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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해석학 (時空解釋學, Space-Time Talk) (24)
공간 시간의 말 (Space-Time Talk)
張貞文 博士 著, 姜德昌 博士 譯
차 례
제 1 부 비판적 맥락
제 1 장 서론 : 문제와 방법
제 2 장 실존론적 해석과 공간 시간 언어
제 3 장 상징적 해석과 공간 시간 언어
제 4 장 언어적 상징론과 공간 시간 언어
제 2 부 분석적 해설
제 5 장 신약성서 신화 안에 있는 공간 시간 언어의 위치와 그 상징적 특징들
제 6 장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 시간 언어 그 상징적 의미
제 7 장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시간 언어
제 3 부 통합적 결론
제 8 장 하느님 언어와 그 해석학적 적용
제 3 부 통합적 결론
제 8 장 하느님 언어와 그 해석학적 적용
ㄱ. 신학과 민중의 살아있는 언어
ㄴ. 예전적 공간-시간 언어와 설교자의 해석학적 과제
제 3부 統合的 結論
本書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본 해석학연구의 主題를 평가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앞의 두 部들에서 비판적으로 提示하고 解釋한 主題내용을 이 3部에서는 필자가 그리스도敎 說敎者와 敎師로서의 경험적 입장에서 論하여 매듭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공간과 시간언어라는 이 연구는 現代哲學과 神學 學界의 動向과 함께 著者의 개인적 및 전문적 實際性을 포함한 증언으로서 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제 8장 하느님-언어(God-Language)와 그 解釋學的 適用
1) 神學과 사람들의 살아있는 언어
神學自體는 信仰의 知的明瞭化이고 解釋으로서 교회의 전체적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교회의 삶이란 공동체적 신앙과 예배와 행위이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신앙은 믿음 혹은 知的同意이고 교회의 敎義的 神學은 흔히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추구되는 知的게임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全體性에 속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삶과 행위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런 관련에서 ‘神學 theology’이라는 단어의 力動的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흥미 있고 중요하다. 영어단어 ‘theology’는 하느님-말 God-word 혹은 하느님-언어 God-language(희랍어 theos-logos)이며 이 특수연구는 과학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동적 의미도 포함한다.
언어철학자 Ludwig Wittgenstein에 의하면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위 혹은 하나의 삶의 형식에 속한다.주1) 이 사실은 특히 神學的言語에 있어서 확실하다. 신학적 언어는 하느님의 啓示行爲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적 반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이 역동적 측면은 패리쉬나 지역교회 설교자들이 더 의미 있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현직 설교자들은 신자들 가운데 살면서 이들의 살아있는 언어를 함께 나누고 전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아있는 언어란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슬픔, 기쁨, 희망과 모든 생활경험들을 포함하는 전체적 삶의 표현들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설교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요소인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함께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神學은 하나의 解釋學的 작업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해석학적 작업을 통하여 聖書와 神學의 言語가 신자들의 살아있는 신앙과 언어의 맥락에서 의미 있고 힘 있게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傳統的神學의 가르침들과 신자들의 살아있는 언어 사이에 큰 장벽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설교자들이 神學的 解釋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많은 경우, 설교자가 그의 해석학적 사명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게을리 할 때 그 설교자는 단순히 교회회중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교회행정이나 信者尋訪이나 기타의 교회프로그램 활동들로 바쁠 수 있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목회를 위해 많이 활동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목회자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강단의 설교자가 해야 할 첫째 되는 使命과 課題는 교회회중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옳고 힘 있게 설교하고 선포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과제는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 두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느님의 메시지가 무엇이냐? 우리는 어떻게 그 메시지를 의미 있고 힘 있게 설교할 수 있느냐?
