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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서산,태안,홍성 답사
== 2018.10.23.(화요일)
* 마산박물관출발(06;30) – 보원사지 = 3시간 57분 / 321.7K
* 보원사지 – 용현리마애여래삼존불 = 9분 / 1.6k ⇒
11;00 ~ 11;40
* 용현리마애여래삼존불 – 개심사 23분 / 13.1k ** 강댕이미륵불
11;50 ~ 12;30 - 해미읍성 22분 / 14.8k
* 개심사 – 해미읍성 = 16분 / 8.8k
* 해미읍성 – 여숫골순교성지 = 2분 / 1.0k
13;00 ~ 점심식사(30) = 해미읍성전통주막 ~ 14;10
* 여숫골순교성지 –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 41분 / 32.4k
14;15 ~ 15;00
*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 안면해수욕장 = 42분 / 28.1k
15;45 ~ 16;15
* 안면해수욕장 – 꽃지(할미,할아비바위) = 10분 / 6.0k 380분/412.7k
17;00 ~ 17;20 ** 17: 30 = 꽃지도착 **
** 저녁식사 = 딴뚝식당 ** ** ** 숙박 = 알바트로스 펜션 **
== 2018.10.24.(수요일)
* 아침식사 = 딴뚝식당 * 꽃지출발(08;30) – 서산 간월암 = 36분 / 29.4k
* 간월암 – 만해생가 = 24분 / 19.5k
09;10 ~ 10;00
* 만해생가 – 백야생가 = 11분 / 6.8k
10;30 ~ 11;10
* 백야생가 – 홍주읍성 = 16분 / 12.5k ** 백야제
11;25 ~ 12;30
* 홍주읍성 – 조양문 = 1분 / 300m
12;50 ~ 점심식사(30) = 내 당 식 당 ~ 14;20
* 조양문 – 홍주의사총 = 3분 / 1.3k
14;25 ~ 14;35
* 홍주의사총 – 마산박물관 = 3시간 46분 / 308.5K 317분/378.1k
14;40 ~15;00 ** 19:00 = 박물관도착 **
2018-9 서상/태안/홍성 답사
== 서산시 ==
+ 1995년 1월 : 서산시, 서산군 통합(법률 제4774호)
+ 인구 ; 177,265명 [2018년 8월 31일 기준]
+ 행정구역 ; 1읍 9면 5동
*** 보원사지
시대 ; 백제 지정종목/번호 : 사적 제316호(1987.7.18.)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옛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다.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 보원사지 석조
시대 ; 통일신라시대~고려초기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2호(1963.1.28.)
보원사지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방형의 석조 안쪽과 위쪽만 정밀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친 다듬자국이 남아 있는데 혹시 땅에 붙여두고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 석조의 크기는 전체 길이 348cm(안쪽길이309cm) ,폭 175cm(안폭 137cm), 높이 65cm로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다.
** 보원사지 당간지주
시대 ; 통일신라시대~고려초기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3호(1962.12.21.)
지주의 형태는 4면에 넓은 홈을 얕게 파서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지주의 상단부 바깥 끝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거대한 크기에도 부드럽게 보이도록 조각하였으며 삼국시대 이래 기본 형식을 따른 작품이다.
** 보원사지 5층석탑
시대 ; 통일신라~고려초기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4호(1963.1.21.)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 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가 높이 솟아 있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탑
시대 ; 고려 경종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5호(1963.1.28.)
기단부가 땅속에 묻혔던 것을 1962년도에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8각형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하였으며 하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비
시대 ; 고려 경종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6호(1963.1.28.)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 [ 高 麗 時 代 鐵 造 如 來 坐 像]
시대 ; 고려/고려 전기
높이 257㎝, 무릎 너비 217㎝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은 보원사지에서 1918년 3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고, 반출 직후 경복궁 근정전(景 福 宮 勤 政 殿) 회랑에 봉안되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고려 때인 11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普 願 寺 法 印 國 師 寶 乘 塔 碑)에 950년(광종 1) 법인국사(法 印 國 師)가 발원해 석가 삼존 금상을 봉안한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조성하였던 본존불이라는 견해에 따라 조성 연대를 광종 원년인 95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다만 그때에는 금상(金 像)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철불에 금박을 입혔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아라메길
‘아라메’는 바다의 순우리말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 청정한 바다와 수려한 숲길을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시대 ; 백제후기 조성시기 : 서기 600년경
지정종목/번호 ; 국보 제84호 (1962.12.20.)
소재지 ;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크기 : 본존불 280cm, 미륵보살 166cm, 제화갈라 170cm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아름다운 미소를 뛰고있어요. 오랜세월 수풀에 파묻혀 잠들어 있다가 1958년에 발견되었고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빛의 각도에 따라 미소가 오묘하게 변하는데 아침 햇빛에 비취는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죠. 백제인만의 세련된 기술로 부드럽게 조각되었고, 80도로 기울어진 채 조각되어 있어 비 바람이 정면으
로 들이치지 않게 한 점은 과학적으로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 비로자나불
서산마애여래삼존불로 가는 길 한쪽에는 조용히 앉아 있는 석조비로자나불과 석등이 있었으나 2005년 3뤌 행방불명되고 현재는 석등 받침만 남아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 강댕이 미륵불
주소 ; 서산시 운산면 용현2리(아랫강댕이)
이 강댕이 미륵불은 현재의 고풍저수지 상단부 안에 있었던 것을 저수지로 축조하
면서 수몰되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 ~ 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216cm,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으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 개심사
시대 ; 백제 의자왕 지정번호 ; 전통사찰 제38호(1983.2.28.)
