴페인과 꼬냑을 두루 갖춘 채 영국제 시거를 물고 있었다. 집 안은 수단제 카페트를 깔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이 걸려있었고 탁자는 미국제였다.
오늘 날 최고의 부자라고 할지라도 19세기 조선 시골의 부자가 누린 정도의 사치와 향락을 누리기 불가능하다. 당시 민중들은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것을 기억하면 도대체 이런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 한다. 이는 도저히 국가나 사회를 이루기 힘든 정도의 타락된 인간 집단이다. 이는 인간성의 수치이며 모욕이다. 이런 사회는 혁명이나 폭동으로 전복을 시켜야 한다. 이런 나라는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다. 이런 면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정복 당하고 지배당한 것은 고마운 일일 것이다.
한일합방 당시 민족의 존엄성이 무너진 것을 모고 자결한 선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은 기득권 상실만을 염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지난 번 국무총리 후보로 오른 문창극씨가 “일제 지배는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한 발언의 맥락이 잘 이해될 수 있다.
#일제 식민시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문창극 2011년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
필자는 문창극씨의 신학적인 역사 해석에 대해서 이렇다할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 이는 상당히 주관적인 문제라서 객관적인 학문의 영역에서는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지 필자는 왕도정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고 출발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회적, 도덕적인 부패상이 현실에 어떻게 반영이 되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할 방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조선의 이런 무능과 타락상을 보면 차라리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든다.
3. 결론 : 유교 도덕 정치와 크리스트교적 도덕 정치 ― 실천이성의 요청 ―
도덕과 종교 그리고 정치 등은 원래 서로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 세계들이다. 도덕은 인간 개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말해주는 가치의 체계이다. 혹은 좋고 나쁨을 말해 주기도 한다. 종교는 삶의 의미를 말해 준다. 정치는 사회 생활의 조직 원리를 말해 주는 가치의 체계이다. 그러나 이런 독자적인 존립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서로 뒤엉키고 상호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리적, 연역적으로 어떤 체계가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는 없고 세계 현실을 보면 어떤 시스템이 가장 좋은 지는 드러난다. 필자가 이상으로 꼽는 나라는 미국과 독일이다. 둘 다 크리스트교를 기반으로 민주주의가 잘 발달되고 산업적, 복지적으로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들이다. 특히 미국은 아직도 종교, 즉 크리스트교의 활력이 강하게 살아있다. 그 반면 독일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개신교를 창시한 나라이지만 이제 기독교는 많은 비판을 받아서 그 생명력을 많이 상실한 나라이다.
미국은 산업, 과학, 군사, 기술 등의 면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이고 독일은 사회 복지 시스템이 우수한 나라이다. 그리고 산업과 과학, 기술 등도 미국 다음은 된다.
그리고 이런 나라들은 모두 정치 - 도덕적으로 청렴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국민 개개인의 도덕성도 좋다. 물론 미국 같은 나라는 빈부의 차이가 심하고 하류계층의 (흑인)범죄가 많기는 하지만 공직자들의 도덕성은 높다. 독일은 과거의 민족적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일본과는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독일이 그들이 2차 대전과 히틀러 치하에서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였는데 이를 국가적으로 항상 고백하고 또 그렇게 학교에서도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 반면에 일본은 군국주의 시절 수십만의 중국인들을 살해하고 또 인간 생체 실험, 종군 위안부 등을 만들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을 보이지 않고 2차 대전의 전범들을 합사한 야스꾸니 신사를 각료들이 주기적으로 참배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까지도 과거사를 회개하지 못한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그들의 종교-도덕에서 유래한다. 독일은 기독교국이라서 인간의 죄악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죄악성과 신의 용서, 즉 구원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게 없다. 일본은 미신과 소박한 토속신앙의 국가이다. 일본인들은 아무나 신으로 섬긴다. 한 때 한류 스타인 동방신기 그룹의 어떤 멤버들이 일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는 소식에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일본을 하등종교의 나라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고등종교라고 불리는 불교도 민중들의 집단적인 도덕성 향상이나 공직자들의 도덕성 향상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했다. 불교에서도 “선을 행하고 악행을 하지 마라” 같은 교리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악행을 하지 않는다고 불교의 최고 목적인 성불(成佛)이나 해탈(解脫)하는 것은 아니고 하여간 그 연결 고리가 애매하다. 또 문제는 불교의 출세간(出世間)적인 속성으로 인하여 현실 정치나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 이렇다 할 입장이 없다.
