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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잘 지내셨어요? 오늘 1독서, 2독서를 보면 분열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1독서 이사야서를 보면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지역, 즉 갈릴래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간적으로는 예수님 탄생 전 기원전 600-700년때 쯤에 앗시리아라는 이방민족들에게 이스라엘 땅이 침범당해서 삼등분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북쪽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차지하고 그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세부분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동쪽, 서쪽, 북쪽 이렇게 세 개로 갈라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즈불룬 땅, 납탈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지역, 이렇게 세 군데로 나눈 것을 뜻합니다. 이민족에게 점령당해서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가 오늘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상태이죠. 이민족들에게 침공당해서 세 군데로 갈라진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어둠에 덮혀 있는 이 땅에 하느님의 빛을 보내셔서 이민족들을 다시 몰아내고 저희들을 한민족으로 모아주십시오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이사야서 1독서의 내용입니다. 1독서에 보면 이스라엘 땅이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2독서 바오로의 코린토서를 보면 코린토서에서도 분열된 내용이 나오죠? 하나의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로 시작했는데 계속 하나로 일치하지 못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바오로 파다, 나는 케파(베드로) 파다, 나는 아폴로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이렇게 사분오열(四分五裂)된 코린토 교회를 두고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갈라지셨단 말이냐? 다시 일치하라고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내용을 2독서에서 보았습니다. 1독서, 2독서에는 분열된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 분열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1독서, 2독서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면 복음에서는 분열을 극복해서 다시 일치하는 그런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100여년전 이스라엘 땅만 갈라진 것이 아닌 신약시대에 코린토 교회만 분열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도 분열될 수 있고 우리 사회도 얼마나 분열되어 있습니까? 곳곳이 조각나 있고...... 정치인은 원래 그렇다 하고 종교까지 경제 분야, 대기업, 중소기업, 우리 동네 마트, 작은 가게, SSM, 대형마트하고 서로서로 곳곳이 분열되는 모습들, 바로 1독서, 2독서에 나오는 분열의 모습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되어서 서로 물고 뜯고,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하나요? 멍멍이 두 마리가 진흙탕 구덩이에서 물고 뜯고 싸우는 모양새...... 이 모양새로 계속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로 나아갈 것인가. 그것을 오늘 복음을 보면서 답을 찾았음 좋겠습니다. 1독서에서 이스라엘이 왜 분열이 되었습니까? 앗시리아 민족 특히 앗시리아 왕의 욕심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이스라엘을 세 조각으로 쪼개고 제가 정확히 역사적인 검증은 안 해 보았지만 아마도 세 조각으로 갈라놓고 조각조각끼리 서로 경쟁과 다툼을 시켰을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통치하는 입장에서 다루기가 편하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이것이 1독서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앗시리아 왕의 욕심이 개입하니까 일치해서 잘사는 한민족들을 조각조각 분열시켜놓고 분열시켜 놓은 상태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시킵니다. 1독서는 정치적인 문제라고 치죠. 2독서는 코린토 교회문제입니다. 신앙공동체 문제란 말입니다. 이 안에서 파가 갈라졌어요. 왜 갈라졌을까요? 코린토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는데 바오로 파다, 케파(베드로) 파다, 아폴로 파다 하면서 왜 갈라졌을까요? 재산문제, 자기고집문제, 자기가 옳다는 문제 등 이런 것 갖고......