첫 질문은 케리그마를 糾明하는 일이고 두 번째 질문은 케리그마적 언어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방법론적인 것이다. 케리그마적 메시지 즉 교회의 구원선포는 C.H. Dodd의 저서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과 기타의 관계학문저서들이 나온 후로 잘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케리그마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아직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해석학적 문제에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언어와 교회설교자의 해석학적 과제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설교자나 목회자는 해석학적 문제와 과제를 意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그의 기능이 적절히 실현될 수 없다. 설교자의 이 해석학적 기능과 과제가 실현되지 않거나 왜곡될 때 그의 교회는 하나의 기구적 기관에 불과하여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전통적 교리와 예식이나 반복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교회 전반적으로 확대 되고 심해질 때 그 종교와 사회는 타락하고 왜곡되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의 대표적 실례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의 종교에서 볼 수 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그들의 성서 즉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방법은 逐字的이고 律法的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은 外飾的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이런 가르침과 삶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의 새로운 가르침과 삶을 소개했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말한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막 1:22)
예를 들면 이혼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는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들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5-9)
예수의 성서해석방법, 즉 그의 해석학적 원리는 인간의 전체적 존재(全人的)의 깊은 內面을 보는 그의 예리한 통찰과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는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해석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와 관련하여 나는 루돌프 불트만의 공헌을 말할 수 있다.
불트만은 성서의 언어를 逐字的으로, 神話的으로 이해하는데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의 實存論的, 人間論的 해석을 한다. 이 문제에 관한限 불트만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성서의 신화적 언어를 실존론적, 인간론적 해석 一邊倒로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의 해석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불트만의 해석학적 공헌은 그가 현대교회의 문제를 옳게 발견했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 여러 世紀동안, 아니 오늘날에도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 경험들을 통해 이 사실을 증거 할 수 있다. 내가 이십대 초반에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을 때이다. 내가 사는 지역의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설교자와 신자들의 언어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나의 첫 느낌은 그들의 말이 아주 古風스럽다는 점이다. 후에 내가 교회경험을 더 하게 되면서 깨달았는데 그들의 언어가 일반사회인들의 언어와 다르며 그래서 傳達이 약하다는 점이다. 내 생각이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하나는 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오래된 한국어 번역의 성서를 읽으며 또 강단의 설교도 그런 옛 언어를 사용하는 신앙공동체에서 종교적 경험들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선교나 교육의 전달기술이 서툴고 또 그들의 신앙이 근본주의적기 때문이다.
前者는 특수한 성격의 종교적 언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後者의 경우이다. 그 신자들이나 성직자는 낡은 語法에 습관 들어있다. 그들은 언어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아도 고치기를 願치 않는다. 이런 性向의 교회설교자와 신자들의 성서지식은 逐字的이다. 내 생각에 이같이 성서를 글자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종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다행히 건전한 신학기관에서 神學을 공부하게 되어 종교적 신앙과 疏通, 傳達의 문제를 깨달았고 이 전달의 문제를 더 明示的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발전으로 내가 루돌프 불트만의 해석학을 배워 그 長短點을 알게 된 것이다.
우선 나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구원메시지 전달문제라는 불트만의 새로운 意識과 공헌을 인정한다. 이 현대적 전달을 위한 불트만의 解釋學的 연구는 實存論的이고 人間論的이다. 그의 이 실존론적 및 인간론적 해석은 예수가 성서해석에서 보여준 해석학적 측면의 하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언급한대로 예수는 인간의 마음과 삶의 깊은 내면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따라서 그의 성서해석방법은 人間論的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또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 즉 그의 해석학적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가 사용한 어휘들과 어구들은 일상적이며 살아있는 언어이다. 떡, 물, 친구, 새, 양과 염소, 포도원의 농부들, 땅과 씨뿌리는 자,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는 일반 평민들이 흔히 말하는 어휘들을 사용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가 쓰는 일반적인 어휘들은 특수한 배경과 맥락에서 온 표현으로서 그 의미는 특수하다.
