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6.25전쟁전과 바로 똑같은 그 한반도 전쟁 전야를 향해 가고 있는 2015년 1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정치경제사회학적 분위기에 대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이재유
6,25 전쟁이 있기 전에 남한 몰래 북한은 전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지금 북한도 그런 6. 25 전쟁에 버금가는 전야의 만반의 준비를 하여왔고 엄청난 새로운 군단과 공군과 핵무기를 준비하여왔다.
6.25 전쟁이 있기 전에 북한은 요인들이 친서나 전쟁개시조율을 위해 중국, 러시아 방문이 있었다.
지금 인권반인도문제로 심각하게 북한체제의 국제 고립 속에 국제적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김정은 신복들이 극비 또는 알게 모르게 중국 러시아 방문이 있었다.
6.25전쟁이 있기 전에 국제적으로 애치슨라인처럼 극동방위선에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미국의 국방안보선에서 제외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신애치슨라인이라고 할 만큼 심각한 미국의 심상치 않은 국내 경제사정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국방안보라인의 일시적 후퇴같이 최고 첨단 핵무기와 최첨단 레이다 탐지장비, 오키나와 등으로 미군의 주력 공군기지로 후퇴되어 왔고, 미국기지마저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되어 미군방위선의 후퇴내지 여차하면 미군철수 내지 소개령까지 한강 이남으로 상당히 후퇴되어왔고, 대한민국이 대미무역보다 대중무역의 비중이 커지면서 중국 중시적이고 중국 편향적 경제비중이 한미동맹의 부실 내지 약화를 초래해 왔다.
6.25전쟁전 북한내 분위기는 군중대회든 절대적인 결속과 단결되어 있어서 전쟁에서 빈틈없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단결의 모습이었으나 대한민국은 군인도 휴가를 가고 사회내부적으로 여야 갈등으로 단합된 모습도 없고 흩뜨려져 있고 단결되지 못한 사회상이었고, 심각한 사회갈등과 내분의 요소가 많았고 결정적인 것은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전권적 독단정치가 아래 참모들의 무능이 더해지고 대통령앞에서 우선 아부하고 싫은 소리를 꺼려하여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데 한국사회 밑바닥과 최상층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말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심각한 의사소통부재의 연속으로 심각한 지도력독단과 아집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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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절대 전쟁이 없을 것처럼 남북대화분위기잡기에 혈안이 되어 대한민국 대통령이하 정부관리 군인 모두 마음 놓고 그의 분위기 맞추기 일색에 빠져 최고의 VIP에게 눈에 나지 않기, 자리 지키기, 비위맞추기와 아부하기 등으로 싫은 소리와 참언을 하지 못하거나 잘 하지 않는 시스템이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장차관 등과 그 이하 아랫사람들이 모두 아부하고 각하 이상없습니다라고 아부나 허위 보고하면 전부 다 통하던 시절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의사소통의 부재와 상황파악의 부재가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곧 6.25전쟁 전야까지도 북한이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정보 분야에서 보고하여도 심지어 그럴까 그 놈들이 항상 그랬지 후방이나 잠시 그러다 말겠지라고 무시무지 당하였다 하고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서울점령과 대전함락 등으로 국군통수권을 유엔사령관에게 다 넘기는 상황으로 일본으로 남한 민주주의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하는 방안까지 나오도록, 낙동강대치까지 지휘체계는 물론이고 오합지졸, 여기저기 튀어 도망가기 바빠 혼비백산이었다 한다.
6.25전쟁전 북한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양대 북한 공산주의의 양대지주 내지 라이블간에 박헌영을 숙청하여 권력지평을 평정하고 내부단결과 체제긴장 및 단합을 추구하였다.
근자에 북한은 김정은과 장성택간에 권력암투로 장성택을 숙청하여 역시 내부체제 긴장관계속에 단결을 도모하였다.
6.25전쟁 전에 북한체제 요인들과 북한에 머물던 조만식 선생을 서로 교환하자고 제안을 하고 평화회담 내지 평화적 제스쳐 행동이 있어 남한사회와 남한 정부 최고위층과 군관련 총지휘관과 대통령까지 안심하게 만들어 6.25전쟁 전에 군인들이 몇 박 며칠씩 휴가를 나가는 상황이 되도록 여기게 만들었다.
요즘 들어 북한에 납북된 미국인들을 석방하고 평화유화제스쳐를 보내고 있고, 북한 3명 최고급 요인들이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남북정상회담 가능성 등을 타진하며 전혀 도발과 전쟁의 긴장관계가 없을 것처럼 평화 유화제스쳐를 제시하며 인민통일전선전술식 상황이 불리할 것 같으면 유화적으로 눈짓과 손짓을 하고 있는데 사실상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핵무기병진정책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데 남한에서는 북한의 침략 전 남한 긴장완화의 속셈과 의도를 읽어야 하는데 북한이 남한침략의 핵무기 칼을 계속 갈고 있는데도 대통령과 참모 군지휘관 전부 그런 평화유화 분위기에 현혹당하고 있다.
6.25전쟁전 남한 몰래 군대를 확충하고 전시전력준비를 위해 많은 탱크, 포, 전차 등을 무기체계를 업그레이드하고 대량을 갖추었다.
현재 북한이 한 군단을 창설하고 대량의 특수부대요원을 늘리고 핵무기로 선제공격 후 전후방에 그런 특수부대요원 침투를 위해 장사정포, 장거리 미사일, 공군기 공격과 후송기를 늘리고 3일안 미군의 증원이 되기 전에 남한을 전역을 점령한다라는 김정일 사후 3년내 이전에 김정일의 영정앞에서 김정은이 맹세하였다라는 3일천하 계획을 세워놓았다.
6.25전쟁전 북한의 우호적 동맹관계 중국 소련이 북한을 두둔하고 소련은 핵무기개발성공에 더욱 미국을 압박할 수단이 강해지고 북한의 전쟁전 조성상황이 유리해져 갔다.
