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대륙 어디에 위치하였었던 왕국이었으며 어디서 청자나 비색도자기를 제조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 함구하고 역사를 모르는 한국 기자가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유도하는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이래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된다는 것이 절실합니다.(운영자 주)
'고려비색(秘色) 천하제일(天下第一)'
13세기 남송 학자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에서 고려청자를 극찬한 대목이다.고려청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 학자가 '천하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방한한 셰밍량(謝明良) 국립대만대학 예술사연구소 특빙교수와 같은 대학 스징페이(施靜非) 교수도 19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고려청자와 조선 청화백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높게 평가했다. 이들 중 특히 셰밍량 교수는 중국도자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고려청자는 북송 시대 여주(汝州) 지방 가마인 여요(汝窯)에서 생산된 도자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지만 셰밍량 교수는 고려청자가 이슬람 자기의 영향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여요는 목이 긴 형태가 대표적인데 비슷한 모양의 이슬람 유리병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서 "한반도에서 이슬람 유리가 발견되는 것은 교역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즉 고려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이슬람 자기의 형태를 직접 본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셰밍량 교수는 고려의 임로성이란 인물이 983년 중국에서 가져온 '삼례도'란 책에 자기의 모양이 수록돼 있고 1117년 송 휘종이 고려에 제기(祭器)를 보낸 기록이 있는 등 고려청자가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남송 고종황제의 황후 거처에서 고려청자가 많이 발견됐다. 황실에서 고려청자를 사용한 것은 고려청자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고려청자는 중국 항저우에서 여러 차례 나온 적이 있으며 최근 대만 동남부의 란위에서도 파편이 출토됐다. 송 당시의 자기도 훌륭했지만 13세기 문헌에서도 고려청자를 극찬했다"고 말했다.
스징페이 교수는 중국의 청화백자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시기별로 아시아에 퍼졌는데 조선은 15세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용과 봉황 무늬나 전지화문(纏枝花紋.꽃의 줄기가 얽혀 있는 무늬) 등에서 중국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 장시성(江西省)의 경덕진(景德鎭)에 관요(官窯)가 있었는데 조선도 경기도 광주 일대에 관요를 만들어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스징페이 교수는 "조선의 청화백자는 독자적인 스타일이 강했다. 궁의 화원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중국보다 회화성이 강조됐다"면서 "물론 중국이 선진국이었지만 한국도 빠른 시기에 고운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조선 청화백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큰 영향을 줬고 일본은 다시 그것을 발전시켜 17-18세기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셰밍량 교수는 20일 오후 2시 재단법인 리앤원 주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강연회에서 황실 전용 자기를 만들던 북송의 관요에 대한 최근 연구 현황에 대해 설명하며 스징페이 교수는 14-17세기 아시아 청화자기가 발전한 양상을 살핀다.
kimyg@yna.co.kr

<사진 설명: 셰밍량 교수(왼쪽)와 스징페이 교수>
연합통신 2009.8.18
첫댓글 "경덕진'이 바로 고리청자의 본산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