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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토착 왜구
출애굽기 2:5-10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나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공주가 갈대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하나를 보내어 건져다가
6.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이 아기는 틀림없이 히브리인의 아기다." 하고 중얼거렸다.
7. 그때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아기에게 젖을 빨리게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하나 데려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하고 대답하자 소녀는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삯을 줄 터이니 이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여 길러다오." 그리하여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여 키웠다.
10. 아기가 꽤 자란 뒤에 어머니는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자기의 아들로 삼고,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여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중동의 화약고가 터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 10월 7일 새벽 육‧해‧공을 통해 이스라엘을 기습공격 하고 1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스라엘도 가만있지 않았죠. 역사상 가장 극우인 네타냐후 정권은 하마스의 기습 직후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하며 즉각적인 ‘피의 보복’에 나섰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차별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자 하마스는 경고 없이 미사일 공격을 하면 1명씩 인질을 죽이겠다고 밝혔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힘으로 하마스를 물리칠 것이며 (이번 전쟁을 통해) 중동을 변화시키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며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를 전방위로 포위하고 모든 보급품 반입을 차단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2007년부터 생필품과 의약품 반입이 제한된 가자지구에 전기, 식량, 연료 공급이 끊기면서 팔레스틴 주민 237만 명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지난 12일 자정께 가자지구 주민 절반에 해당하는 110만여 명에게 남쪽으로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고 조만간 가자지구를 공격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민간인의 대량 살상을 우려하며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히브리 백성들은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 있을 때 이집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아흐모스 1세)이 나타났고, 히브리인을 노예로 삼아 핍박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노예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났죠.
히브리인들이 적국과 결탁하여 훗날 애굽의 적이 될까 두려워한 파라오(투트모세 1세)는 히브리 백성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게 하고 딸을 낳으면 살려주게 합니다(출1:6-16).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죠.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를 낳자 너무나 잘생겨서 죽이지 못하고 몇 개월을 몰래 키웁니다. 하지만 아이가 점차 커가며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왕골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우기로 결정하죠(출 2:1-3).
그때 마침 나일강가로 목욕 나온 이집트의 공주 핫셉수트가 그 바구니를 발견하게 됩니다. 공주는 그 아이가 히브리 아이임을 직감하지만 무언가에 끌려 양자로 삼습니다. 공주는 자신이 부친이 이스라엘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음을 알았으면서도 모세를 살려주고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죠. 그 이유로 성서는 모세가 ‘너무나도 잘생겨서(토브, טוב)’였다고 암시합니다. ‘토브( טוב)’란 단어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고 했을 때의 "좋았다"에 쓰인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암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공주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나일강가에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작전을 개시합니다. 공주에게 유모로 그 아이를 돌봐줄 여인이 있다며 모세의 생모인 요게벳을 데려오죠. 공주는 요게벳에게 양육비를 주며 모세를 키우게 합니다. 어느 정도 장성한 모세는 핫셉수트 공주에게 보내져 어엿한 이집트의 왕자로 키워집니다.
히브리인들은 특별한 경우 7살까지 젖을 먹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은 3살 정도에서 젖을 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창 21:8;심상 1:22,23,24;대하 31:16). 따라서 모세가 핫셉수트 공주에게 보내진 때는 대략 3,4세 가량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짓는데 그 이름은 이집트어로는 ‘아이’ 혹은 ‘아들’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모세는 ‘끌어내다’, 즉 ‘물에서 건지다’란 뜻인 것으로 보아 히브리인의 해방을 암시하는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양어머니 핫셉수트 공주는 투트모세 1세의 딸입니다. 핫셉수트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죽고 나서 배다른 어린 동생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죠. 투트모세 2세는 병약하여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핫셉수트가 왕을 대신하여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죠. 투트모세 2세는 재위 14년 만에 죽는데 핫셉수트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과 여종인 이시스 사이에서 낳은 투트모세 3세가 겨우 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죠. 어린 왕을 대신해서 수렴청정하던 핫셉수트는 마침 나일강에서 발견한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아 투트모세 3세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왕궁으로 들어간 모세는 신분이 숨겨진 채 이집트의 지도자로 키워지죠. 모세는 이집트 왕자의 신분으로 궁중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행 7:22). 이 과정을 보면 핫셉수트가 어쩌면 모세를 다음 이집트 왕으로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세는 히브리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 요게벳의 품에서 히브리 민족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 받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라면서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당하는 고통과 수치를 보며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죠.