근자 북한의 중러가 북한을 방어 변론하며, 중국은 특히 미국을 대적하기 위해 무기확충과 최신전투기 등 세계경제 입지가 상대적으로 미국을 압도해 가고 있어 북한 우방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6.25 한국전쟁 직전의 급박했던 당시 남한 상황
-6.25 당시 육군 정보국 북한반 김종필 중위-
6.25 한국전쟁 단시 육군 정보국 북한반 선임 장교였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
치밀한 준비의 북한과 대비하지 않은 무기력한 대한민국
전쟁 의지를 과시했던 군 리더십과 무방비의 유약한 리더십
1950년 6·25 한국전쟁은 그런 구도 속에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南侵) 준비는 한 해 전부터 극비로 진행됐다. 하지만 징후는 드러났다.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그것을 탐지했다.
전투정보과는 49년 12월 '연말 종합 적정(敵情:적의 정세) 판단서'를 만들어 상신했다. 그 보고서는 '남침 임박'이었다.
육본 지휘부는 이를 무시했다.
전투정보과는 적의 동향을 다루는 가장 민감한 신경조직. 과장은 유양수 소령, 핵심 멤버는 상황실장 격인 문관 박정희(좌익 숙군사건으로 무기징역·소령파면 뒤 구제), 북한반 선임장교 김종필 중위,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였다.
6·25 때 남침의 성격과 전체 윤곽을 육본에서 제대로, 최초로 파악한 곳이 전투정보과다.
6·25전쟁 초기 김종필 중위(괘도 지시봉 든 이)가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적정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브리핑을 하고 있다.
-적정 판단서의 남침 예보는 정확합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38선 근방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24일 토요일 자청해서 전선이 위급하다는 상황보고를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불길했지…. 오전 10시에 정보참모 장도영 대령에게 '적의 공격이 임박해 보인다'면서 브리핑을 하겠다고 요청했지요. 30분 뒤에 상황실에서 육본 핵심 참모였던 장도영 정보국장, 강영훈 인사국장, 장창국 작전교육국장, 양국진 군수국장, 고급부관 황헌친 대령 등 수뇌부들이 모였어요. 내가 그들 앞에서 적의 공격 징후가 농후하며, 따라서 전군에 비상태세를 걸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했습니다.
적의 주공(主攻)인 동두천과 조공(助攻)인 개성에 정찰조를 침투시키자고도 했어요. 그리고 작전과 정보가 합동근무 체제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러나 참모들은 다른 데를 쳐다보는 듯 시큰둥했어요. 나중에 장도영 대령만 남았는데, 쓴웃음을 지으면서 '우리 할 일만 하자'고 말합디다. 참모들이 내 상황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거지요."
- 그럼에도 브리핑 직후 정보국 차원에서 비상 작전에 들어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어요. 오전 근무가 끝나서 육본이 한적하기만 했는데, 바로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다는 느낌이 왔지요. 아무래도 38선 상황이 긴박해 보여서 북한반 책임장교인 내가 퇴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직인 남한반 이영근 중위를 쉬게 하고 대신 당직 근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북한군 탱크부대 소련제 북한군 탱크가 한국전쟁 초기 한반도를 누볐다. 국군은 이 무소불위의 탱크 앞에 무력했다.
-24일 육본 정보국 당직근무자로서 전쟁의 발발 과정을 운명적으로 지켜보시는데요.
"나는 상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서 청단과 백천, 용현 등 10곳의 정보국 파견대(OP)에 1시간 간격으로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동두천 동쪽에 있는 양문리 파견대로부터 25일 새벽 1시쯤에 '북한의 전차부대가 기동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이어 개성 정면에서도 '적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해요. 2시 지나면서는 모든 파견대로부터 '북한군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3시 지나면서는 드디어 동두천 등에서 '적의 포탄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들어와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구경의 포탄이 마구 떨어진다'며 난리였어요. 전선이 끓고 있었던 겁니다. '큰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이 터진 거지요."
- 적정 판단서도 무시되고, 24일 아침 보고도 외면당했습니다. 그런 실망과 허탈 속에 적의 전면 남침을 보고 어떤 심경이 들었습니까.
채병덕(1914~1950)(左), 신성모 (1891~1960)(右)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망과 허탈감도 없지 않았지만, 너무 큰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침착하게 전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어요. 함께 적정 판단서를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28일 후퇴하던 수원에서 나를 보더니 '아우님, 우리 예감이 맞긴 맞았는데, 불행한 일이야'라고 하더군요."
-전쟁 직전 우리는 일선 사단장을 대거 교체했고, 비상경계를 풀어 6월 23일에는 장병의 3분의 1을 외출과 외박으로 내보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에는 육본에서 술과 댄스파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인사 난맥, 적정 혼선, 지휘부 무기력에는 북한의 공작과 간첩 침투 때문이라는 의심이 있습니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그런 정황은 없다고 봐요. 가장 큰 원인은 인민군이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맹신이었습니다. 49년 연말에 작성한 정보국의 전쟁 발발 가능성 경고도 그래서 무시했습니다.
저들이 쳐들어올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지휘관을 교체하고, 비상경계도 풀면서 사실상 전선을 공백 상태로 만든 겁니다. 24일 밤 사단장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새로 만든 장교 구락부에 가서 파티에 빠져 있었습니다."
1950. 8. 24. 피란민 행렬
- 파국(破局)이 너무 쉽게 다가왔습니다. 군 지휘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육본 총참모장에 오른 채병덕 소장(병기 장교 출신)은 전선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6월 10일에 교체된 사단장들은 현장에도 잘 있지 않았어요. 자신이 새로 부임한 부대의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다고 보면 됩니다. 유양수 과장도 6사단 참모로 전근명령을 받았지요."
-전쟁이 벌어지자 군 리더십이 우왕좌왕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띕니다.
"어떤 참모는 전날 열렸던 장교 구락부 파티에 참가한 뒤 계속 술자리를 즐기다가 늦게 귀가한 모양입니다. 집에 전화도 놓지 않은 상태여서 연락이 한동안 두절됐어요. 헌병이 지프를 몰고 그 집 근처에 가서 가두방송을 해 겨우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핵심 참모가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한 오전 10시 넘어서 자리에 복귀한 겁니다. 전방부대 사단장들과 다른 참모들도 대부분 전날 파티로 소속부대를 떠나 비상령 하달과 방송을 듣고 10시 전후 육군본부나 소속 부대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육본 요원들은 오후 2시 넘어서야 집합을 완료할 정도였습니다."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박고 숨을 거둔 어느 북한군 병사.
