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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임제록 공부(2020.12.22.PM7시)
임제록 상당(上堂)
불교의 대의 /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반갑다. 임제록 공부하는 시간이다.
어제 임제록을 시작했는데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시작하는 서두를 잠깐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제는 처음이라서 임제록의 배경을 쭈욱 살펴보았다. 선불교는 달마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여기도 또 이렇게 달마스님을 모셨다.
선불교는 아주 독특한 불교인데, 근본불교하고도 다르고 대승불교하고도 다르고, 또 비밀불교하고도 다르다. 중국에 달마스님이 건너오셔서 아주 새로운 사상이 태동되었다. 그것을 소위 선사상 또는 선불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달마스님께는 저술이 몇 가지가 있다.
그런데 달마스님이 말씀하신 그 불교하고 여기 임제스님대의 선불교하고는 또 많이 다르다.
아무튼 선불교는 달마스님으로부터 발전한 것이고, 그러면서 많고 많은 선어록들 어록(語錄)이라고도 하고 선문(禪門)이라고도 하고 선장(禪藏)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무수히 많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는 선문에서 사실은 문자가 그렇게 많다. 어떻게 보면 참 모순이다. 문자에 매이지 않고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문자가 많아도 역시 불립문자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선불교이다.
그 많고 많은 선문의 문자들중에서 제일서(第一書) 제일 가는 어록이 무엇이냐? 임제록이다 하는 것이다.
사실은 한국불교가 선불교를 표방하고 있다. 물론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 하지만, 선불교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임제록을 당연히 교과서로 써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임제록을 크게 숭상하지 않는다.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어록에 대한 공부를 안하니까 정말 조상들이 남긴 최고의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재로 쓰지 않는다. 불립문자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는 뜻에서인지 상황이 그렇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임제록을 공부하게 됐다.
지금 법문이 막 시작되었다.
어제 서두만 조금 읽었는데 중단된 부분을 연결하는 뜻에서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
1-1 전쟁의 시작
부주왕상시(府主王常侍)가 여제관(與諸官)으로 청사승좌(請師陞座)하니 사상당운(師上堂云), 산승금일(山僧今日)에 사불획이(事不獲已)하야 곡순인정(曲順人情)하야 방등차좌(方登此座)하나 약약조종문하(若約祖宗門下)하야 칭양대사(稱揚大事)인댄 직시개구부득(直是開口不得)이라 무이조족처(無儞措足處)니라 산승차일(山僧此日)에 이상시견청(以常侍堅請)이니 나은강종(那隱綱宗)이리오 환유작가전장(還有作家戰將)하야 직하전진개기마(直下展陣開旗麽)아 대중증거간(對衆證據看)하라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 스님께
법상에 오르시기를 청하니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바로 입을 열 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 그런데 산승에게 오늘 왕상시가 간곡히 청하니 어찌 근본종지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이름난 장군[作家]이 있다면 곧바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대중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라.”
어제 여기까지 봤다. 말하자면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 하북부의 제일 책임자인 부주가 법회를 주관하고, 대중들을 모아서 법문을 듣는 상황이다.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아마도 수천 명은 모였을 것 같다.
스님들도 많고 도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고, 유교인들도 있고, 불교신자들도 있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거기서 임제스님이 ‘나하고 법을 겨뤄볼 사람이 있으면 한 번 나와라’ 그랬다.
그리고 나서 오늘 공부할 첫째 단락의 제목은 ‘불교의 대의’다.
1-2 불교의 대의
승문(僧問),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오 사변할(師便喝)한대 승예배(僧禮拜)어늘 사운(師云), 저개사승(這箇師僧)이 각감지론(却堪持論)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 만하구나.”
다시 읽겠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 만하구나.”
이것이 첫 대화다.
불교에 대해서 거량할 사람이 있으면 한 번 나와서 거량해 보라고 하니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라고 물었다. 딱 질문할만한 내용이다.
선사(禪師)가 됐든 누가 됐든 간에 불교안에서의 선불교이고, 불교 안에서의 선사이다.