예를 들면 예수는 자신을 빛이라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그는 또 자신을 떡이라고 말하지만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하늘나라, 人子의 오심, 蕩子와 그 아버지의 사랑 등, 이 모두가 그의 해석학적 언어이다. 사람들은 우선 예수의 이 언어표현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깊고 특수한 의미를 알려주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표현들을 이미지나 상징적 언어라고 부른다. 예수의 상징적 언어는 知的認識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와 해석학적 언어는 어떠한가? 오늘날 교회의 많은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이 언어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의식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특별히 그들이 학문적 개념이나 知性的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설교는 추상적 혹은 관념적 언어가 된다. 그래서 감각적이고 그림 같은, 구체적인 표현들이 아니다. 知性的으로 훈련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감각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보다도 철학적 혹은 개념적인 설교가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감각의 언어를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트만의 과오를 지적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상징적 언어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反象徵主義 입장은 改新敎의 主觀主義的 性向에서 온다. 이 주관주의에서는 하느님의 臨在와 인간에의 접근이 거의 설교의 말씀으로 강조된다. 프로테스탄트 즉 改新敎 사상은 설교와 교육, 들음과 이해,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진행되는 內的側面에 힘을 더한다. 존 매쿠어리 교수는 이런 타잎의 思考를 主知主義 혹은 槪念主義라고 말하며 여기에 假現說(docetism)이 포함된다고 한다.주2)
2) 禮典的 空間-時間言語와 설교자의 解釋學的 課題
이런 관련에서 나는 나 자신이 執禮者로 참여하는 그리스도교의 禮典 혹은 禮拜의 意味를 강조하고 싶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하느님의 啓示行爲와 구원의 은혜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동적이며 신앙적인 反應이다. 이 신앙-삶의 반응은 우리의 禮典的(예배적)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고백과 찬양과 예배의 언어로 반응하는데 이 언어는 우리의 삶에 대한 가치와 性質로 구성되는 표현들이다. 우리의 하느님 지식과 그 신학적 언어는 하느님의 眞理에 대한 純粹知的 혹은 槪念的 同意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과 통합을 이루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血肉을 가진 구체적 피조물이고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인카네이숀(成肉)의 종교이다. 이 말은 우리의 참된 하느님 지식이 우리의 내적 마음이나 知性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感覺機能을 통해서도 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예배의 목적, 특별히 聖餐禮式의 목적은 교훈이라기보다도 하나가 되는 통합이다. 이는 곧 개인주의적 主觀主義나 抽象的 假現說에 대한 반대투쟁이고 또한 存在論的 하느님의 實在를 享受하며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우리는 믿는다. 즉 신앙-삶의 能動的 反應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예배의 의미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신앙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구원메시지는 단순한 말의 표현이 아니다. 그의 생각과 판단, 행위와 삶 역시 그 구원메시지의 해석학적 언어이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하느님의 나라를 그의 행동, 사랑, 자기희생적 행동으로도 보여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심은 그의 해석학적 결단이고 행동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예수의 그 행동적 언어와 분리될 수 없다. 예배나 예전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고 이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참된 하느님 지식은 오직 우리가 이 사랑행위들에 참여하고 경험할 때만 가능하다. 이 말은 또한 우리의 참된 신학적 지식이 우리의 실천적 사랑의 행위와 경험에서 나와야한다는 뜻이다.
요한 1서 저자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느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7-8)
우리의 그리스도교 예배 특히 聖餐을 포함하는 우리의 聖事的 예배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듣고 봄으로써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방법이다. 예배는 또한 우리의 예전적 언어와 표현을 통해 그 구원행위에 응답하는 방법이다. 禮典言語는 예배 혹은 신앙고백의 언어이며 여기에는 언어적 행위가 포함된다.
우리가 別世者를 위한 弔文, “우리는 우리의 형제.. 을”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 별세자를 향해 위로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정으로 슬퍼하며 죄를 회개합니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행위이다. 이 말이 그 참석자들에게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배 혹은 예전의 언어는 예배자로 하여금 행위에 참여토록 지시한다. 다시 말하면 맹세하고 용서하며 약속과 보증을, 받아드리고 회개와 예배행위를 하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위의 진술들에서 우리는 예배와 예전적 언어의 능동적 성격을 논했다. 이는 우리의 참된 하느님 지식과 신학적 언어가 예전적 맥락에서 완성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초대교회의 중심적 메시지인 신약성서 케리그마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도 나타난다.