- 군 지휘부가 속수무책이었지요. 패주와 후퇴, 혼돈과 지리멸렬, 집단 불안과 공황(恐慌)에 빠져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육본 당직사령에게 내가 가서 급히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고 했더니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걸 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총참모장에게 보고했으니 비상 걸어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파티에 참석했다가 새벽 2시에 귀가해 잠을 자다가 5시에 당직사령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상황을 알았답니다. 채 총참모장이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를 않아 장관 숙소로 찾아가 상황을 보고했대요. 육본으로 돌아온 채 총참모장은 아침 7시에야 전군에 비상을 내렸습니다."
1951. 9. 20. 총구 앞에 한 북한군 병사가 짐승처럼 수풀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신성모 장관은 오전 10시에 경무대(현 청와대)를 찾아갔으나, 이 대통령은 경복궁 경회루인가, 아니면 창덕궁인가에를 가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어요. 30분 후에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신 장관이 보고를 하자 침통한 표정을 짓던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수는 없을 텐데, 그놈들 장난치다가 그만 두겠지'라고 했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어 오후 2시에 열린 각의에서 '전면 공격은 아닌 것 같다. 후방 사단을 동원했으니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허황된 보고를 했대요."
1950. 8. 25. 길가에 널브러진 피란민 시신들
- 개전 초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길고 처절했던 나흘이었지요. 우리 지도부가 드러냈던 가장 허약한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 발발 사흘째인 27일 채 총참모장이 나더러 의정부 7사단에 가서 유재흥 사단장을 만나 편지를 전한 뒤 전황을 파악해 오라고 하더군요. 돌아와서 '오늘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보고했습니다. 채 총참모장이 '알았네'라면서 주머니에서 미국제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꺼내 내게 건네는데 그 손이 마구 떨려 담배가 한 개비씩 그냥 밀려 나오더라고요. 마구 떨리던 손이 지금까지도 가장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김종필 중위가 본 27일 창동 전선
1950년 6월 27일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창동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에 남느냐, 수도를 버리느냐. 6·25전쟁이 터지면서 북한군이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자 정부와 군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 3시30분쯤, 국방장관은 같은 날 오후 2시에 각각 서울을 떠났다. 남은 것은 군 수뇌부였다.
채병덕 육본 총참모장은 27일 오전 9시 "정보국에서 똑똑한 사람 하나 데려오라"면서 김종필 정보국 중위를 사무실로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건네면서 "창동 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편지를 전하고 회답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봉투에 든 편지의 내용은 지금의 서울 도봉구 창동 전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정부는 남하할지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던 군이었지만 역시 서울에서 떠날 생각을 품었던 것.
김 중위는 지프를 타고 포탄이 떨어지는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갔으나 7사단은 이미 지리멸렬한 뒤였다. 적진에서 날아오는 포탄으로 논의 진흙이 이리저리 튀어 김 중위의 옷에 달라붙었다. 겁도 났지만 김 중위는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더 전진했다. 그러나 유재흥 사단장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적군에 밀려 쫓겨오는 국군 장병들은 차라리 몽유병(夢遊病) 환자와 같았다고 했다. 이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헌병 독전대(督戰隊)가 총을 들이댔지만 국군들은 그 총구를 손으로 밀면서 그저 내빼기에 바빴다. 헌병 저지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대 밥차가 있었지만, 후퇴하는 장병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김 중위는 7사단장 부관을 만나 편지를 건넸다. 돌아오는 길에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나 상황을 물었다. 그는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릉 쪽에서는 새로 수도 방위 임무를 맡은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그가 가리키는 북쪽 산허리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김 중위는 돌아와 이런 상황을 채 총참모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당황하기만 했다. 담배를 꺼내는 손도 떨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했던 육군본부는 27일 오후 1시30분 서울을 떠났다.
http://blog.daum.net/rodin/15964997
1949년 8월과 9월, 북한은 박헌영 외상 등을 보내 전면적 남한 침공을 허가해 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앞서 6월29일 미국은 주한미군을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전원 철수시켰다. 그리고 8월29일 소련의 1차 핵실험이 드디어 성공했다. 스탈린은 종전의 입장을 선회, 9월11일 주평양 소련대사에게 남침 공격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국제적 측면의 검토를 하라고 지시했다. 주북한대사관이 9월14일 부정적 결론의 검토보고서를 보내온 다음,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북한군 군사태세가 덜 준비됐으며, 북한군의 선제공격은 미국에 한국에 대한 개입 구실을 제공할 것이라는 이유로 전쟁 개시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김일성은 1950년 1월 스티코프 평양주재대사에게 개전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탈린에게 직소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토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을 전달받은 스탈린은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초정했고, 김일성은 4월 한 달 대부분을 모스크바에서 지내며 스탈린과 전쟁계획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개전 요청을 승인했는데 이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자 증언 등 2차 자료를 종합한 결과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첫째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둘째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획득, 셋째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과 미소관계 악화, 넷째 미국의 아시아 방위의지의 약화 신호 등이었다.
http://www.tennispeople.kr/news/articleView.html?idxno=1631
북한 정부수립 이후[편집]
1950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 조만식<->김삼룡,이주하 맞교환 제의를 다룬 기사.
1948년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58]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한에서는 전형적인 화전양면기만술의 일환으로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했다.[59] 이는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한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60][61]
죽음[편집]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한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62]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3][63]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한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3]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B%A7%8C%EC%8B%9D
[스크랩][긴급] 북한 김정은, 김정일 영전에 2014년까지 남침 전쟁 공언
사랑의종소리 | 2014/11/22 20:57
[긴급] 김정은, 김일성 영전에서 2014년까지 전쟁 공언 부하들 앞에서 2011년부터 3년 내에 남침 통일 공표
북한의 김정은은 2011년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 영전에서, 3년 내 통일을 공언했습니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도 3년 내 통일 전쟁 을 공표했는데, 햇수로 2014년 이 그 기한이죠.
김정은은 2년차 되던 2013년 3월부터 실제 남침 전쟁을 벌이려고 했으나,중국의 반대 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최룡해가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전쟁 승인을 위한
북·중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시진핑은 보지도 않고 비서한테 친서를 넘겨버렸죠.)
이후 북한 김정은은 대표적인 친중파이자, 남침 전쟁을 반대했던 장성택을 숙청합니다.