이 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분열됩니까? 정말 오해없이 들어주세요. 우리나라의 지역적인 분열, 왜 분열되었어요? 여러분들의 가정, 부부간에 서로 다투고 분열되는 것, 왜 분열됩니까? 오늘 복음 같이 보시겠습니다. 제가 중점으로 잡은 복음 19절-22절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다시 분열에서 일치로 나아가는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가정이 분열되어 있다면 다시 여기에서 일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국가가 분열되어 있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해답을 찾아서 다시 일치하는 모양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뜻이고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과 일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나와 일치하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네 사람은 어부입니다. 어부에게 있어 그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여기에서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은 문자 상으로만 보았을 때 우리의 효(孝)사상과 맞지 않지만 여기에서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은 아버지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그런 노하우(know-how)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는 그런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아버지는 고기잡는 기술자의 노하우를 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그물, 배, 물고기 잡는 정보, 지식, 기술등을 버리고 예수님과 일치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교우님들은 무언가 찾으셔야 합니다. 제가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여러분들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주는 것이 자식들을 위하는 것입니까? 아님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시는 것이 자식들을 위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자식들을 위하는 길입니까? 좀 주어야 되나요? 자식이 하나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 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제가 경험한 바로는 열에 아홉은 안 주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정말로 열에 아홉은 다툽니다. 그리고 첫째는 말합니다. “내가 동생들에게 넉넉히 주었는데 저놈들이 욕심을 부린다”, 그러면 동생이 와서 또 말합니다. “형이 욕심을 너무 부린다고......” 만약에 네 명이 있으면 네 명이 다 똑같이 말합니다. “나는 욕심 없는데 저놈들이 욕심 부려서 이런 분열과 다툼이 생기고 서로 안 보고......”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우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물과 배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들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고 형제들과 일치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바로 예수님과도 일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는데 형제들과 일치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개신교를 말해서 조금 죄송하지만 어떤 사람 형이 개신교에 다닌답니다. 그런데 자기 형이 재산을 다 먹었대요. 그리고 자기들에게 말한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관리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나눌 수 없다”고 했대요. 그분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과는 일치했는데 형제들과는 일치가 안 되는..... 그곳에서는 그 논리가 통할지 몰라도 우리 성복동 성당에서는 안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죠.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선택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나와 일치하자’, 여기에서 나와 일치하자는 뜻은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 사랑의 관계, 선의 관계로 이어져 있자는 뜻입니다. 초대했을 때 그들이 계속해서 그물을 붙잡고 배를 붙잡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예수님과 일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선택한 것이죠. 배와 그물을 붙잡고 있든지, 아니면 이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든지. 예수님도 붙잡고 배와 그물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유산도 내가 많이 먹고 형제들과도 일치하고...... 이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형제들과 다 일치해서 사는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그물과 배, 부모님이 주신 땅덩어리를 붙잡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을 선택하면 예수님과 일치, 형제들과 일치하는 것이고 저것을 선택하면 그물과 배와는 일치하는데 예수님과는 일치가 안 되는 것이죠. 복음의 다른 장면에서 부자 청년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와서 말합니다. “예수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율법을 잘 지켜라” 하시자 부자 청년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것은 제가 어렸을 적부터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대견하게 보시고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너 참 대견하다. 그런데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이에게 주고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제가 해석하기에는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있는 물질을 붙잡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일치보다는 조각조각 갈라지는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무언가 하나를, 예를 들어 어부들에게 있어 그물과 배, 이것을 어부들이 놓았을 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여러분의 가정, 일가친척 가운데 불화, 불일치가 있다면 그래서 조카 결혼식에도 가지도 않고 초대하지도 않고 이런 관계에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얻으십시오. 계속해서 이것을 붙잡고 있든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사람과 일치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을 선택하든지 이제는 선택의 문제이고 그것을 선택했으면 선택에 대한 그 이후의 책임도 본인이 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형님이 돌아가도 가지도 않고 형수가 암에 걸려도 가 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사시든지, 아니면 나의 어떤 것을 버리고 비워서 그렇지 않은 관계로 일치해서 가든지 이것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강론을 마무리지면서 우리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5년 넘게 성전건축이라는 어려운 일을 하면서 본당신부인 제가 알기로는 우리 교우님들간 분열은 없었습니다. 분열 없이 일치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우님들이 자기들의 그물과 배, 그것이 물질적이든 고집이든 생각이든 그런 것들을 많이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분열 없이 지금까지 공동체가 이끌어져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여기계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자신 안의 분열, 분열의 원인은 무언가를 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과 일가 친척간의 불화와 분열, 불일치, 이것도 무언가 버리고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태도 사람들이 놓지를 못하고 버리지 못하니 점점 갈라지고 골이 깊어지고 골이 깊어질수록 회복되는 시간도 길어질텐데 참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방법, 형제들과 일치하는 방법을 오늘복음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잠시 묵상합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병든 부모와 형제를 외면하면서
기도 올리는 위선적인 이들이 가까이 산재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시겠지요.
감사드립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