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2017년까지 7년 동안 전국 임진왜란 유적을 답사했습니다. 다니면서 전쟁의 실감을 느끼고, 사진을 찍고, 글을 썼는데, 2017년 정리를 해보니 중요 유적지만 헤아려도 무려 490곳이나 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서책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무수한 서적들을 참고해 출처를 밝히고 사진 1,215장을 곁들여 책으로 편집하니 3,112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숨가쁜 여정과 과정을 거쳐 펴낸 책에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총서, 전 10권)’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일에 매달린 것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소설로 재창작해보려는 의욕 때문이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익히 아시는 바입니다만,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의 실상을 세밀하게 담지는 않았습니다. 일기라는 글 갈래가 가지는 특성상 그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지만 후대인인 우리는 충무공이 날마다 일기를 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처지와 입장에 놓여 있었을까를 헤아려보는 마음으로 ‘난중일기’를 읽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는 의의가 없고, 독서를 통한 배움의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 성웅聖雄 이순신 개인은 물론 민족과 국가 공동체에 대한 성심誠心를 가슴속에 키우게 됩니다. 그 일을 정만진 혼자 감행해 본 결과물이 ‘대하소설 난중일기’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난중일기’ 첫날(1592년 2월 13일, 음력 정월 초하루)의 본문은 “初一日壬戌晴曉舍弟汝弼及姪子菶豚薈來話但離天只再過南中不勝懷恨之至兵使軍官李敬信來納兵使簡及歲物長片箭雜物” 53자가 전문입니다. 한글로 옮기면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 조카 봉, 아들 회가 왔다. 다만 어머니와 멀리 남쪽에 떨어져 두 해 연속 설을 지나치니 너무도 애잔하다. 병사가 군관 이경신을 시켜 편지, 설 선물, 길고 짧은 화살을 보내왔다.” 정도인데, (띄어쓰기 포함) 고작 120자 남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인, 과정, 결과로 점철된 복잡다단한 서사敍事의 전말을 모두 다루지 않는 일기의 특성상 짧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120자 안팎의 ‘난중일기’ 본문을 ‘대하소설 난중일기’는 5,200자(200자 원고지 약 270장)로 확충했습니다. 원인, 과정, 결과를 복원함으로써 이순신의 심정, 처지, 입장을 후대인인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헤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재창작 의도인 까닭입니다.
같은 말을 덧붙이자면, ‘난중일기’ 집필 이틀째인 1592년 정월 2일 일기는 “맑음. 나라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김인보와 이야기했다(晴以國忌不坐與金仁甫話)”가 전문입니다. ‘대하소설 난중일기’는 그 원문에 원인, 과정, 결과를 가미해 3,000자(200자 원고지 150장)로 확충했습니다. 나라의 제삿날과 얽힌 이순신 가문의 내력을 추적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김인보가 누구이며,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시간, 장소, 인물의 사실史實에 맞춰 복원했습니다. 따라서 ‘대하소설 난중일기’는 시중의 임진왜란 관련 소설과 영화 등이 저지르는 참담한 역사 왜곡 행위와 까마득한 거리를 두고 재창작되었음을 자부합니다.
날짜는 현대사회의 독자가 느끼는 계절 감각에 맞추기 위해 양력으로 밝히되,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음력 날짜를 덧붙입니다. 다만 대화는 당시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당사자들이 발음한 음력으로 표기합니다.
‘현장 사진’과 ‘현장 답사기’를 부록으로 첨부했습니다. 독자들이 더욱 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대하소설 난중일기’가 소설가의 상상만이 아니라 사실史實에 충실한, 말 그대로의 역사소설이라는 사실事實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아무쪼록 ‘대하소설 난중일기’가 충무공 이순신을 현창하고, 공동체 정신을 북돋우어 미래의 도약을 도모하려는 민족사적 과제 실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자 정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