당시 김정은과 북한은 공언 2년차에 남한의 이석기와 RO 조직을 동원하면서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반대로 전쟁을 못하니,
친중파이며 중국 시진핑의 명령으로 전쟁을 반대한 장성택을 숙청한 것이죠.
손충무라는 언론인에게, 박지원이 찾아옵니다.
그는 5억을 줄테니 당시 전자개표기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달라고 부탁을 하죠.
또한 박지원은 언론인 중에 "내 돈을 안 먹은 놈은 없다"며 그를 매수하려 합니다.
손충무씨가 "박지원이 돈 안 먹은 놈, 한 놈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며 거절하자
나중에는 10억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손충무씨는 그 내용을 자서전에 폭로하죠. 이것이 싱크홀과 남침 땅굴에 관련해,
언론이 정확한 탐사 보도,를 하지 않고 국방부와 서울시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내보내는 이유입니다.
2014년 8월 13일 시멘트 덩어리가 쌓인, 석촌동 싱크홀이 전세계 TV로 방영됩니다.
이에 놀란 북한의 김정은은 8월 14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을 통해서 박지원에게 긴급 회동을 요청하죠.
표면적으로는, 김대중 서거 5주기 화환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댑니다.
그리고 8월 17일 북한 개성공단에서,박지원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1시간 가량 비공개 회담 을 가집니다.
이후 언론에는, 박원순 시장이 이끈 서울시 조사위원회 공식 발표 내용처럼 삼성물산의 지하철 9호선 공사가
싱크홀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죠. 삼성물산은 '관계가 없다'며 반발했으나,
9월 공정위로부터 지하철 9호선 입찰 담합 혐의로 검찰에 고발 되었습니다.
박지원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북한 개성에서 비공개 회담을 가진 후,
10월에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북한 최고위급 권력 3인방이 전용기로 인천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과 만나, 1시간 40분간 비공개 회담을 하죠,
박대통령과는 만날 "시간이 없다"며, 김관진과의 회담 후 북한으로 돌아갑니다.
3인방이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온 이유는 명목상 AG게임 폐막식 관람이었습니다.
화환 전달이란, 박지원과 비슷한 핑계군요.
진짜 이유는 김관진과의 비공개 회담이겠죠.
2013년 최룡해는 중국에서 시진핑을 만나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고,
이미 준비를 마친 남침 전쟁에 대해 승인받으려 했지만 중국은 반대 합니다.
2014년 11월 18일, 최룡해가 이번엔 러시아를 방문해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군요.
시진핑 때와는 달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고, 친서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20일 러시아 외무장관 라브로프는,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의 정상회담이 준비돼 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직전에도 김일성은,구 소련 스탈린에게 전쟁을 승인 받았죠.
최근 유엔은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하는, 인권 결의안이 통과시킵니다.
2013년 3월 8일 유엔 안보리가 고강도의 대북제재를 담은 결의 2094호를 채택한 직후,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북 간 불가침 합의의 전면 폐기'를 공식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남침 전쟁을 하겠다는 말 이었죠. 유엔의 제제는, 북한에 전쟁 신호입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영전에서 3년 내 통일전쟁을 공언했던 김정은은 유엔 제제가 시작되던 2013년 3월,
전쟁이 임박했다며 이석기 등을 포함한 남한의 조직 에 전쟁 지침을 하달했죠.
주요기간 시설 파괴가 그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의 반대로 남침 전쟁이 무산되자, 김정은은 장성택 일파를 숙청했습니다
김정은이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는,유일한 이유는 장거리 땅굴입니다.
북한에서 직접 땅굴 훈련을 받았던 임천용 전 북한 특수부대 대위는 1980년 벌어진광주 5.18 사태 때에,
북한군 제 2군 요원들이 장거리 땅굴로 광주에 직접 침투했음을 증언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미 광주까지 도달했었죠. 당시 해군을 통해,
5월 16일 전남 보성에 함께 침투했던 이창용등은 검거되었습니다.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면,
장거리 땅굴과 해군을 통해서 한국 전역을 장악할 겁니다.
미국 개입전에 속전으로 전쟁을 치르죠. 북한의 특수부대의 작전은 이런 것입니다.
한국의 언론과 군부가 어떻게 장악되었고, 이들이 비공개 회담 형식으로 직접 만나며
어떤 '쇼'를 벌이고 있는지 보았다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겨우 땅굴 유무로 논란이나 벌이고 있을 타이밍이 아닙니다.
국제 정세를 읽으 십시요.
2013년은 김정은의 전쟁 공언에 2년차되던 해였죠 그는 중국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작년에 남침 전쟁을 실행했을 겁니다
중국에서 시진핑에게 그랬던 것처럼, 최근 최룡해가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을 직접 만나 '김정은의 친서' 를 전달했죠. 전쟁 승인을 받으러 간 러시아에서는, 결과가 좋아 정상회담까지 발표되었군요.
유엔(UN)은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는, 인권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러시아는 전쟁을 승인했고, 중국은 더이상 북한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1950년 6.25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스탈린과 모택동 역시 같은 태도였죠
이제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키는데 모든 방해물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는 작년처럼, 집착적으로 전쟁을 김정일 영전과 부하들 앞에 공언한 2014년 기한에 맞추려 할 것입니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 을 인지했다면,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찾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누구의 말이 아닌 내 눈과 귀로써,현재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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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혁명조직) 내란음모 수사사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이끄는 ‘지하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약칭 RO)’ 구성원(130여명)이
2013년 5월 1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종교시설에서 가진 비밀모임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8월 30일 공개됐다.
녹취록에는 이석기 등 참석자들이 대한민국을 ‘적(敵)’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하면
자신들이 선봉에 나서서 우리 주요 기간 시설을 습격·파괴하는 방안 을 논의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의원은 “전면전 아닌 국지전, 정규전 아닌 비정규전 이런 상태가 앞으로 전개될 것이다.
정치·군사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자 고 제안했다. 이에 다른 참석자들은 “총은 부산에 가면 있다.
폭탄 제조하는 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 참석시키자. 저격용 총을 준비해야 한다.
전기·통신 분야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자”는 등의 논의를 이어갔다.