초대교회에서의 예배배경을 모르고는 케리그마의 의미를 옳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예배적 언어와 맥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洗禮와 祭祀 등의 예전적 언어가 풍부하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승천이야기도 역시 예전적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교회의 司祭나 牧師는 執禮者와 解釋者로서 그 예배행위와 예배언어를 통해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참여해야 한다. 그의 설교와 儀式과 삶은 모두 해석학적 실천이고 노력으로서 신학적 언어와 함께 교회의 실제적 삶에 더 많은 공헌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본 논문의 특수 주제인 공간과 시간언어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이 공간과 시간언어
의 의미를 筆者인 나의 체험적 맥락에서 개인적 및 공동체적 신앙과 언어로 해석해 볼 것이다. 이 논점을 음미하기 전에 나 개인의 경험을 말하고 싶다.
나는 십대 초반 소년시절에 공간과 시간이 무엇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며 궁금해 했다. 학교공부를 통해서 과학적 지식이 더해지면서 宇宙의 공간과 시간적이 無限하다는 것을 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無限宇宙에 대한 나의 神秘感과 깊은 질문에 해답이 되지 못했다. 내가 이십대 초반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神學을 공부하게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 가졌던 그 暗黙的 불확실한 질문이 이제는 하나의 實存論的 질문으로, 다시 말하면 과학이나 객관적 지식으로 답할 수 없는 超越에 대한 明示的 질문이 되었다는 말이다.
나의 이 확실한 명시적 질문, 즉 나의 개인적이고 실존론적인 지식에 대한 自覺은 불트만의 神學, 특히 그의 神學的 解釋學을 연구하는데서 왔다. 불트만이 나에게 준 도움은 신약성서 신화의 인간론적 및 실존론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다. 이 통찰에는 공간 시간언어의 문제가 연루된다.
그런데 불트만은 공간, 시간의 표현들에 대한 객관화된 의미를 배척한다.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같은 공간 시간적 언어를 글자그대로 믿는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은 자유주의적 신앙인들인데 이들은 그 어떤 신화적 혹은 상징적 표현들도 무의미한 환상이라고 배척한다.
불트만의 비판적 입장이 위에서 지적한 두 상반된 신앙들, 즉 근본주의적 신앙과 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한 비판이라면 불트만의 해석은 옳고 의미가 있다. 이들 相反된 두 극단의 신앙들과 그들의 신학적 주장들은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에 대하여 많은 문제들을 惹起하며 否定的 영향을 끼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대화를 할 때마다 내가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화해석을 알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한다.
하지만 시계추는 반대쪽으로 흔들려갔다. 우리가 前章들에서 이미 論한대로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언어에 대하여 인간론적 및 실존론적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특히 공간과 시간언어에 대하여 더 비판적이다. 그 결과는 그 神話的 언어를 非神話化했을 뿐만 아니라 非象徵化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에 또 하나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어적이건 비언어적이건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을 지켜왔다. 人類史上 상징적 표현들이 많이 남용되고 미신적으로도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런 과오들과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종교적 언어의 상징적 기능과 그 의미를 필요로 한다. 이 주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교회들 안에서 일어난 경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개신교회들 안에서 禮典的 禮拜와 상징적 표현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아왔다. 전보다 더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예전적 달력과 예전적 설교, 聖餐式(聖體聖事), 祭壇, 촛불, 심지어 목의 흰 컬라까지 부착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이 모든 현상이 종교적 및 신앙적 實在에 대한 象徵的 표현형식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교회지도자들은 그 표현들에 대한 상징적 기능과 의미는 모르는 것 같다. 그 상징적 형식과 의미들을 의미 있게 사용하려면 그 참여자들에게 그 상징과 표현들을 지성적으로 해석해 주고 그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연구 주제인 공간과 시간의 상징적 언어로 돌아온다. 종교적 언어의 가장 의미 있고 힘 있는 상징은 공간과 시간언어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성서와 교회에는 공간 시간적 표현들이 풍부하다. 성서 안에 공간 시간의 언어가 많이 들어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에 여기서는 주로 교회 안의 그 예전적 표현들과 그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예배 안에 있는 공간과 시간적 표현들은 高度의 상징화된 예전언어로서 靈性의 높이와 깊이를, 그리고 그 영속적 성질을 의미한다. 이 공간과 시간의 靈性的 언어는 예배순서 안에 있는 信仰告白으로, 詩篇이나 찬송가 혹은 榮光頌과 主님의 기도, 신자들의 대표기도, 奉獻, 성찬식 언어와 기타의 예전적 표현들로 나타난다. 이 예전적 공간 시간의 언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심히 無價値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가치를, 그 ‘높으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며 예배드린다. 이것이 영어로 worth-ship(가치-있음) 예배의 의미이다.
