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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직지사로 가려면 가야면 삼거리에서 성주와 김천 쪽으로 난 샛길과 산길을 타고 가야 했다. 경봉이 직지사로 가려는 것은 이미 생각해 둔 계획이었다. 제산스님이 해인사 선방에 이어 직지사 천불선원의 조실스님으로 겸하여 추대되었기 때문에 어느 선방으로 간들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이제는 직지사에도 천불선원이 개설되어 안거 때마다 수좌들이 대여섯씩 명 모여들고, 더구나 해인사 선방에서 함께 정진했던 만봉 스님이 그곳 천불선원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만봉은 전국의 선방에서 이름 난 선지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인사와 직지사에서는 따뜻하고 기백이 있는 구참 수좌로 인정받고 있었다.
어느 절 법당 뒷산에 글께나 읽은 유생(孺生)이 주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묘를 쓰자, 만봉이 밤중에 삽을 들고 혼자 올라가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시켜버릴 만큼 용기가 있는 수좌였던 것이다. 당시 주지는 유생에게 말 한 마디 항의도 못하였는데, 만봉이 유생 무리에게 몰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야심한 밤에 감행했던 것이다.
경봉은 만봉을 해인사 선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전생에 큰형님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만봉이 가까운 혈족 같았던 것이다. 만봉 또한 젊은 경봉에게 아우를 대하듯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화두가 잘 들리다가 성성하지 못해 가야산 산중으로 들어가 통곡을 하고 있는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던 만봉이 다가와 위로해준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우는가.”
“분해서 그랍니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석가모니부처님도 5백 생의 정업(淨業)을 닦아 성불했다네.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 일대사를 마칠 날이 오지 않겠는가. 둔하기만 한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만봉은 경봉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자신의 마음을 경봉에게 전해주어 경봉의 분심을 누그러뜨려 주기 위해서 그랬다.
“좌복에 눈물을 쏟아보지 않은 선객은 진정한 선객이 아니라네. 뜨거운 눈물은 업을 씻어준다고 하네. 그러니 실컷 울고 내려가게나.”
만봉은 지게 가지에 매단 점심공양꾸러미를 경봉 앞에 놓고 갔다. 주먹밥 점심 공양을 하고 나서도 더 쏟아낼 눈물이 있다면 더 울고 내려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경봉이 만봉을 좋아한 것은 만봉의 따뜻함 말고도 솔직함 때문이었다.
어느 날, 경봉이 만봉에게 “스님은 깨치셨습니꺼?” 하고 도발적으로 물었을 때 만봉은 경봉을 쳐다보면서 미안한 듯이 “나는 아직 깨치지 못했다네. 허나 정진하다 보면 다음 생, 어느 생엔가는 성불할 것이라고 믿네. 금생에 이루지 못한들 둔한 내가 어찌 하겠는가. 허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네. 부처님 가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만도 나한테는 복에 겨운 일이네.”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만봉은 그렇게 겸손한 수행자였다. 시주물만 축내고 깨치지 못한 것을 대중에게 늘 빚졌다고 미안해하는 수좌였다. 만봉이 틈나는 대로 다른 수좌들이 선방을 나와서 포행할 때 풀 뽑고 나무하는 것은 구참 수좌로서 성불하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 해서라도 갚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컴컴한 고개를 두어 개 넘자, 가마솥단지 속 같은 널따란 분지가 나왔다. 새싹이 아직 트지 않은 사과나무 가지들은 거미줄처럼 과수원을 덮고 있었다. 경봉은 빈 원두막을 하나 찾았다. 거적때기로 얼기설기 두른 원두막이기는 하지만 찬 서리를 피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밤새 걸으면 직지사에 당도하겠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잠자는 수행자를 깨운다는 것은 큰 무례였다. 한숨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원두막에서 출발한다 하여도 점심 공양시간에는 늦지 않을 수 있었다.