이들이 평택 유류저장소, KT혜화지사, 분당 인터넷데이터센터(IDC),
경부선과 호남선 등 주요 철도시설 등 타격해야 할 장소 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이 의원은 5월 12일 토론 마무리 발언에서 “존재가 보이지 않는데 엄청난 무기가 있어서
도처에서 동시 다발로 전국적으로 그런 세력이 전쟁을 한다면 그 새로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승리를,
새로운 세상을 갖추자”고 주장했다.
이어 “이미 그전부터 (역량을) 갖췄어야 하는데 (늦었지만) 오늘부터 (갖추도록) 하자.
그게 첫 번째 가장 강조하고 싶은 주체적 (소음으로 안들림)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의원은 ‘보안 사항’임을 전제한 뒤 “A라는 철탑이 있다고 하자.
그 철탑을 파괴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안당국은 이 의원의 발언들이 통신 철도 유류저장고 등의 국가 기간시설 파괴 계획에 구체적인 지침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녹취록을 보면 이들의 논의가 단지 말만 하는 단계를 넘어서 현장답사와 구체적 실행계획을 세우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호(경기진보연대 고문, 구속)는 “평택 유류저장소가 니켈합금과 90cm 콘크리트로 돼 있다”면서
“시설이 실제 경비가 엄하지는 않아… 안에 들어가서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2013년 3월 초에는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 하고 조직원들에게
▲ 비상시국에 연대조직을 빨리 꾸릴 것
▲ 광우병처럼 대중을 동원한 선전전 실시
▲ 미군기지, 특히 레이더 기지나 전기시설
등 주요시설에 대한 정보수집 등 전쟁대비 3대 지침 을 하달했다.
또 언론에 알려진 5월 12일 비밀회합 이틀 전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청소년수련원’에서
조직원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차 비밀회합’을 개최했다
이석기 의원이 작년부터 국방부에 기밀 자료 20여건을 제출해달라고 요구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의원은 미군기지 이전, 방위비 분담금, 전시작전통제권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료를 재촉했다.
이 의원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이다.
소속 상임위와 직접 관련도 없는 군사적 기밀을 요구한 것이다.
새누리당 유기준 최고위원은 2013년 9월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방부에 따르면 2013년 8월까지
지난 15개월간 이 의원이 국방부 미군정책과, 시설기획환경과, 국제군수협력과 등으로부터
20건이 넘는 자료 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북은 다 애국이고 남은 다 반역”이라며 “전쟁을 정치·군사적으로 준비하자”고 한 사람이다.
이 의원은 5월 비밀회합에서 “미국 놈을 몰아내자”고 했었다.
이 의원 등이 자신들의 목적 실행을 위해 실제로 미군 관련 기밀 자료를 입수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합진보당의 당강령(2012.5.11)에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체제 해체’가 명기되어 있다.
이석기 의원이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3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 북한을 방문 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국가단체 구성 등의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실형(2년 6개월)을 선고받았던 이 의원은
200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고 2005년 8월에 특별사면 복권됐다.
이 의원의 첫 방북 시점은 2004년 RO 모임을 결성한 바로 다음 해다.
법무부는 2013년 9월 2일 형법상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32205............................................................................................
북한 특사 최룡해, 푸틴 대통령에 김정은 친서 전달… 어떤 내용 담겼나?
기사입력 201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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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친서 전달 최룡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 중인 최룡해 당 비서가 18일 오후(현지 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크렘린 공보실은 언론 보도문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최룡해 특사를 접견했다”며
“최룡해 특사가 북한 지도자(김정은)의 친서를 갖고 왔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과 최룡해 비서의 상세한 면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북 소식통은 “논의 내용은 경제 협력 및 정상회담 가능성 타진 등 다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북한이 러시아와 통상적 수준의 논의를 원했다면 모스크바에 상주하는 김형준 주러 북한대사나 10, 11월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수용 외무상,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선에서도 가능했겠지만, 최룡해 비서를 특사로 보낸 건 그만큼 북―러 정상회담 성사를 비롯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20일에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최룡해와 동행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노광철 군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이 맡은 역할도 주목된다. 김 제1부상은 6자회담 북한 대표 출신으로 북핵 협상에 정통한 인물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8일 오후 6시 “최룡해 동지가 17일 특별비행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3문장짜리 짧은 보도만 내보냈다.
‘김정은 친서 전달 최룡해’ 소식에 네티즌들은 “김정은 친서 전달 최룡해, 친서에 어떤 내용 담겨있을까?” , “김정은 친서 전달 최룡해, 줄타기하는 걸까?” , “김정은 친서 전달 최룡해, 면담 내용 궁금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최룡해 특사 일행은 22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문 뒤 극동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24일 평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2692318
러 외무 "푸틴 대통령, 김정은과 정상회담 준비돼 있어"
기사입력 2014-11-21 07:58
러시아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20일(현지시간) 밝혔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 최룡해 노동당 비서와 회담한 뒤 단독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라브로프는 "러시아는 최고위급을 포함한 북한과의 다양한 수준에서의 접촉을, 양측이
합의한 시기에 진행할 준비가 돼 있음을 확인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 측과 합의한 시점에 김정은 제1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라브로프는 이어 북핵 6자회담 재개 문제도 논의됐다면서 "북한 측은 회담에서 2005년 9월 6자회담 참가국들의 공동성명에 기초하여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회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이 같은 북한 측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며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과 이 중요한 정치 과정을 재개하기 위한 합의를 찾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라브로프는 "오늘 회담에서는 지난 18일 푸틴 대통령과 최룡해 특사 간 면담에서 이루어진 원칙적 합의들을 확인했다"면서 "최 특사가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한 친서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양국 관계 발전과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의지를 표시했다"고 친서 내용을 언급했다.
그는 또 "러-북 통상경제관계는 이미 진행 중인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을 포함해 질적으로 새로운 수준으로 넘어가고 있다"며 개성공단에 러시아 기업들이 참여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달 말로 예정된 하산-나진 구간 철도를 이용한 석탄 시범 운송 행사가 끝난 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을 위한 구체적 작업이 시작되길 기대한다"면서 "북한 측도 이 사업이 성공하면 다른 남·북·러 3각 협력 사업을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밝혔다"고 설명했다.