모든 불자들의 영원한 과제가 ‘불교의 대의’다. ‘불교의 큰 뜻이 무엇인가?’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라고 했을 때 여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가. 그 역시 불교의 대의, 큰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교에 대해서 수많은 말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대답을 좀 해주십시오’ 핵심이 되는 뜻을 한 번 이야기 해달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할을 했다. 할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할’ 소리를 질러서 ‘할!’ 하는 소리다.
지금도 선사들이 법문할 때 그런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할은 가장 간단한 말이고, 소리 지르기가 좋은 글자인가 보다. 할(喝)이라는 한자도 있다.
제가 서울에 올라가서 <불교인재개발원>이라고 신도들이 하는 인재개발원이 있는데 거기서 임제록을 강의해달라고 할 때, 여러 번 올라가서 강의를 했다. 그때 ‘할’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했다.
임제스님이 알고 있는 불교의 가장 근본되는 뜻, 가장 큰 뜻이 할(喝)이다. 할! 이 소리다. 할!
여러분들도 하나 배웠으니까 이제 ‘불교가 뭐냐’ 하면 ‘할’ 하시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거든 ‘할’하시기 바란다. 괜찮은 무기다. 선불교에서는 할이 아주 괜찮은 무기다.
할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을 다치게는 안한다.
그런데 방(棒)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방망이다. 방망이를 들고 있다가 후려치는 것을 방(棒)이라고 한다.
‘임제(臨濟) 할(喝) 덕산(德山) 방(棒)’ 이렇게 알려져 있다.
덕산스님은 주장자라든지 지팡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가 바로 사람을 후려치는 것으로써 불법을 드날려 보였다.
그래서 ‘임제 할(喝) 덕산 방(棒)’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공부해온 유마경이라든지 화엄경 이런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 아주 독특하고 어떻게 보면 이색적이고 재미가 있다. 거기에 여러 가지 제가 해설을 했는데, 해설을 읽기 전에 한 번 더 본문을 상기해 보겠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 만하구나.”
한 스님이 불교의 대의가 뭐냐고 물었고, 임제스님은 그 답으로써 할을 했고, 거기에 대한 또 대답으로써 그 질문한 스님은 절을 했다, 이런 내용이다.
해설이다.
청천백일에 천둥 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 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슨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개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할’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 ‘할’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 ‘할’ 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이 이 ‘할’에 다 있다.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이 임제록을 해설하면서 부제로 ‘불교는 쉽다’ 이런 말을 했다. ‘불교는 쉽다’ 참 알고보니 쉽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냐’ 하니까 ‘할’ 한마디로 딱 이렇게 답을 했으니까, 참 불교는 쉽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 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할’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그렇다. 불법에 귀의해서 불법에 목숨 바치고, 숱한 고생을 하고,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고 하면서 난행고행을 하며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뿐만 아니라 태국이나 미얀마나 스리랑카나 인도나 일본이나 어디 할 것 없이, 티벳같은 데는 불법에 목숨 걸고 정말 난행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 불법인데, 참 아이러니하다.
임제할, 덕산방이라 하여 임제 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 ‘할’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 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 ‘할’과 ‘방’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 ‘할’을 하였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스님이 여름 한 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 스님들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 ‘할’이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 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정말 배꼽이 빠질 정도로 박장대소 했다. 이야기를 듣고나서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을 계속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 그때 서로가 잘 통하는 도반들이 앉아서 주고받은 이야기다. 어떤 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우리에게 전한 것이다. 한 대여섯 명이 같이 들었는데, 전부가 몸을 헤매면서 방을 똘똘 구르면서 ‘나는 할이요’ 하고 흉내를 냈다.
선가(禪家)에서는 과거에 훌륭한 스님들이 무슨 의미에서 할을 했든지 간에 또 그러한 것을 흉내내기도 하고, 요즘 도 법문을 하면서 선사스님들이 주장자를 높이 들어서 대중들에게 보이는 경우도 있고, 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이 다 옛날 스님들이 선례로 보인 일이다. 법을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그것은 그 사람 사정이고, 아무튼 그런 흉내를 낸다.
