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셀로나에 있는 클라리스 호텔의 전경.
‘좋은 여행’,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
여행은 집을 떠나 다른 집에 머물게 되는 일이다. 다른 도시나 마을로 여행을 할 때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는 비행기나 기차, 배보다 항상 다르게 마련인 그 나라와 도시와 호텔이다. 먼 여행길에 집을 잊게 하고 여행을 참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다른 세상의 집, 호텔 기행.
▲ 뉴질랜드 우르빌 호텔의 침실.(왼쪽 위) 오스트리아에 있는 블루마우 온천호텔(왼쪽 아래) 더블린의 클라렌스 호텔.(오른쪽)
‘Bon voyage avec I’ amour’ ‘좋은 여행 그리고 사랑’
프랑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좋은 여행과 아름다운 사랑을 최고의 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일상 속에도 무한한 삶의 다양함이 있고 아무것 하지 않는 명상속에 삼라만상의 신비가 있을 수 있으나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행과 사랑으로 삶이 풍요롭고 보람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나 여행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라도 가능한 일이다. ‘집을 나서니 문득 나그네’이기도 하나 바쇼 같은 시인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적어도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게 되어야 여행인 것이고, 그것도 먼 나라일수록 이 세상에 살면서 저 세상에 머물게 되는 제대로 된 여행이 되는 것이다.
◀ 전형적인 도시 호텔인 런던의 헐킨 호텔 내부.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여행에서는 세 가지를 경험하게 된다. 우선 무엇을 타고 어디로 간다는 것이다. 장거리 열차, 여객선 혹은 비행기를 타고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는 것이다. 여행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살던 나의 세상에서 남의 세상에 가게 되는 것이다.
자연으로의 여행도 있으나 여행은 대부분 다른 도시로의 여행이다. 다른 도시, 다른 마을에 머물게 되면 당연히 다른 마을, 다른 도시의 집인 호텔에 묵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기차나 비행기나 배 그리고 다른 도시와 마을 그리고 그곳의 집인 여관과 호텔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여행을 만끽하게 하는 곳이 바로 호텔이다.
▶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티라에 있는 보라보라의 모투 호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다녔어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는 기차, 비행기, 배보다 항상 다르게 마련인 그 나라와 그 도시와 거기서 머물게 되는 호텔이다.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아직 파리, 런던, 뉴욕에서의 추억은 리츠호텔, 인 언더파크, 더 타워에 더 많이 남아 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던 25년 전 얼결에 밴돔 광장의 리츠호텔에 묵었다. 공항 호텔 안내소의 여자가 하도 불어로 떠들어대는 통에 가장 위에 있는 리츠호텔을 손으로 가리키다 얼결에 세계 최고의 호텔에 묵게 된 것이다.
호텔에 도착한 순간 엄청나게 비싼 집인 걸 알았으나 이미 사흘을 예약한 후라 ‘값을 묻지 않고 세계 최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호텔’에 묵게 된 것이다.
호텔 로비에 걸린 르노와르의 그림뿐만이 아니라 핑크색의 침실과 천 개가 딸린 침대, 둘씩 있는 변기와 비데, 서로 다른 12장의 타올, 방만한 드레싱 룸, 메뉴에 값이 없는 식당, 모두 기죽이는 것들이다.
▶ 아델피아 호텔.
파리의 ‘리츠’, 런던의 ‘인 언더파크’, 뉴욕의 ‘더 타워’
런던의 인 언더파크는 예술의 전당 국제 현상에 당선된 후 경쟁 건축가였던 바비칸센터의 설계자인 CPB팀에 호텔을 구해 달라 해서 가게 되었다.
앞에 여관이라는 뜻인 INN이 있어 역시 건축가들은 싸고 좋은 곳을 알고 소개해 주나 싶었다. 교토에서 일본 전통 여관에 묵어본 기억이 겹쳐 기대하고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이곳도 리츠호텔 못지않은 최고급 호텔인 것을 알았다.
▲ 베네치아에 있는 다니엘리 호텔의 열쇠들.
▶ 다니엘리 호텔의 스위트룸.(위) 산토리이 마을 전경.(아래)
최고급 호텔은 값을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다. 예약한 사람이 값을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여행 경비가 3,000불이었을 때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비에 앉아 있는 귀부인이 눈에 익어 물어보니 앤 공주라 한다. ‘이거 큰일이구나.’ 싶었으나 이미 짐을 풀고 호화 욕실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난 다음이다. 하루만 거기서 묵고 그 다음날부터는 머쓱하지만 체크인 하기 전에 일일이 값을 물었다. 그래도 그 날 밤은 좋았다.
미국 월드컵 때 맨해튼에 갔다가 호텔이 모두 만원이어서 할 수 없이 유일하게 남은 방인 ‘더 타워’의 펜트하우스의 테라스도 어쩔 수 없이 든 호텔이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마침 보름이었다. 이럴 때 호사를 마다 하면 평생 후회가 되지 않겠는가.
◀ 다니엘리 호텔의 테라코다 화사드.
42층 하늘의 테라스에서 룸 서비스를 시켜 뉴욕 스테이크와 샴페인을 가져오게 하여 맨해튼의 보름달과 함께 아직도 기억이 아스라한 맨해튼 상공의 밤을 만끽하였다.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휘황한 초고층 빌딜의 불 켜진 방들을 내려다보는 고공의 파티는 지금도 유혹스럽다.