경봉은 볏가리에서 짚을 두 단 가져와 이불처럼 깔고 덮었다. 찬 바람이 송곳처럼 파고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친 두 다리를 쭉 펴자 편안했다. 잠시 후 경봉은 들짐승처럼 웅크렸다. 아무리 폭설이 퍼붓는 밤중이라도 동트기 전에는 절 담장 밖의 눈 더미 속에서 찬바람을 피했다가 들어가는 것이 선객의 법도였다. 선종의 초조 달마를 찾는 혜가도 그러했다. 경봉은 등이 시려 몇 번이나 뒤척거렸다. 컴컴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부처님은 달콤한 잠을 자라고 뭇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경봉은 곧 잠에 곯아떨어졌다.
직지사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중앙에 솟은 황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 고찰이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선구(禪句)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마음 자리가 그대로 성불 자리라는 뜻의 ‘직지’를 차용한 절 이름이 그러하듯 직지사는 교(敎)보다는 선(禪)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었다. 직지사를 중창한 능여(能如) 대사는 신라 무염국사의 선맥을 이은 성주산문의 선승이었고, 숭유배불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한 조선시대에도 조정에서는 고선종대가람(古禪宗大伽藍)이란 첩문(帖文)을 내려 외호했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벽계 정심(碧溪 淨心), 등곡 학조(燈谷 學祖) 선사들이 직지사에서 선지를 폈다. 이후 조선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었던 사명 유정(四溟 惟政) 스님이 직지사로 출가하여 주지까지 지내며 가람의 선맥을 진작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눈 밝은 선승이 거쳐 간 직지사에 다시 선맥이 꿈틀거린 것은 1910년 무렵이었다. 비로전(천불전) 옆의 천불암 염불회를 수선사로 개명한 것이 중흥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의 납자는 3명 정도로 미미하였으나 1913년 제산스님이 천불선원의 조실로 추대되면서 선풍이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천불선원에는 우송(友松)의 은사인 퇴운(退雲), 관응(觀應)의 은사인 탄옹(炭翁), 만봉(滿峰), 남전(南泉) 수좌 등이 먼저 방부를 들이고 입실해 있었으며, 후에 그러니까 1915년에는 경봉이 구참 수좌들 밑으로 합류했다.
천불선원의 선풍은 제산 선사가 아예 직지사에 눌러앉으면서부터 힘을 얻기 시작하여 불과 5,6년 만에 전국의 눈 밝은 수좌들이 30여 명 모여들었다. 제산 회상(會上)의 수좌들 중에서 전강(田岡)에 발군이었는데, 그는 화두병이라도 하는 상기병을 얻어 피를 너무 토해 온몸이 핏기가 가실 정도로 용맹 정진한 끝에 초견성(初見性)을 하였으며 같은 때에 제산의 상좌인 고암(古庵)도 물불을 안 가리고 정진하였다. 이후 구참 수좌인 해담(海潭)과 석암(石岩)이 다른 절의 선방에서 왔고, 1924년 3년 결사 때는 의사 출신의 동산(東山)이 입승으로 참여했고, 제산이 입적하자 고암이, 1935년부터는 금오(金烏)가, 1939년부터는 탄옹이 조실로 추대되어 주석했다.
경봉은 제산스님에 대해서 구전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해인사에 가서야 비로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는데, 스님의 평은 늘 상반되었다. 해인사 선방에서마저 직접 모시는 조실스님인데도 불구하고 깨달은 경지가 밝지 못하여 어둡다고 깎아내리는 구참 수좌들이 있는가 하면, 제산의 법제자인 고암은 경허 선사에게 ‘어디를 가든 50-60명의 수좌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일화도 해인사 지대방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떤 사람이 천불선원 조실로 있는 제산을 찾아와 물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어디 계십니까?”
“묻는 사람이 부처니라.”
“묻는 자는 부처지만 대답하는 자는 누구십니까?”
“몰라!”