불교와 더불어 한국의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유교(儒敎)는 종교라기 보다는 윤리ㆍ도덕의 체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 윤리가 철저한 상하, 서열 관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시대에 맞는 상호 평등에 기반한 수평적 윤리와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유교는 질서와 차별을 중시하기 때문에 하층 민중들의 불만에 대해서 어떤 대책은 없다. 단지 군자가 덕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군자나 왕이나 사대부 등이 도덕성을 잃고 조선 말기처럼 백성을 수탈하는 데 열중한다면 아무도 이를 나쁘다고 말리거나 심판할 수가 없다. 유교적 도덕 체계의 문제는 군주나 군자가 덕을 상실하면 그 사회는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 도덕의 다른 문제는 그것이 절대성이 없는 철저히 현세적인 가치관이라서 단순한 윤리, 도덕으로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 교육의 문제는 도덕이란 아무리 가르친다고 실제의 도덕성이 향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자녀에게 “효도하라”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실제로 효도하지는 않는다. 이런 연유에서 “도덕교육” 혹은 요즘 흔히 말하는 “인성교육” 등의 실효성은 별로 없다.
유교(儒敎)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인 충(忠)이 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등 우리 민족은 대대로 충(忠)에 대한 숱한 교훈과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조선 시대 수많은 시문학의 주제가 또한 충(忠)이었다. 심지어는 미술에서도 윤리 개념이 중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한갓 풀이나 나무라도 그것이 가지는 인간학적- 정신적인 속성 - 가령 “역경을 이겨낸다” 혹은 “절개가 있다“ 때문에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충성을 많이 강조한 나라이지만 실제로 충성스런 신하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역적과 반역으로 고려를 멸망시켰다. 이렇게 시조부터 불출성과 배신으로 시작한 나라에서 아무리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의 사대부들이 윤리와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노력해봐야 이는 깨진 독이 물붓기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어떤 윤리적 개념들, 가령 충성(忠誠)이나 절개(節槪) 혹은 의로움(righteousness), 청렴과 고결함(integrity)등, 은 많이 가르치고 칭송한다고 그런 덕성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게 도덕 교육의 큰 맹점(盲點)이다. 이런 고귀한 덕목이 학교나 집에서 말로 배워서 익혀지는 것이라면 인류는 벌써 천사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전혀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실제 상황 속에서 같이 행동하고 본을 보여줌으로써 겨우 전달되는 것이다. 즉 실천 적인 환경에서 실습을 통해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영어나 수학처럼 혹은 다른 이론적 지식들처럼 책이나 공부를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지식을 흔히 실천지(實踐知), (phronesis) 혹은 지혜라고 한다. 이처럼 실천지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배워지기 때문에 이것의 학습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가르치는 자가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때로 거의 전달이 불가능하다. 가령 어른들 모두가 교통신호를 안 지키면서 아이들보고 교통신호 지키라고 한들 소용이 없다. 실천지(實踐知)는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부모나 교사들로부터 배운다. 그렇기에 이순신 장군을 예로 들며 “너희도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라고 해봐야 별로 효과가 없다. 근본적으로 가까운 사람 혹은 인격체의 흉내를 통해서 길러진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실천지의 이러한 특성을 감안하면 인격적인 신(神)의 존립이 요청된다. 이를 독일의 대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는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e der praktischen Vernunft)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도덕적인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의 대철학자. 그는 인간의 도덕적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e der praktischen Vernunft)"을 주장하였다. #
위에서 인용한 조선 시대 후기의 공직자와 어떤 왕의 불법과 탐욕을 보면 조선은 극도로 헤겔이 말한 인륜성(Sittlichkeit)이 무너진 국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란 자체 내로 복귀해 있는 현실의 정신이며 인륜적 실체를 전폭적으로 드러내주는 단일한 주체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31쪽>