히브리인의 예배를 말하는 시편저자는 기도한다:
-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 ... ...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느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 .....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시편 115)
‘은혜로운 빛’이라는 어휘들(Phos Hilaron), 이 단어들이 聖公會의 晩禱에 들어있는데 이 말들이 情緖的이고 價値的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공간-시간적 맥락에서 역시 의미가 깊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은혜로우신 빛이여,
영생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순수 빛나심
오,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시고 복 받으신...
... ....
당신은 언제나 행복한 음성으로 찬양 받으십니다.
오, 하느님의 아들, 생명을 주시는 분, 그리고
온 세상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캐나다 성공회 B.A.S. 66-67쪽)
주님의 인카네이숀을 믿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신앙은 하느님의 超越, 그 他者性이라는 히브리적 前提에서만 의미가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을 驚歎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 위로 무한히 높이 계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할 합당한 태도를 의미하는데 욥의 경우처럼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를 고백하며 하느님을 우러러 숭배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인간이나 자연 안에서 어떤 極致의 美를 계시적으로 받았을 때 이에 대한 반응은 그 아름다움 앞에 엎드려 절하고 싶은 느낌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신비로운 神的對象에 대한 敬畏心이나 靈的體驗을 하게 될 때 더 그런 충격을 받는다. 이런 마음이나 태도가 무가치한 자신의 굴복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完全價値에 대한 옳은 깨달음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예배의 표현 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 (계 4:11)
聖體聖事 예배에 있어서, 序文經(Preface)에 따르는 예배찬송인 三聖經(the Sanctus)에는 質과 價値라는 맥락에서의 공간-시간의 단어들이 들어있으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초월과 그의 오심이 찬양과 예배를 받는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상주 하느님이여, 주의 영광은 천지에 가득하도소이다.
지존하신 상주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할지어다. 지극히 높은 데에 호산나로다.
예전적 공간-시간언어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질적 상징주의 표현은 榮光頌(doxology)과 주의 기도문에서도 발견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평화함이요... ”(聖公會 공도문, 榮光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주의 기도문)
위의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예전적 예배에는 성질적 가치어휘들과 함께 공간과 시간의 언어가 많이 들어있다. 성질적 가치어휘들이란 ‘영광’, ‘능력’, ‘거룩함’, ‘사랑’, ‘축복 받은’, ‘가치 있는’, ‘찬송 받는’ 등의 어휘 어구들이다. 이와 같이 禮典的 맥락에서 성질적 단어들과 함께 공간과 시간의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을 때 그 단어들의 상징적 의미는 靈性的으로 최고점에 이른다. 어느 누구도 이 공간 시간적 언어를 읽거나 노래하는 예배자가 그 공간 시간적 표현들을 글자그대로의 사실로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 ‘높은’ ‘영원 영원토록..’ 이런 어구들은 우리의 육체적 체험에서 시작하여 상징적 표현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상징적 어휘들은 예전적이고 성질적 맥락에서 더욱 靈性的으로 의미가 깊어진다. 우리의 靈性이 갖는 높이와 넓이는 기쁨, 행복감으로, 그리고 찬양과 예배를 받게 되며 소리높이 외치거나 聖스러움 혹은 보람의 감정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예전적 혹은 예배적 공간-시간언어는 찬양과 영광의 감정적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聖體聖事(聖餐式)의 상징과 의미를 살펴야 한다. 이 성찬식에는 祭儀와 臨在의 의미가 포함된다. 존 매쿠어리 교수가 옳게 지적한 바와 같이 성체성사 (혹은 성찬식)는 그 자체 안에 그리스도인의 禮拜와 經驗과 神學이 놀라울 만큼 풍부한 의미로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삶이라는 모든 중요한 주제내용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성찬식에서 말씀과 聖事(sacrament)가 연결된다. 이 聖餐은 靈과 感覺的體驗에 호소한다. 성찬은 예수의 갈보리 산상 십자가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臨在를 종합한다. 또한 創造論 救援論 成育論, 敎會論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주3) 하지만 성찬의 제사와 임재의 더 중요한 의미는 그 공간-시간적 관계에서 발견된다.