제산의 키는 작달막했고, 청수한 얼굴은 동그랗고 넓적했다. 계행은 얼음처럼 청정했으나 마음은 너그럽고 따뜻했다. 그러나 한때는 ‘탁백이(濁酒)’를 좋아하는 등 계행이 법답지 못하여 ‘원(圓)탁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동자승 때의 법명이 정원(淨圓)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성하여 해인사 선방에 입실하면서부터는 금주를 했고, 이후 20년 동안 해인사를 떠나지 않다가 말년에 직지사 벽안당(碧眼堂)으로 옮겨 자신의 선지를 드러내는 ‘주장자법문’을 했다. 그러니까 제산은 벽안당 시절부터 진면목을 드러낸 셈이었다. 벽안당에 주석한 이후 하루 종일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이라는 수행을 입적에 들 때까지 해냈기 때문이었다.
입적에 임하여 제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가겠노라. 대중 속에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물어다오.”
이때 대중 가운데 있던 비구니 하나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디가 아픕니까?”
“황악산이 앓고 있다.”
“황악산도 주인이 있습니까?”
스님은 말없이 주먹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대중과 비구니는 더 묻지 못하여 잠잠해졌고, 스님은 나직한 소리로 임종게를 읊으셨다.
황악산 오십 년 만에
오늘 아침 처음 산을 나서네
도솔천이 어디 있는가
주장자를 들어 보일 뿐이네.
黃岳五十年
今朝始出山
兜率在何處
拈起주杖子
황악산에 들어와 동구불출 수십 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여 오늘 비로소 처음 산을 나서게 되었는데, 누가 자신에게 도솔천을 묻는다면, 선승 납자에게는 도솔천이 주장자에 있다고 말하겠다는 열반의 노래였다.
임종게를 마친 선사는 좌정(坐定)에 들었다. 이른바 앉은 채 열반에 드는 좌탈입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감히 열반에 든 스님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 대중 중에 한 스님이 스님에게 달려들어 손을 만졌다. 예상했던 대로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제야 대중 속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에 탄옹이 나서서 말했다.
“스님, 이대로 가시겠습니까. 대중이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하루를 더 계시면 이 땅에 불법(佛法)이 하루 더 있고, 이틀을 더 계시면 불법이 이틀을 더 있게 됩니다. 스님께서는 애통해 하는 대중의 마음을 굽어보시어 조금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탄옹의 애절한 기도에 스님이 응답한 것이다. 눈을 뜬 스님이 거짓말처럼 입을 열었다.
“언제나 가는 것은 마찬가지거늘 무얼 그리 슬퍼하느냐. 대중의 청이 정 그러하다면 지금 생쌀즙을 만들어 오너라.”
대중은 생사를 자재하게 넘나드는 스님의 모습에 모두 다 놀랐고 신심이 샘물처럼 솟구쳤다. 스님의 얼굴에는 다시 피가 도는지 자비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누군가가 서둘러 생쌀즙을 만들어오자, 스님은 한 그릇을 맛있게 드셨다. 그러더니 대중 가운데 의심이 있으면 어서 점검을 받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침묵할 뿐이었다.
스님의 소문은 순식간에 영남 일대에 퍼졌다. 가깝고 먼 곳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직지사로 모여들었다. 스님 살아생전에 한번만이라도 친견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다시 3일 후 대중을 불러 모으더니 최후 법문을 했다.
“부처님 은혜를 갚기로 하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 고통을 받고 있어도 부족하지만 내 분상(分上)에서는 3일 간의 수고가 족하다. 그런즉 나를 더 붙들지 말라. 한 가지 부탁할 것은 <다비문>을 읽을 때 시도뢰관(始到牢關)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타파뢰관(打破牢關)이라고 일러라.”
이윽고 스님이 침묵에 들어가려 하자, 문도가 겨우 물었다.
“생이란 무엇입니까?”