이 말은 정부와 인격이 서로 지지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런 개인과 공동체의 통합을 헤겔은 인륜성(Sittlichkeit)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군자는 의(義)를 추구하고 소인은 이(利)를 추구한다는 유학적인 이념이 선비들의 정신을 사로 잡았다. 공과 사는 의(義)와 이(利)의 대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의(義)와 이(利)의 대립은 유가(儒家)의 철학 다시 말해 공자의 <논어(論語)>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논어(論語)>에서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다. 공자는 “군자는 의를 밝히고 소인은 이를 밝힌다”(논어 이인(里仁)편 16장)라고 설파한다. 여기서 의(義)를 밝힌다는 것은 대의명분을 밝힌다는 것이며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즉 공동선(共同善)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비해 소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한다는 것이다. (안재오 <삼위일체 논술> 24쪽)
유가(儒家)의 군자와 소인의 분류에 대해서는 조기빈이란 중국 학자가 이를 유물론적으로, 계급적으로 해석을 하여 그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구분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윤리적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의문은 이와 다르다: 즉 그렇게 군자의 덕을 사랑하고 의(義)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강조한 조선이 왜 결국은 그렇게 탐관오리와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를 배출하고 급기야 나라까지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런 것일까? 그들은 모두 공부할 때에는 의를 추구하라 라고 배웠을 것인데 사회에 나가서는 모두 흡혈귀들이 된 것일까? 물론 이유는 있다. 매관매직의 관행, 습관 때문에 그렇다. 이런 면에서 개인적 유교도덕의 강화나 교육 등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 다른 유교 도덕의 핵심적인 가치의 하나인 효(孝) 개념을 보자. 조선 시대 내내 모든 경전과 국가 제도를 통해서 효(孝)를 강조하고 부모의 사랑과 자애(慈愛)를 칭송했다. 그런데 조선의 뒤를 이어받는 한국 사회에 한 때 고아 수출이 세계 1위를 한 것은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것이 2~3위는 한다고 한다. 그리고 효도하는 자식도 많지 않다. 서양에 살아보면 그들에게 효(孝) 개념은 유교문화권에서처럼 그렇게 많이 강조되지 않지만 실제로 자기 부모를 희생적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는 급격한 사회 구조변화와 함께 전통적인 효도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요즘은 효도하는 사람은 거의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이다. 정말 우리 나라만큼 부모의 자녀에 대한 부양이 긴데 비해 자녀의 반대급부가 적은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자녀 교육에 관한 사회의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 예를 들어 “기러기 아빠” - 보면 한국에서 효도의 말도 못 꺼낼 정도이다.
#헤겔 ;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이런 유교적인 도덕성의 약점을 기독교는 극복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절대자(das Absolute)와 인간의 관계를 죄와 용서로 설정하기 때문에 그 안에 의(義)와 사랑. 자비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 사례를 독일을 포함한 북구 개신교 국가들의 공직자 윤리와 청렴성 등에서 바로 파악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청렴하다. 남의 돈을 뺏아먹는 한국의 지도자들과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윤리적 교육의 근본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비윤리적인가를 알 때 - 죄악(罪惡)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단 하나의 문제는 이 경우 종교 혹은 신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보편적인 윤리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삶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윤리 체계이다.
그러나 한국의 관리들의 - 물론 고급관리와 정치인들 - 윤리성이 하도 저급하고 부패가 심하여 - 오늘이(2017.3.10.) 박근혜 탄핵심판 받는 날이다 - 나라를 청렴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도 북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칸트의 “실천이성의 요청”은 현재 한국에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사람들은 칸트의 실천이성의 요청 같은 개념을 쉽게 무시하거나 깔본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에서 이는 극히 소중한 이론이다. 왜냐하면 한국처럼 아니 조선처럼 지도층이 타락한 역사를 가진 민족은 이를 갱신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동력이 필요한데 크리스트 종교만큼 확실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도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의 관리나 지도층의 도덕성이 현저히 높고 국민들은 그만큼 잘 살고 있다. 칸트의 실천이성의 요청이 한낱 책상물림하는 철학자의 공리 공론이 아니라 실체적인 진리임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최순실, 박근혜, 이재용 등의 범죄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민족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