라브로프는 회견에서 유엔 위원회가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넘기도록 권고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한 데 대해선 "비건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는 결의안 채택에 반대했다"며 인권과 자유 문제를 다루는 유엔 기구가 감찰기관으로 변질돼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최 비서는 회담 뒤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앞서 라브로프 장관과의 회담을 시작하면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한 것은 두 나라 최고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고 친분 관계를 강화해서 양국 상호관계 발전의 더 큰 성과를 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또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한 김정은의 친서 내용에 대해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의 러-조(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방도에 대해서 김 제1위원장이 견해를 표시했다"고 소개했다.
최 비서는 모스크바 방문 첫날인 지난 18일 저녁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을 면담하고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라브로프 장관과 최 비서는 이날 모스크바 시내 외무부 영빈관에서 오후 1시 20분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회담했다.
북측에선 최 비서 외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김형준 러시아 주재 대사 등 1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회담에서는 정치·경제·군사·인적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양국 간 협력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비서는 사흘간의 모스크바 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날 저녁 극동 하바롭스크로 떠났다. 그는 오는 24일까지 러시아에 머물 예정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5&aid=0003199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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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북한인권 결의안 통과… 김정은 재판 회부되나
2014년 11월18일(화) 유엔 총회 인권위원회 회의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투표 결과가 표시되고 있다.
위원회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인권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김정은의 마음에는 들지 않겠지만 18일(화) 밤 평양이 잠들어 있을 때, 유엔 총회
제3위원회에서 북한 인권 결의안이 통과됐다. 이 결의안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찬성 111, 반대 19, 기권 55로 통과된 이 결의안은 유엔 총회의 공식 채택을 거쳐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결의안이 단기적으로는 멀리까지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북한에 우호적인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주 간 북한이 투표를 막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던 것을 보면 이번 결의안이 가지는 상징성이 여전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징적인 행위조차도 실제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인권운동가들은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이 커지면서 중국 정부가 북한을 옹호하기가 꺼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훈 외교부 인권대사는 인터뷰에서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대사는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안보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그 중요성이 상당히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안보리가 이것에 대해 논의하고 김정은과 국제형사재판소를 한 문장에 넣어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한 발짝을 내딛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사는 또 중국이 안보리의 나머지 4개 상임이사국에 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훨씬 적다는 점을 언급하며 압박이 계속될 경우 중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재고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은 이에 대해 몇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지며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끄는 국가가 되고 싶다면 도덕적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도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근래 수개월 간 북한은 자체 인권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유엔 토론회에서 마이클 커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위원장과 입씨름을 벌였고, 억류 중이던 미국인 2명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최명남 북한 외무성 부국장은 화요일 유엔 회의가 끝난 후 투표 결과를 비난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핵실험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로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최 부국장은 이번 투표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실험을 더는 자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투표 결과는 지난 2월 가속도가 붙은 인권 운동 진영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당시 유엔이 발표한 북한인권조사위 보고서로 인해 북한 인권 상황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이로 인해 유엔에서 정식 절차가 시작돼 화요일 투표로까지 이어졌다.
북한에 만연한 극악무도한 인권 침해 행위들을 그려낸 위 보고서가 공개된 후 일부 인권운동가들은 우크라이나, 에볼라 등 다른 위기 때문에 외교관들의 관심이 북한 인권 문제에서 멀어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로비 활동과 인권 운동, 9월 유엔 총회에서의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발언 등으로 이 문제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이 화요일
통과된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고 미국과 61개 유엔 회원국들이 공동 발의했다.
북한에 우호적인 쿠바는 결의안에서 인권 재판소에 회부하는 내용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한편 북한은 러시아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1시간 동안 면담을 갖기 위해 김정은의 특사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번역 관련 문의: jaeyeon.woo@wsj.com
http://kr.wsj.com/posts/2014/11/20/%ec%9c%a0%ec%97%94-%eb%b6%81%ed%95%9c%ec%9d%b8%ea%b6%8c-%ea%b2%b0%ec%9d%98%ec%95%88-%ed%86%b5%ea%b3%bc-%ea%b9%80%ec%a0%95%ec%9d%80-%ec%9e%ac%ed%8c%90-%ed%9a%8c%eb%b6%80%eb%90%98%eb%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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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5.18 사태 때, 북한군들이
이미 장거리 땅굴로 광주에 침투했었다.]
북한에서 직접 남침 땅굴 침투훈련을 받았던,
北 특수부대 대위 출신 임천용씨의 인터뷰
1980년 광주 5.18 사태 당시, 북한군들이
장거리 땅굴로 광주까지 침투했음을 증언한다
이미 1980년에 땅굴이 광주까지 도달했다.
땅굴은 일반 보병부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 특수부대들의 유일한 작전 통로이다.
북한 특수부대 땅굴 남침 훈련-생화학 무기 살포 계획
"北 특수전 부대원들 지금도 땅굴로 남침… 유일한 작전 루트"
땅굴로 남침하는 北 특수부대, 높이 1.5m ‘쥐굴’ 화생방 통과해야 임무 하달)
http://lovebell-07.tistory.com/m/post/2337
"한반도, 6.25 전쟁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
입력 : 2013-03-11 18:56:55
정권 위협 내부요인 타개하려는 김정은식 정면돌파 관측
"아무도 싸움 말릴 제3의 중재자 없는 무정부 상태 위험"
키리졸브 훈련중 오발 사고 발생시 돌이킬수 없는 위기올수도
“6.25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되자 남측은 "도발 원점 타격"불가론으로 응수하는 등 남북관계는 치킨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격랑의 위기에 휘말린 한반도의 대결구도를 풀수 있는 일말의 해법을 모색코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지만 답답함만 토로한채 헤어졌다.
