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 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 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이라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 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 (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 결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양재역벽서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 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 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 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 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 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 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 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가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 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악화되었다. 조 선과의 무역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 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 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 왜란이었다. 이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