훗날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군주가 되지만, 29세에 실제 왕권을 잡을 때까지 핫셉수트의 섭정 아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자신이 왕이면서도 배다른 어머니의 통제 아래 있었던 투트모스 3세는 그녀에 대한 분노를 켜켜히 쌓아갔습니다. 그리고 실구너을 잡자마자 핫셉수트를 폐위시키고 그녀와 관련된 기록들을 다 없애버립니다. 얒자인 모세 또한 이집트 왕자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죠.
핫셉수트의 실각으로 모세는 어정쩡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미래의 비젼과 목표도 사라지고 뭘해야 좋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러다 어느날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동족 히브리인들에 의해 탄로나게 되죠. 그 일을 알게 된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손을 피해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죠. 그때 모세의 나이가 40살이었습니다(출 2:11-15).
토착왜구(土着倭寇)란 말이 있습니다. 말의 뜻부터 살펴보자면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았음을 뜻하는 '토착(土着)'이라는 말과 전근대 일본의 해적집단을 가리키는 단어인 '왜구(倭寇)'가 합해진 신조어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이자 줄임말인 토왜(土倭)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토왜는 임진왜란 때부터 일본인보다도 적극적으로 매국 행위를 일삼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토왜(土倭)라는 말은 해방 이후에 사라졌지만, 2019년 초 역사학자 전우용에 의하여 토착왜구라는 말로 살아났죠.
1910년 6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에 "토왜천하(土倭天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내용을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이렇게 풀었습니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토왜를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人種)’으로 규정하고, 토왜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습니다.
(1) 뜬구름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이 이에 해당합니다.
(2)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 일본의 침략 행위와 내정 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이 이에 해당합니다.
(3) 일본군에 의지하여 각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4) 저들의 왜구 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험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시정잡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토착왜구(土着倭寇)’란 말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다음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와 여당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친일, 아니 숭일 행보를 거침없이 당당하게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깊고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 안에 일본인의 정체성을 지닌 자들이 매우 많이 있으며 또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죠.
올해 8월 15자 남도일보에는 <‘토착왜구’들의 본격적인 행보인가>라는 제목의 김갑제 칼럼이 실렸습니다.
김갑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소화국쇄연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살던 일본인은 265만 명이나 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남한에 187만, 북한에 78만 명이 살고 있었다. 북한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가 살았던 것은 일본으로부터 거리도 멀고 춥고 척박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이 최대 13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77만 명은 북한 측 일본인이다. 북한은 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남는다 해도 자기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보장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 땅 기록에서 사라진 133만 일본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과연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여 축적했던 재산, 집과 땅 부동산, 동산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돌아가면 폐허만 남은 땅에 빈손 거지꼴로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모습도 한국인과 똑같고 언어 또한 유창해 한국인으로서의 신분세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승만 정부 또한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모든 것 보장한다며, 일본인들을 붙잡았다. 결국 그들은 오롯이 한국인으로 둔갑해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방 78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몇 명이며 어디에서 무슨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화국쇄연감’은 소화천왕(1926-1988) 시대의 연감을 말하는데, 그 기록을 잘 살펴보면 남한 땅에 거주하던 일본인 187만 명 중 많은 사람이 잔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방 이후 잔존 일본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그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조선을 떠나며(2012, 역사비평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려 있죠. 이 책은 일본인들이 당시를 회고하는 에피소드를 엮었는데, 일본인의 입장에서 해방 정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본인들 중 식민통치 초기, 조선인의 격렬한 저항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인, 즉 문화통치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들은 조선을 타민족의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본래부터 일본영토려니 했다는 것이죠.
