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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18일 수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일까요? 꼭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짚어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갔을 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환히 알게 될 때에는 믿음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믿음과 희망은 천국 문 앞까지 가고, 천국 안에서 온전한 것이 왔을 때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신령한 언어도 온전한 것이 오기 전의 기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것이 와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요? 신령한 언어도 선행도 필요 없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내준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대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나와
함께하려고
내가
되어주지 않아도
되어요
나
그대와
함께하려고
그대가
되어드리면
되니까요
오늘의 성인
성 쿠페르티노의 요셉(Joseph)
신분 : 신부, 신비가
활동지역 : 쿠페르티노(Cupertino)
활동연도 : 1603-1663년
같은이름 :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이탈리아의 쿠페르티노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셉(Josephus)은 젊어서 제화공의 도제로 들어갔다가 17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그 다음에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8개월 후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그라텔라의 콘벤투알 수도원에서 마부 노릇을 하는 한편 3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에서 살았다. 이윽고 1625년에 그는 수련자로서 허락을 받았고, 너무나 지식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628년에 사제로 서품되는 영광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탈혼, 기적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총 등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7번이나 공중에 뜨는 경험을 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조차 그의 성덕과 성실성에 탄복하여 그를 아시시(Assisi)로 보냈다.
아시시에 은거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계속 퍼져나갔기 때문에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피에테로사(Pieterossa)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포솜로네로 옮겨 다녔다.
1657년 그는 오시모(Osimo) 수도원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귀향하여 살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1753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공중 여행자와 비행 조종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소피아(Sophia)
성녀 이레네(Irene)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200년경
같은이름: 쏘피아²
같은이름: 이레나, 이레네아
성인설명 :
성녀 이레네(Irene)는 성녀 소피아(Sophia)와 함께 이집트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블라헤르린지역에는 귀중한 유물인 성모의 머리수건이 보존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화(Icon)와 후에 파괴된, 기도하는 성모를 묘사한, 은혜를 베푸는 종교화는 성모성화의 전형 (典型)으로서 그 시원적 (始原的)인 주제였으며,수즈달 시민들에 의해 점령당한 노프고로드시를 구출(1170년)한 이후로는 러시아에서 표준 성화로서 특히 경배되었다.
이 점령 광경 자체가 호평받는 성화의 주제로 다루어졌는데, "성벽의 성모"라고도 불리우며, 이것은 바로 그곳에 이 성화를 세웠던 사실에 연유한다.
표상의 성모는 노프고로드시에서 공경을 받게 되었고 시의 문장이 되었다.
성모는 기도드리는 자세로 팔을 올리고 있는데,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가슴에는 광륜(光輪)속에그리스도 임마누엘이 한 손에 성서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손은 축복을 내리며 올리고 있다.
관람자 측에서 볼 때에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성 게오르기오스와 로마의 마카리오스(Makarius),오른쪽에는 페르시아의 성 야고보와 기독교의 바보를 자처한 오누프리오스가 묘사 되어 있다.
성모의 머리수건과 의복의 단은 금실로 짜였으며 아름답고 색깔이 장식적인 이 성화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성녀 리카르다 (Richardis)
활동년도 : +895년경
신분 : 황후
지역 :
같은 이름 : 리까르다, 리카르디스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의 백작 딸인 성녀 리카르다는 22세 때에 독일 왕 루이스의 아들인 찰스 팻트와 결혼하였다. 19년 후 그는 남편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요한 8세(Joannes VIII)로부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와 황후로 대관되었다. 그 후 찰스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하여 리카르다를 모함에 빠지게 하였고, 리카르다는 이에 대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타오르는 불길 위를 지나가는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맨발로 맹렬한 불길 위를 걸어갔으나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누명을 벗었으나, 남편과는 별거키로 하고 안들로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녀는 수녀들의 생활을 그대로 실천하여 보속하면서 평화롭게 살다가 선종하였다. 리카르다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