경실련통일협회는 1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경실련 대강당에서 긴급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4명의 대북 전문가들은 "한반도가 역대 최악의 위기에 봉착했다"며 공감대를 표했다.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되는 즈음 전문가들의 우려가 깊다. 격랑의 위기에 휩싸인 한반도의 대북 대결구도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긴급 좌담회가 열렸지만 답답함만 토로한채 마무리 됐다. 사진은 4인의 대북 전문가들 왼쪽부터 서주석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박영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스한국)
발제자로 나선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충돌위기에 직면한 현 남북관계에 대해 “1993년 1차 핵위기 당시 남북한 충돌직전 상황과 굉장히 유사하다. 20년 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1950년대 한국전쟁때 위기를 느끼게 할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제3의 중재자 목소리가 없다”며 “군사적 행동을 막거나 방지할 세력이나,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무정부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의 도발 위협 언행의 특징에 대해 “핵이 포함된 구두위협이 유독 많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이 실제 군사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며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아버지보다 더 모험적이고 도발적인 언행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도발 원인에 대해선 “김정은 정권이 안위를 위협받는 여러 상황이 발생해 외부의 적(남한과 미국)을 만들어 내부 위기 상황을 정면돌파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며 “지금 시점에서 북한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현재 드러나는 도발적 행동을 제대로 볼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 정부가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하면 기회의 창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결과가 된다"며 "야심차게 추진한 신뢰프로세스는 엔진시동도 걸지 못하는 식물 대북정책을 임기 내내 유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반도에 6.25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이 도래됐다”며 “북한이 핵을 가지고 위협한다는 것은 끝까지 갔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 연구위원은 경색된 북미관계와 관련 “오바마 대통령은 국내 경제 상황과 이란 핵문제에 얽매여 한반도 핵위기는 전혀 신경을 못쓰는 상황이 됐다”며 “김정은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실련통일협회가 주최한 이날 좌담회는 11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경실련 대강당에서 대북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뉴스한국)11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되는 '키리졸브' 훈련 시기에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에 대해선 “현재 한미연합군이 전면전을 대비한 훈련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도발하는건 매우 어렵다"면서도 “현지 부대에서 오발 사고라도 일어나면 포탄이 적진으로 잘못 날아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된다”고 우려했다.
서주석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11일 정전협정을 백지화한 북한이 벌일 도발 시나리오를 예측했다. 그는 “정전협정 무력화를 기정 사실화 하는 상징적 조치를 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서 연구위원은 "비무장지대에 대한 군사침범. DMZ 무단침입. 군사분계선 월경, 서해5도에 대한 군사공격 등을 감행할 가능성이 예측된다"며 "틈새 공격을 통해 북방한계선 침범 가능하며 대규모 사이버전력을 이용해 유사시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키리졸브 훈련 시기에 벌일 북한의 도발 시나리오와 관련해 "육상 및 해상의 무력시위,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이 이어질 수 있다"며 "훈련이 끝나도 군사공격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전히 위기가 상존한다"고 전망했다.
박영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한 요인으로 한반도 위기가 격상됐다고 밝혔다.
박 연구위원은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 뒤 놀이공원 방문이나, 모란봉 악단을 방문하는 등 국민에게 보여주기식 엔터테이너 정치에 집중하고 있다”며 “자신의 리더십을 과시하려는 전형적인 권위주의 리더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정은이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소외되는 세력이 충분히 나올수 있다”며 “북한 정권이 현재 내부적으로 뭔가 안정되지 못한 것 같다. 이로 인해 한반도 위기가 전과 다른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반도내 위기의 해법론에 대해 “한국과 미국, 중국을 포함한 국가들이 북한을 안정시키고 대화로 이끄는 것이 적절한 대응방안"이라며 “북한 내부 상황을 관리해 위기국면을 돌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http://www.newshankuk.com/earth/content.asp?fs=8&ss=20&news_idx=201303111856551770
<연합시론> 南北대화는 하되 무력도발 경계해야
(서울=연합뉴스) 분단 70주년을 맞아 남북한 정상들이 서로 대화의 의지를 강력히 피력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데 따라"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최고위급(정상) 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 남북관계에 급진전을 이룰 용의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차분하게 일단 우리의 대화 제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보면서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박 대통령은 6일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이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진정성과 실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북한은 조속히 남북간 대화와 협력의 장으로 나와 우리와 한반도의 평화정착, 또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실질적으로 협의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이 우리 측의 이 같은 제의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성의있는 태도로 화답하는지가 올해 남북관계 개선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한이 서로 대화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국방부는 북한의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능력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내용의 `2014 국방백서'를 발표했다. 2년 전 백서에는 북한의 핵실험만이 언급됐으나, 이번에는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계기로 북한이 상당한 수준의 핵무기 소형화 능력을 보유하게 됐고, 핵무기가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반영됐다. 백서는 장거리 미사일과 관련, 북한이 "총 다섯 차례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통해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북한군 병력은 국군의 2배 수준인 120만명으로 늘었고 전차와 장갑차, 방사포 등 지상 전력과 전투함 등 해상 전력도 증강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기술 향상에 주력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또 병력과 재래식 전력도 증강됐다. 북한은 이런 전력 증강을 바탕으로 언제 또다시 무력 도발의 모험을 감행할 지 알 수 없다. 군은 북한군의 전력과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우려되는 일은 북한이 앞으로는 대화를 외치면서 뒤로는 핵무기 등 비대칭 전력 증강에 주력하고 도발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 북한의 행태였으며, 앞으로도 그런 행태를 보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북한은 지난 2010년에도 신년사설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 비핵화 실현 등을 언급했으나, 이후 3월에 천안함 폭침, 1월에 연평도 포격 등의 도발을 감행했다. 북한은 지난해 신년사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을 언급했으나, 그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함정과 사격전을 벌이고,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고사총 사격을 감행하기도 하는 호전성을 보였다. 군은 북한이 대화를 외칠 수록 더 경계심을 갖고 그들의 무력 도발 가능성에 한층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북한은 당분간 대남 대화공세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회담을 전격 제의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측의 대응은 차분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먼저 우리 측의 대화 제의에 성의있는 대답을 하는 것이 순서다.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관계 개선의지가 있다면 대화에 조건을 붙일 것이 아니라 일단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진정성을 우리 국민에 일관성있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북관계 개선은 올해에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5/01/06/0505000000AKR20150106136400022.HTML?template=7224
핵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성만 (예 해군중장, 전 해군작전사령관)
2013년 02월 20일 (수) 15:02:34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우리 정부는 하루 속히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폐기하고 NPT 탈퇴를 선언해야 한다
북한이 2013년 2월 12일 제3차 지하핵실험을 강행했다. 국제사회의 경고도 무위로 끝났다. 미국은 작년부터 군사적 조치(선제공격 등)를 하겠다고 위협했으나 북한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 이제 가장 시급한 일은 이번 핵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위협이 무엇이며 우리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있다.