베네치아에서도 그런 밤이 있었다. 시드니 셀던의 소설에 나오는 키프리아니 호텔도 그런 우연으로 머물러 하룻밤 천불이 넘는 호사를 하게 되었으나 그때는 감격 없이 당했다는 느낌만이었다.
▶ 블루마우 호텔의 야외 온천.(위) 페리 볼라스 하우스.(아래)
산토리니의 ‘보라보라’와 교토의 ‘가수이엔’
그러나 그런 비싼 호텔말고도 얼마든지 오래 기억이 남을 만한 호텔이 세계 도처에 참으로 많다. 게다가 관광지의 호텔은 계절에 따라 값이 1/3까지도 내려가니 다들 몰리는 시간을 피해 다니면 의외의 집, 아름다운 방에 머물 수 있다.
산토리니를 찾아간 때는 한겨울이었다. 봄, 여름, 가을 전세계로부터의 관광객과 크루즈로 붐비는 지중해의 가장 아름다운 섬 티라를 아무도 오지 않는 겨울에 갔다. 아테네에서 티라와 이아 마을이 있는 산토리니 섬으로 가는 교통편은 하루 한번 뜨는 경비행기뿐이다. 12좌석인데 우리 일행만이다.
플라톤이 말하던 아틀란티스라 추청되는 깎아지른 절벽 위의 산상 도시 티라의 백 개가 넘는 호텔이 다 문을 닫고 우리 같은 불청객을 위한 호텔 하나만 문을 열었다.
◀ 메두사 호텔의 침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어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여는 산토리니를 대표할 만한 제법 훌륭한 호텔이다. 종업원은 서넛밖에 없고 손님은 우리만이다. 그야말로 산토리니가 우리들의 천국이 된 것이다.
사방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의 깊은 산, 산정의 도시에서 바라본 보이지 않는 바다와 하늘의 끝은 얼마나 멀고 깊고 넓었는지. 산토리니가 이 세상 바깥의 도시라면 보라보라는 이 세상 저 깊은 곳의 마을이다. 보라보라의 모투는 ‘세상에!’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곳이다.
우디 앨런의영화 ‘Everybody say I love you’에서 연인들이 말하던 곳이 바로 보라보라이고 보라보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모투인 것이다.
▲ 일본 교토의 다와라야 료캉.
교토에 갔을 때 가득 쓴 원고를 택지에 두고 내린 것이 인연이 되어 미야코 호텔의 지배인을 알게 되었고 그가 서울에 올 때마다 예술의 전당에 간다 하며 반겨 특별히 초대받아 가수이엔에 머물 수 있었다.
지은 지 30년밖에 안 되었으나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일본 전통 건축 형식으로 지은 현대 건축이다. 교토에서 20년 전 머물렀던 료캉과는 격이 다른 일본 문화의 정수를담은 아름다운 집이었다.
▶ 빌라데스데의 수영장.
마치 어느 일본 귀족의 집에 초대된 듯하였다. 기모노 입은 두 여인이 방을 안내하고 차와 침구를 마련한다. 후둑이는 새벽 이슬소리에 잠이 깨었다. 나무 욕조에 깊이 몸을 담그며 참으로 오랜만에 옛 부산 사쿠라 마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였다.
지금도 베네치아에 가면 다니엘리 호텔을 찾는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때는 거기 묵은 적이 있으나 너무 비싸 보통은 머물지 못하지만 매번 들러 옛 팔라초의 거실이 그대로 남은 로비에서 베네치안 스프릿을 한 잔 마신다.
▲ 빌라데스데 호텔.
◀ 라스베가스에 있는 룩소르 호텔 로비.
집을 잊게 하는 다른 세상의 집
여행은 집을 떠나 다른 집에 머물게 되는 일이다. 먼 여행길에 집을 잊게 하는 다른 세상의 집에 머무는 밤을 삶의 빛나는 한때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호텔인 것 같다.
이탈리아풍과 동양풍의 퓨전스타일로 ‘런던이 지루한 사람이라면 인생이 지루한 사람이다.’라는 도시 런던 특유의 격조와 멋을 살린 헐킨호텔은 전형적인 도시 호텔이다. 오스트리아의 블루마우의 그림 같은 환상의 호텔 블루마우 온천호텔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의 아름다운 정경을 알게 하는 들판의 호텔이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걸작 카사바뜨요 길 건에 있는 바르셀로나의 클라리스 호텔 앞에 서면 가장 아름다운 바르셀로나의 거리에 서게 된다. 뉴질랜드 말보로의 우르빌 호텔의 레드룸은 말보로의 청명한 하늘만큼 맑은 방이다.
▶ 싱가포르의 레플스 호텔 내부.
좋은 여행과 아름다운 사랑은 삶의 빛나는 순간들이다. 좋은 여행의 가장 좋은 시간은 호텔에 드러서는 순간의 설레임이다. 좋은 호텔을 고르는 일은 좋은 여행을 보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호텔에서 잠만 자면 제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라스베가스 룩소르에서 자 보지 않으면 라스베가스를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교토에서라면 타와라야에서 자야 교토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훈데르크 바셀 교수가 디자인한 블루마우 온천호텔의 야외 온천에 몸을 담글 때, 싱가포르의 레플즈 호텔 현관에 들어설 때, 먼 나라에 온 사람들도 그들이 그곳의 주인인 것을 느낀다. 호텔을 즐길 수 있어야 여행의 참맛을 알 것이다.
○ 글 / 김석철(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장, 명지대 건축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