“본래 불생불멸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바람이 고동치고 불이 바다 밑을 태우니 천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
스님은 비로소 임종을 지켜보는 문도에게 죽음이란 ‘다만 이러할 뿐’이라고 좌탈입망의 모습을 다시 명백하게 보여주며 입적에 들었다.
경봉은 새벽이 되어 일어나 볏짚을 다시 묶어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길을 나섰다. 직지사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문턱의 사시(巳時) 때였다.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하는데 사미승이 부처님께 사시마지를 올리고 있었다.
꾀죄죄한 사미승을 보니 자신이 출가했을 때의 정경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밀양에서 걸어 통도사 안양암으로 갔을 때 은사 성해스님이 불단에 놓여 있던 사시마지를 내려와 배고픔을 면케 해주었던 것이다. 장맛비를 맞아 비렁뱅이 같은 몰골로 찾아갔던 것인데, 성해스님은 외지 나갔다 돌아온 아들처럼 인자하게 맞아주었던 것이다.
경봉은 사미승에게 만봉스님의 거처를 물었다.
“만봉스님 계시는 곳이 어디오?”
“만봉스님예, 머리 깎은 지가 얼마 안 되어 지금은 누가누군지 잘 모릅니더. 조금 기다려 보이소.”
법당에서 나오자, 사미승이 종종 걸음으로 다시 와 말했다.
“만봉스님은 출타중이십니더.”
“원주스님은 어디 계시는가?”
“저기 오시는 분이 원주스님입니더.”
동안거와 하안거 사이의 산철이 되어 수좌들은 대부분 만행을 떠나고 없었다. 천불선원 댓돌에는 짚신이 두어 켤레밖에 없었다. 경봉은 원주를 따라 가다가 남전스님을 만났다. 남전은 제산을 따라 천불선원으로 수행처를 옮긴 말을 잘하는 수좌였다. 원래는 해인사 주지를 하던 사판승(事判僧)이었는데, 경허 회상에서 감화를 받은 후에는 이판승(理判僧)이 되어 참선 공부를 하게 된 것이었다. 남전이 합장하는 경봉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경봉 수좌, 직지사에는 웬일인가.”
“이번 돌아오는 안거 때 방부를 들이려고 왔십니더.”
“그래, 잘 왔네. 나하고 한철 잘 살아보세.”
“고맙십니더.”
“고맙긴 뭐가 고마운가. 어디나 공부하는 중이 주인일세. 이곳 선방에는 만봉스님, 퇴운스님, 탄옹스님이 계시네. 자네를 잘 지도해 줄 터이니 다른 데로 가지 말게.”
“만봉스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꺼?”
“조금만 기다리게. 만봉 수좌가 돌아오면 자네 방으로 사미승을 시켜 연락해 주겠네.”
경봉은 원주에게 임시로 퀴퀴한 냄새가 밴 골방을 하나 배정받은 뒤 걸망을 내려놓고 만봉을 기다렸다. 땀은 가사 저고리는 말할 것도 없고 걸망에까지 배어 마치 물을 흠뻑 뿌린 것처럼 축축했다. 조금 있으니 과연 만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경봉은 사미승을 따라 만봉 방으로 갔다. 만봉은 방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춤이라도 출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나오더니 경봉의 걸망을 빼앗다시피 했다.
“오너라고 고생했네. 어서 그 냄새나는 가사를 벗게. 내가 자네 가사를 빨아줄 터이니 잠시 내 옷을 입고 있게나.”
만봉은 땀에 절은 경봉의 가사 저고리를 방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훌훌 씻더니 빨랫줄에 널었다. 그러더니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내 가사가 몸에 맞는가?”
“네, 아주 깔깔하니 좋십니더.”
“점심공양은 했는가?”
“못 했십니더.”
“그럼, 나하고 공양하고 바람이나 쐬러 태봉으로 가세.”
“아닙니더. 오늘 처음 왔으니 어른 스님들께 인사나 올리고 다음에 가겠십니더.”