북한 핵무기 위협
북한은 사실상의 핵무장국(Nuclear Weapon States)이다. 핵무기화할 수 있는 핵물질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2005년에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고 2012년에는 헌법에 핵무기 보유국이라고 명기했다. 두 차례(2006년, 2009년) 실험을 통해 폭발력을 증명했다. 우리 국방부는 3차 핵실험의 폭발력을 6~7kt로 분석했다. 북한은 이번에 소형화, 경량화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핵실험의 표적이 미국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미 수년전부터 핵무기로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폭격기, 미사일(스커드 등)에 실어서 제주도까지 공격할 수 있다. 잠수함·위장어선을 이용하면 후방의 항구와 해안도시를 공격할 수 있다. 아무리 폭발력이 작은 핵무기라도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만약 6~7kt의 핵무기가 서울에 투하되면 2개월 이내 20만 명이 사망하고 초토화된다. 그리고 북한은 2008년부터 ‘잿더미, 한반도 핵전쟁’이란 표현으로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목적
① 외부로부터 적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핵무기는 절대무기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를 무력으로 공격할 수가 없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망한 경우도 아직까지 없다. 그 동안 핵무기 보유국들은 핵무기 개발이후 영토가 공격을 당한 적이 없다.
② 핵무기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국가를 쉽게 공격할 수 있다. 공격을 받은 국가는 보복을 하지 못한다. 천안함이 폭침(爆沈)당하고 연평도가 무차별 포격을 받고도 보복은커녕 북한으로부터 사과한마디 받지 못하는 처지가 이를 설명해준다. 군사력이 약한 국가는 결국 소멸된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어가는 시기에도 식량은 사지 않고 핵무기 개발을 계속했다.
국제사회가 북한 핵개발을 왜 저지하지 못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동맹국인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 저지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반도에 친중(親中)정권이 존재하기를 원한다. 이는 과거부터 변함없는 대한반도 정책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군(왜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북상하자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북한의 멸망을 막았다. 중국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군의 6·25 참전을 지금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방해해야 한다. 그래야 미군이 압록강-두만강까지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중국은 이런 지리·전략적 안보환경을 고려하여 1962년에 북한과 체결한 ‘조·중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에 ‘전시 자동 참전 조항’을 포함하고, 조약 폐기는 양국이 동의를 해야 하도록 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중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중요성은 더해 가고 있다. 이제 핵무장한 북한을 잘만 이용하면 주한미군을 몰아낼 수 있고 북한주도의 한반도 통일 달성도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유엔안보리 결의안 채택에는 동참하지만 실제 이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붕괴를 막는다고 매년 막대한 량의 원유와 식량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한반도는 비핵화 되어야 한다. 당사자들은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대북 군사제재에 반대해왔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해도 관계국(한국, 미국 등)은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군사제재, 선박검색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에도 중국외교부는 12일 “북한 핵실험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각국의 이익과 일치한다. 중국 정부는 각국이 조용하게 대응하며 6자회담 틀 안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한반도의 비핵화 현안을 해결하라고 요구한다”고 밝혔다. 과거와 다르지 않다. 중국은 2003년부터 6자회담 의장국을 맡고 있으면서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 핵무장에 필요한 시간만 벌어주었다.
북한의 핵무기 공격징후 포착 시 선제 타격으로 위협 제거가 가능한가?
우리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이 이번에 선제 타격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제 타격은 ‘탐지→식별→결심→타격’ 순서로 진행된다. 이른바 북의 핵 공격을 사전에 제압하는 ‘킬 체인(kill chain)’이다. 그러나 탐지는 미국의 정보자산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미국도 북한 핵무기가 전역으로 지하에 숨겨져 있어 실시간 감시가 불가능하다. 북한은 수백기의 이동식 미사일(스커드, 노동, 프로그)에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고 가짜 이동식 발사대까지 운용하고 있어 식별이 더욱 어렵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013년 2월 13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 개발을 포함한 다양한 타격능력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탐지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타격한다는 말인가. 모두를 파괴하지 못하면 핵무기 반격에 견딜 수 없다. 핵무기에 대한 선제 타격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
공중에서 요격이 가능한가?
북한이 폭격기(IL-28)로 공격할 경우에는 우리 공군이 요격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탄도탄은 고속이고 한반도 종심이 짧아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으로 신형 패트리어트미사일(PAC-3)을 도입하고 한국형 미사일방어망(KAMD)을 구축한다고 해도 핵공격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더구나 북한이 잠수함정이나 위장어선(한국·중국·일본어선으로 위장)으로 은밀 침투할 경우 차단이 어렵다. 북한이 핵배낭부대를 창설했다는 첩보도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인가?
북한은 이번에 한반도 비핵화는 없다면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단, 북한은 과거 2000년대 초 미국과의 단독 협상에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을 타진한 경우가 있다.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대신에 미국은 북한과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안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주한미군은 철수가 불가피하다. 이후 북한은 무력으로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 이 때 미국은 한국을 위해 참전이 불가능하다. 2000년 당시 미국은 한국의 생존을 우려하여 북한의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집권이후 핵무기 없는 세상과 핵 군축을 구상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북 수교-평화협정 체결까지 고려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번에도 북한은 미국에 이런 목적의 대화를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당분간 강경한 대북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북핵 위협이 가중됨에 따라 주한미군의 안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마바 행정부도 과거 정부와 같이 미·북 담판으로 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악몽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중국 등 국제사회가 20년간 노력했으나 북한 핵개발을 막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국제조약(NPT), 유엔안보리 결의안과 미국의 핵우산만 믿고 비핵화를 성실히 이행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대북제재에 동참하면 바로 공격하겠다고 선포했다. 한국은 국가생존을 걱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북한 핵무기는 세계를 위협할 것이다. 어린 김정은(29)의 판단에 지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북한 핵무기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안은 오직 한국이 핵무장하는 방법이다. 한국이 핵무장하면 북한도 핵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핵 균형의 공포 때문이다. 그러면 전 세계는 지금보다 더 안전해 질 것이다. 이제 전 세계는 한국의 핵무장을 도와야 한다. 대신 한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제거하면 핵무장을 언제든지 해제할 것임을 약속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하루 속히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폐기하고 NPT 탈퇴를 선언해야 한다. 정부의 신속한 조치를 기대한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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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012년 대비 2014년 북한군 전력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