이러한 이야기도 우리 전통 사찰, 선가에서 일찍이 몸담고 살아온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야말로 경전에 없는 불법이다. 경전에 없는 불법으로서, 한 번 상기해 보라. 삼사십 명 되는 대중들이 여름 한철을 열심히 정진하고 해제하는 날 쭈욱 큰방에 모여서 차를 나누면서 한철간 공부한 소감을 서로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라고 했는데 ‘올 여름에는 모기가 너무 심해서 고생했다’ 라든지 ‘올 여름에는 장마가 길어서 빨래를 제대로 못했다’라든지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가 쭈욱 나왔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소임자들은 대중들 먹여살리느라 고생했다든지, 또 어떤 스님은 정진중에 몸이 아파서 병원을 다녀왔다든지, 그런 고생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도 서로 기탄없이 나누는 자리였다.
그런 관례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다. 자자(自恣)라고 해서 여름 안거 해제를 하고 쭈욱 모여서 자기가 잘못한 이야기를 발로참회(發露懺悔)한다. 대중들 앞에서 ‘나는 공부 중에 이러이러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실수를 저지른 이야기를 깨놓고 이야기 한다. 대개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자기가 잘못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대중들 앞에 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발로참회다, 라고 한다. 그러면 죄라든지, 잘못한 일들, 실수한 일들이 거의 소멸된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파계행위도 거의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자일에 발로참회하는 것, 드러내놓고 참회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고 값지게 여기는 전통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어온 일이다.
우리가 걸망지고 다닐 때만 하더라도, 어떤 선지식한테 가서 살고 싶었는데 그 선지식에게 가서 살지 못하면 ‘이제 해제했으니까 그 스님한테 가서 법문이라도 좀 듣고싶다’ 하는 경우 해제하면 곧바로 찾아가서 그 선지식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돌아오는 관례들도 있었다.
요즘은 그런 것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런 분위기가 전통적인 분위기인데, 이 어린 비구니 스님은 임제스님의 할을 어디서 들었는지 ‘나는 할이요’ 라고, 할을 하면 했지 ‘나는 할이요’ 이렇게 했다는 게 재미가 있지 않은가. 결코 꾸며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그 현장에서 그 사실을 목도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임제 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 ‘할’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 스님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제가 어떤 영결식장에서 속없는 스님이 할을 하는 것을 봤다. 영결사라든지 추도사라든지 조문이라든지 이런 것을 읽는 슬픈 자리에, 애도를 해야 할 그 자리에, 이 속없는 선사스님들이 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저는 보아왔기 때문에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영결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 스님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라고 임제록 해설에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부연했다. 아주 재미가 있다. 그리고 또 한 단락 더 보겠다.
1-3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이것이 임제록의 사구게라고 제가 지칭하는 말이다. 임제록의 사구게(四句偈)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그것을 번역하면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삼도발문 삼도피타, 세 번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았다, 그런 뜻이다.
문(問), 사창수가곡(師唱誰家曲)이며 종풍사아수(宗風嗣阿誰)오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이것은 질문할만하다. 어느 젊은 선지식이 떡 등장했는데 도대체 이 스님의 뿌리가 무엇인가? 어떤 스승밑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선지식이 됐는가, 이렇게 출세를 해서 천하를 횡행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멋지지 않은가?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냐? 라고 이렇게 질문한다.
사운(師云), 아재황벽처(我在黃檗處)하야 삼도발문(三度發問)하야 삼도피타(三度被打)니라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황벽 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이것이다. ‘나는 황벽스님한테서 법을 이어받았다’라고 한다든지, ‘그 위에는 어떠어떠한 분이 있어서 어떻게 했다’라든지 설명을 해야 옳은데 ‘나는 황벽 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세 번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았다. 뭘 물었는고 하니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불법의 중요한 뜻입니까’ 이것을 물었다. 그러자 바로 황벽 스님은 옆에 주장자를 가지고 있다가 스무 번을 후려쳤다. 그런데 그런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래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했는데, 맞을 때는 스무 번씩 맞아서 60방을 맞았다, 그런 이야기다. 여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승의의(僧擬議)한대 사변할(師便喝)하고 수후타운(隨後打云), 불가향허공리정궐거야(不可向虛空裏釘橛去也)니라
그 스님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할!”을 하고 뒤이어 내리치며 말하였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이것은 상대를 보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 ‘나는 뿌리가 있다, 근거가 있다, 나는 황벽스님에게서 확실한 인가를 받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법을 이었다. 황벽 스님은 백장(百丈, 749~814) 스님의 법을 이었고, 백장 스님은 마조(馬祖, 709~788) 스님의 법을 이었다. 마조 스님은 남악(南嶽, 677~744) 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악 스님은 육조혜능(638~713) 대사의 법을 이었다.