“그렇지. 그것도 좋겠네. 다음에 가세.”
경봉은 다시 골방으로 돌아와 큰 대자로 누웠다. 참선은 내일부터 빈 천불선원으로 들어가 하리라고 작심했다. 우선은 제산 조실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구참스님들을 찾아 인사를 올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구참스님들이 경봉을 놔주지 않았다. 한자 실력이 빼어난 경봉은 구참스님들에게 불려가 난해한 부분의 장경이나 조사어록을 해석해 주었는데, 스님들 중에는 밤에도 경봉의 골방으로 찾아와 묻곤 하였다. 경봉은 빼어난 한문 실력으로 금세 직지사 대중 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해인사 주지까지 지낸 남전도 경봉에게 의문 나는 것을 묻기에 이르자, 경봉의 골방은 어느새 밤새 이야기가 오고가는 지대방이 돼버렸다. 사미승들조차 경봉 방에 들어와 한 마디의 얘기라도 더 들으려고 기를 썼다.
경봉이 직지사에 온 것을 누구보다 환대했던 만봉만이 경봉 방을 들르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만봉은 경봉을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어느 때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쯧쯧. 해인사에서도 저랬나. 아니지, 아니지.”
경봉은 그런 만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실인 제산스님 회상에서 만봉을 만나 마음을 다잡으려고 직지사에 왔는데 실망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만봉이 왜 자신을 경원하는지 마음에 집히는 것도 없었다.
아무튼 만봉이 경봉에게 실망하여 피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만봉은 해인사 선방에서 가행정진(加行精進)하는 경봉을 보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지금 보니 학승이나 다름없이 변해 있기 때문이었다. 참선 정진하여 성불할 생각은 안 하고 조사어록이나 뒤적이고 있는 꼴을 보니 만봉으로서는 경봉이 한심하기만 한 것이었다.
하안거 방부를 들이기 전날.
만봉은 더 참지 못하고 경봉을 불렀다. 수좌로서 경봉의 근기가 너무 아까워서였다. 만봉은 수좌들 중에서 사자새끼를 한 마리 고르라면 단연 경봉을 꼽았던 것이다. 계속해서 경원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아서 만봉은 경봉을 불러 봄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는 절 뒷산으로 갔다. 그곳은 정조 임금의 태를 묻은 태봉(胎封) 부근이었다.
“경봉수좌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무슨 이야깁니꺼?”
만봉은 그동안의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경봉에게 왜 조사어록이나 뒤지고 있느냐고 직설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처음 며칠은 경봉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심정은 그렇지는 않은 것이었다. 안거 전의 산철이지만 경봉이 빈 천불선원에 들어가서 참선 정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경봉수좌가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놓지 못하는 것은 직지사 대중들의 질문이 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만봉은 경봉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돌리면서 오해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만봉스님, 일전에 제 옷을 빨아준 것 두고두고 잊지 않겠십니더.”
“내가 참선 공부 잘하는 경봉수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빨래가 아니라 약시봉을 한들 어떤가. 약탕기라도 들고 다녀야지.”
“너무 그러지 마이소. 부끄럽십니더. 법랍(法臘)으로 보나 뭐로 보나 제가 스님을 시봉해야 할깁니더.”
“우리 절집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네. 나이 많은 것 자랑할 것 하나도 없네. 날마다 밥값 떼어먹은 죄만 지으니 업장만 두터워질 뿐이네. 경봉수좌는 똥딱지 같은 대장경 보지 말고 일대사 마쳐 금생에 반드시 생불(生佛)이 돼소.”
그제야 경봉은 만봉의 깊은 마음을 이해했다. 어쭙잖은 한문 실력을 내새워 남보다 더 안다고 자만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조사어록이나 장경을 볼 시간에 참선 공부하라는 만봉의 자비로운 경책인 것이었다. 문득 경봉은 발등에 커다란 돌이 굴러 떨어진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불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끔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