聖體聖事(聖餐式)의 祭禮를 알아보자. 이 제례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즉 그의 자기희생적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聖餐祭禮는 유대의 성전제사와는 달리 救贖의 새로운 의미가 있다. 이 새로운 救贖의 의미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선포되고 제시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고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 희생,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늘의 聖殿에 들어가신 것은 모두 하느님의 救贖的, 救援的 행위이다. 성찬제례의 의미를 이렇게 행위맥락으로 해석할 때 여기에 공간언어가 관련된다.
하지만 여기서 공간언어란 우리가 行爲言語라고 말한 力動的이고 質的인 언어형식을 의미한다. 공간언어는 靜的意味인 한 場所, 地點, 정류소 혹은 어떤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언어는 靜的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이보다도 역동적 형식으로 변형되거나 발전하여 더 의미 있고 힘이 생기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온다’, ‘간다’, ‘방문한다’, ‘떠난다’, ‘도착한다’, ‘들어간다’, 혹은 ‘날아간다’ 등의 動詞들은 ‘나무’, ‘산’, ‘고양이’, ‘5리 10里’, ‘땅’이나 ‘별들’ 같은 일반적 名辭들보다도 더 實存論的이고 力動的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靜的이 아니다. 우리 인간존재들은 항상 운동과 어떤 일을 행하며 활동한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에는 그 지배적 요소로서 동사들이 많고 강하며 이 동사들은 그 맥락에 따라 그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거나 內實化한다. 이런 의미에서 움직이고 實行하며 활동한다는 의미의 모든 동사들은 또 다른 수준의 空間的 언어이다.
우리가 이런 행동적 언어를 종교적 언어, 특히 이 언어를 그리스도교의 聖餐예배에 적용할 때 高度의 象徵的意味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성서의 말씀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공간적 행위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론적 예배와 희생적 제사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그리스도 사건의 희생적 혹은 속죄의 구원론을 취급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天國으로 가는 길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천국에서 내려오셔서 땅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렸으며 천국으로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이 천국이미지는 그 천국 길을 개척하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天國本鄕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 묘사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히 10:19 이하)
위에 인용한 말씀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事件의 구원적 혹은 속죄적 희생이 공간적 언어를 요구한다는 것이고 이 공간적 언어는 靈的의미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의 공간적 실존의 상황을 체험하시고 그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오게 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천국으로 올라가셨다는 뜻이다. 이 공간적 象徵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그의 자기희생적 구원행위를 함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空間的 實存의 有限한 운명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간적 실존의 특성은 罪意識, 不安, 孤獨, 疏外, 그리고 眞理와 永遠을 갈망하는데 있다. 천국으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내시고 천국으로 승천하셨다. 여기에서 공간언어, “그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언어는 시편 110편 1절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의 임금님 되심을 강조하는 예배언어이다.
이 예전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主權을 뜻하는 위로(上向)라는 공간언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느님, 즉 超空間的 높이(高)와 힘을 가지진 하느님이심을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그리스를 따라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초공간적 높이와 힘의 차원을 믿고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는 이 초공간적 차원을 ‘하늘’ 혹은 ‘하늘의 영광’이라는 말로 상징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의 天上 영원한 보좌는 그의 십자가에서 絶頂이 된 공간 시간에서의 역사적 희생 혹은 속죄의 죽음에서 왔다고 했다.