때문에 해방 정국이 되고 조선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관공서와 주재소를 습격하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변화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에 의해 자신의 당을 빼앗겼고,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느꼈던 것이죠. 패전 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궈 놓은 재산을 정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고위층들은 그럴수 있었을지 몰라도 일반인들은 미군정의 요구대로 거의 빈털터리로 돌아가야만 했죠. 미군정은 일본으로 귀국시 민간인은 1,000엔(현재 가치 1억원), 군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만 지참하도록 하였고 짐도 휴대할 수 있을만큼만 허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은 잔류를 결심하고 조선인처럼 변신하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YMCA 한국어 강좌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조선어에 능통한 일본인들은 일본 거주지역을 빠져나와 조선인들과 섞여 살며 조선인 행세를 하거나 족보를 만들어 자손을 조선인으로 둔갑을 시켰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잔류 일본인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고 관직에 등용함으로서 일신상의 안전과 재산권을 지켜줍니다. 이들은 친미파로 거듭나 반공을 주창하면서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변신하죠. 이렇게 토착왜구가 된 잔류 일본인은 4세대를 지나며 그 숫자가 불어납니다. 잔류 일본인이 133만 명이라고 한다면 지금 현재는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거기다 친일, 숭일파까지 합치면 꽤 많은 수가 되겠죠.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입성한 토착왜구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미국에 기대어 한일관계 개선과 역전을 꿈꾸었죠. 하지만 북한이 핵강국으로 부상하게 되고 미국과의 대등한 협상 관계를 갖게 되자 일본은 자국의 안보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더군다나 중국과 한국의 경제 성장에 밀리게 되자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을 미일 동맹의 하부동맹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촛불정부를 뒤집으려는 미일의 노력으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토착왜구들은 친일은 반공, 반일은 친북이라는 이념논쟁을 꺼내며 드디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이죠.
오늘 우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모세가 이집트 공주의 양아들이 되는 과정을 성서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총칼로 강제 합병하고, 온갖 악랄한 통치와 수탈을 자행하였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위장하여 토착왜구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죠.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난 모세는 40세 되던 해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의 핍박받는 것을 도우려다 정체가 드러나 미디안 광야로 피신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민족해방의 지도자가 됩니다.
해방 이후 조선에 남아 조선인으로 위장하고 살았던 토착왜구들은 외세에 기대어 또다시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총칼을 앞세워 독재 권력을 휘두르지만 민중들의 항쟁으로 입지가 점점 좁아지게 되죠. 기득권 카르텔을 만들어 영원히 식민지배를 하고 싶었던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밀려나게 될 위기를 맞이하자 드디어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을 지우고 반일은 곧 친북이라며 해묵은 이념전을 전개하는 이유입니다.
모세와 토착왜구의 결정적인 차이는 타민족을 억압하는 위치에 있었는지 억압을 당하는 위치에 있었는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 호의호식을 누렸던 자들과 그들에 의해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던 자들의 입장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모세는 인간의 존엄성과 동등성을 위해 민족해방의 전사로 거듭났지만 이 땅에서 신분세탁을 하고 다시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한 토착왜구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악마들이 되어버리고 만거죠.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라가 망해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팔레스틴에서 벌어지는 비극도 다 이런 연유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분쟁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항공모함을 급파하고 최신 무기를 이스라엘에게 제공하며 지지를 다짐합니다. 이런 파국의 다음 타켓은 우리 한반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방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일구신 하나님의 손길이 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열망하고 민주주의의 회복과 민중해방을 꿈꾸는 이 땅의 수많은 모세들을 일으키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