6조스님으로부터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 이렇게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황벽 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라고 하여 자신의 전법내력을 여운이 있고 의미심장하게 밝혔다.
불법(佛法)이니 종풍(宗風)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가서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 스님이 다짜고짜 20대의 몽둥이로 임제를 후려쳤다. 그렇게 간단히 불법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불법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묻고 세 차례나 얻어맞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인 것이다.
여러분들 이것은 꼭 외워두시기 바란다. 이것이 임제록의 사구게다.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고, 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다.
여기 이 뜻을 백퍼센트 다 이해하고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간에 이렇게 선불교가 간단명료하다. 그러니까 모두 번잡한 것을 싫어하고 선문도 읽지도 않고, 공부도 안 하고 그저 간단한 것만 그렇게 찾는다. 그런 것들도 또 이런 데서 기인한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것이 황벽의 불법이며 또한 임제의 불법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불법이며, 역대 조사들과 천하 노화상들의 불법인 것이다. 묻고 때리는 이 사실 위에 성성역력(惺惺歷歷)하고 역력고명(歷歷孤明)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밝은 대낮에 여기 이렇게 빨가벗고 춤을 춘다.
묻고 때리는 이 사실 위에 성성역력(惺惺歷歷)하고 역력고명(歷歷孤明)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밝은 대낮에 여기 이렇게 빨가벗고 춤을 춘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끈이 짧으면 깊은 우물에는 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천하 사람들을 모아놓고 불법을 드날리는 것은 명명백백한 근본뿌리가 있고, 금강보검이 있고, 빼어난 솜씨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제대로 된 실력도 없으면서 판을 벌일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에서 독화살이 날아와 명줄을 끊어 놓을지 모르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가 맞다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 이 집안의 진짜 종풍은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 일이다.
‘허공에다가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라고 한 이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그래서 이것을 나름대로 이렇게 제가 저 아는 대로 해석을 했다.
오랜만에 임제록을 공부하니까 재미가 있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그리고 할(喝), 할에 대해서. ‘불교의 대의가 뭐냐’ 임제스님은 ‘할’하는 소리로써 대답을 했고, 또 ‘스님은 어디서 법을 받았느냐’고 하니까 ‘황벽스님에게서 내가 세 번 불교의 적적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 크게 얻어맞았다’ 이것이다.
달마스님 당시 때는 이런 일은 없었는데, 중간에 선의 황금기라고 하는 임제스님 대에 내려오면서 선가에서 이렇게 표현해 보이는 관례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 방장스님도 결제때나 해제때 법문 할 때마다, 임제스님 법문을 제일 많이 하신다. 또 임제스님 어록을 가지고 하지 않더라도 여러 스님들을 보면, 흔히 방을 쓴다든지 또 할을 한다든지 하는데 그 역시 임제가풍이라고 한다. 선불교에는 임제가풍을 아주 숭상하니까, 지금도 임제가풍을 숭상하는 관례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대로 하나의 전통으로, 하나의 문화로도 상당히 괜찮은 관례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
오늘 임제록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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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공부하다가, 임제록을 공부하니 새롭다. 이색적인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인간미가 넘쳐나기도 하고, 재미가 있기도 하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사실은 여기서 우리가 눈을 떠야 된다. 이런 한마디 한마디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지 다른 의미는 아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지금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모두들 동참해 주셔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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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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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할(喝) 덕산 방(棒)’
청천백일에 천둥 치고 번개 치는 일.
禪宗의 진면목을 드러낸 일.
임제록의 사구게(四句偈)ㅡ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고을의 수장이 법회를 주관하는 옛 풍습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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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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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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