위에서 論한 聖體聖事(聖餐)의 祭禮에 대한 공간언어와 의미는 이제 聖餐의 現在的 臨在라는 관련된 문제로 오게 한다. 과거 수십 년 동안 聖餐에서의 임재를 공간적, 시간적 혹은 인격적 차원의 말로 어느 정도 이해했다.주4) 여기서 나는 문제를 시간적 맥락과 의미에서 논할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공간언어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의 성찬식에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시간언어가 포함된다. 예전적 공간언어가 超空間的 ‘하늘’이나 ‘지극히 높은 聖所’라는 말로 靈性化 되는 것처럼 예전적 맥락의 시간언어도 超時間的 ‘永遠’이나 ‘永遠無窮’이라는 말로 靈性化 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말한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이 超空間的 언어에 超時間的 언어가 따른다.
계시록 저자는 계속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6) 이 공간적 언어와 시간적 언어의 진술들이 현재적 삶에서 眞摯한 결단과 책임이 있기를 촉구하는 예전적 용어들과 연결된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는 말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 그 두리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 9, 12-14)
우리 그리스도인의 예배 특히 聖體聖事(聖餐式)은 그리스도 사건의 倫理的 명령들과 함께 공간적, 초공간적 意味는 물론이고 시간적, 초시간적 의미에도 참여하고 체험하는데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하나의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唯一回的인 終末論的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거의 사건은 몸과 피를 드려 贖罪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기억할 때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에 현재적 구원의 의미와 효력을 주신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祝聖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그 의미를 상징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이는 또한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는 의미이기고 하다. 그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미래적 完成을 예상한다는 이 두 의미들을 우리가 현재의 시간에 靈的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 聖餐의 시간언어에 대한 神學的 근거는 신약성서, 특히 히브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서신 안에 그리스도 사건의 禮典언어가 終末論的 맥락에서 해석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따라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 하느님의 선함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 6: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靈的 눈은 우리의 목표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 未來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체험했다. 하지만 그 최종적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혹은 두 時間的 副詞들 즉 '이미 already'와 '아직 아니다 not yet'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시간경험은 이 두 시간양상에서 일어나며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終末論的 緊張 가운데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결정적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일어났다. 하지만 그 최종적 완성과 불변의 행복은 아직도 미래차원에 있다.
고대의 히브리인 선조들은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출애급사건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 이미 하느님의 큰 구원의 손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을 보려고 희망하며 계속 황야에서 방황을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실존론적 그리고 종말론적 긴장의 광야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실존론적 공간 시간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공간적-시간적 상황은 변화되어 초공간적, 초시간적 차원으로 聖化될 수 있다.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출애급 히브리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언약의 땅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 이 地上의 공간 시간적 상황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위의 고찰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구가 그리스도인의 예전적 예배, 특히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서 핵심인 聖體聖事(聖餐)와의 연결을 통해 얼마나 중요하고 意味深長한가를 보여주는데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의미는 교회의 神學과 경험과의 결합으로도 나타난다.
禮典的 空間-時間의 언어를 알고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解釋學的 작업에 활력소적 중요성과 효능을 준다. 교회의 敎師나 설교자가 그러한 해석학적 지식과 의미를 적절히 알게 될 때 그의 신앙과 활동은 더 의미 있게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끝
첫댓글 공간 시간의 말(時空解釋學, Space-Time Talk) 요약본에 이어 완역본 24회분을 5개월여에 걸쳐 게재토록 허락하여 주신, 譯者 강덕창 신부님과 著者이며 감수에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신 장정문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학문저서 Space-Time Talk가 공간시간의 말이라는 한국어 역본으로 나오게 된 것을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저서를 번역해주신 강덕찬 신부님, 카페로 전달해주신 무문님, 그리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재정이 허락되어 책으로 출판했으면... 바라면서 위해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4월 10일 북미주 여행을 떠납니다. 부디 강건 다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