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
제삿날 노랗게 익은 둥근 달을 굽는다
오래 전 유년의 한 구석 불 속을 뒤적거리며
나는 열쇠와 단도로 오래된 꿈을 파헤친다
검은 무한의 꿈에서 탈출한 달
반달이 되고 하현이 되고 흰 눈썹달이 되어
시간의 벽에 아프게 부딪혀
첫울음 소리를 냈다 붉은 달빛 서러움으로
소리 없이 흘러가는 달무리 그 품에서 어지럼증과
밤꽃과 청색 구름들이 차례대로 익어갔다
달의 기억으로 모아 만든 아이들이 지나갔다
첫 번째, 두 번째, 자기네들끼리 속삭이며
이제 길고 짧은 순례의, 기억의 끝
윤달이 허공에 누워있다
한 손으로 밤을 지우는 암흑처럼
불과 물과 울음을 잃어버린 그림자 윤달이
울다, 거울의 뒷면에서
어둠을 통과하는 가느다란 찰나에 의해
거울이 깨졌다,
둥그런 원 안에 얼굴만 남기고,
거미줄 방사의 금을 그리며.
먼 먼 곳에서,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들었던 모습대로.
깨진 경면을 들여다본다
뒷면의 어둠을 뒤적이고 만지작거린다
깊게 베인 검은 손바닥으로.
맨발로 걸어가는 차디찬 달들이 스쳐간다,
그의 낡은 보자기에 싼 태양을 짊어지고.
둥근 기억들이 무한히 메아리치는
오래전 그 곳에다
조각난 얼굴을 비벼댄다 눈먼 짐승처럼.
추석 꽃잠
허허 둥근 이 세상에서 죽음을 완성한 이들에게 머리 조아리려고 울긋불긋 음식을 보자기에 싸서 기차를 타고 강 건너 산 넘어 찾아간다 이름들이 새겨진 돌 앞에 제물들을 동서남북 늘어놓는다 위쪽으로 서너 칸만 건너뛰어도 이름의 얼굴은 생소하다 돌 속에 부끄러워 몸을 숨기고 그들의 시간에 엎드린다 이 지상에서 내 이름이 새겨진 데는 이곳밖에 없다 가슴이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연한 아지랑이 같은 짧은 시간 동안 꽃잠을 청한다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않고 가벼이 떠날 수 있겠어 하고 물었다 불행하게도 내 목에는 생선가시 같은 게 걸려있었다 아픈 데를 건드리며 목소리가 말했다 집이며 가족이며 책이며 앞마당 매화나무며 놔두고 갈 수 있겠어 사랑이나 원망 그리고 기억조차도… 암흑빛이 골목을 삼켰다 길옆에 버려진 백일홍꽃잎들 문을 닫아 잠그고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듯한 아련한 목소리는 위안과 혼돈과 예언을 섞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훅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얼른 윗도리 품속으로 검은 씨앗 하나를 숨기고 기어이 보름달 속으로 들어갔다
나비 연구
아침에 깨어나니 목줄기가 휘어져 구부러져있다
태양빛을 왜곡해 토해놓은 프리즘처럼
가만가만 꼬부라진 뼈마디를 펴본다 화살도 꽂혀있다
간밤에 누가 와서 목을 구부려 놓았는지
글쎄 시간이 뭣 때문에 내게 함정을 파게 되었는지
결국 ‘왜’에 대해선 알 수 없는 일
씨앗이 있기 전에 꽃의 생각이 먼저 있었듯
아득한 그 날 나의 첫 아침도 이러했지
밤의 시간은 무한으로 흘러가는 자유여행
나는 매일 밤 고치 껍질을 박차고 나와
흐믈거리는 엿처럼 구부렸다 다시 늘어나
거의 공룡시대 빙하시대까지 찾아가
포식자의 화살, 먼먼 사랑의 화석들을 뼈 광주리에 담아온다
아 그래 그게 뭔 말인지 안다고 말하지 말자
최초의 빛이 물에 닿을 때 몸채를 수그리고 꺾어지듯
척추마디마디 아침마다 아프게 구부리며
나비로 변신해가는 애벌레에 대해서는
2012 리포트
탁상 달력 속에 있었다
작은 네모 칸에는 낯선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매일 태양과 방문자들의 낯선 공격을 받으며
나는 외발이었다
숫자 6에서 7일로 가는 건 아득했다
낭떠러지도 많았다
달력의 모눈종이를 찢어볼까, 고개로
구멍을 뚫고 떨어져볼까 했다
마야의 예언자들이 숫자가 끝날 것을 말해 줬어도
바다 쪽으로 탈출해 갈 수 없었다
삼십일에 하루가 덤으로 있어도 소용 없었다
잠자던 방안은 오래된 오두막처럼 일그러지고
꼼짝없이 나는 굳어져 갔다 달력 안에서
먼먼 지평선에서 자지 않고 있는 등불이
어른거렸다
시작노트:
달의 시간
주수자
꿈에, 외발로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언어가 둥둥 떠다녔지만 심장엔 아무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몸은 얼음처럼 자꾸 얼어버렸다. 게다가 달력 속이었다. 모눈종이 네모 칸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서로 할퀴고 있었으므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기연민 땜에 두터운 외투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바스라지고 두 개의 신장이 아파왔다. 멀리서 달려오던 기차는 멈추지 않고 달력 위로 통과해버렸다.
기드 모파상처럼 열렬히 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밤의 시간이면 언어들이 방문한다. 잠이 들락말락한 아스라한 지점과 깰락말락한 이상한 경계에서 언어들이 흘끗 윙크하며 스쳐가고 날아오는 것을 느낀다. 밤의 커다란 치마폭에 담긴 검은 강물이 쏟아져 흘러오듯이. 마치 위층에 세 들어 사는 어떤 여자가 있어,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방문 당하는 것처럼.
잠옷을 입은 그 여자는 소란스러워 잠을 못 이루겠다며 한 움큼의 검은 쌀알을 내민다. 여자와 나는 삐꺽거리는 나무계단에 앉아 어둠 한 줌을 나누어 먹는다. 창문을 닫고 빛의 침입을 막으며,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불안한 심장으로 매일 밤의 뒷면을 뒤적이고 만지작거린다. 여자와 헤어질 때 문득 그녀가 왠지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詩作도 그러한 것 같다. 그녀가 쓰고 간 것인지, 내가 달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온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누가 필경사인지 헷갈린다. 여자인지, 저 둥그런 달인지 또는 언어 그 자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