소재지 ;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는 운산면 신창리에 위치한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대웅전
시대 ; 조선 성종 지정종목/번호 ; 보물 143호 (1963.1.21.)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개심사 명부전
지정종목/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194호(1984년 05월 17일)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조선시대인 1889년(고종 26)에 죽포(竹 圃) 김설제(金 說 濟)가 작성한 개심사중창수리기에 1646년(인조 24)에 신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개심사 심검당[開 心 寺 尋 劍 堂]
지정종목/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358호(1997년 12월 23일)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때 혜감국사(慧 鑑 國 師)가 창건하여 개원사(開 元 寺)라 하였다. 1350년에 처능대사(處 能 大 師)가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1475년에 중창하였다. 그뒤 1740년의 중수를 거쳐 1955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 宇)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심검당, 무량수각, 안양루, 팔상전, 객실, 요사채 등이 있다.
** 개심사 제석·범천도·팔금강·사위보살도
시대 ; 조선시대
지정종목/번호 ; 보물 제1766호 (2012.04.25.)
크기 ;〈제석도〉 가로 83cm, 세로 161 cm
〈범천도〉 가로 84.8 cm, 세로 172 cm
14점 모두 종이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가장자리에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각 존상들을 화면에 꽉 차도록 1명씩 그려 넣었다.
각 그림 위쪽에는 존상의 명칭이 적혀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불교의식용 불화(제석도·범천도·팔금강도·사위보살도) 14점
** 개심사 영산회 괘불탱
시대 ; 조선 영조 지정종목/번호 ; 보물 1264호(1997.8.8.)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시대 ; 고려후기
지정종목/번호 ; 보물 제1619호(2009.10.20.)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서산 개심사의 아미타불상이다. 조성시기는 대략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일 것으로 보이며 이런 추정에 의해 국내의 현존하는 예배 대상 목조 불상 중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시대 ; 조선시대
지정종목/번호 ; 보물 제1765호(2012.04.25.)
개심사 오방오제위도와 사직사자도는 1676년에 화승 일호(一浩)가 단독으로 그린 것으로, 사찰에서 의식을 행할 때 도량장엄용으로 조성한 불화이다. 현존하는 도량장엄용 불화 가운데에서 조성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
*** 해미읍성
시대 : 조선 세종
지정종목/번호 : 사적 제116호 (1963.1.21.)
소재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성곽 총길이 1800m, 높이 5m, 면적 19만4천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 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 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이순신(李 舜 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 鍊 院 奉 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 南 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 軒)·어사(御 舍)·교련청(敎 鍊 廳)·작청(作 廳)·사령청(使 令 廳) 등의 관아(官 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 해미읍성 회화나무 + 호야나무
지정종목/번호 : 충남 기념물 제172호(2008.04.10.)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 . 이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海 美 邑 城 西 門-殉 敎 地]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
정분문(靜 氛 門)이라 불렸던 서산 해미읍성(瑞 山 海 美 邑 城)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 學 罪 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 여숫골 순교성지 [-殉 敎 聖 地]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 寅 迫 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無 名 生 埋 葬 殉 敎 者 墓]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
묘비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1935년 4월 20일, 해미에서 발굴하여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이곳 현 위치에 옮겨 모시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경갑룡[요셉]
**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海 美 邑 城 刑 場-]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의 돌다리.
서산 해미읍성(瑞 山 海 美 邑 城)의 서문 밖에는 성안에서부터 흐르는 개천이 있었고, 여기에 커다란 돌다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돌다리에는 ‘자리개돌’이라는 이름이 마치 고유 명사처럼 붙어 있다. 지나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던 평범한 돌다리가 참혹한 형구가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말 없는 무기물에 지나지 않는 돌덩이에 투영된 순교의 역사는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 삶과 신앙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이끌어 준다.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無 名 生 埋 葬 殉 敎 者 墓]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는 서산시 해미면의 해미성지 내에 있다.
해미천이 지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부와 조산리 일대는 천주교 박해기 천주교도들의 생매장 처형지로 알려져 왔다. 1935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는 상당수의 유골이 발견되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하여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천주교 당국에 의해 수습·보존되다가, 자신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현장에 다시 안장되어 있다.
** 해미 진둠벙 순교지[-殉 敎 址]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
진둠벙은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 방법의 하나인 익사 및 수장이 행해지던 곳으로, 해미순교성지(海 美 殉 敎 聖 地)의 주요 순교 터 가운데 하나이다.
== 태안군 ==
+ 인구 : 6만 3484명(2015년 현재)
+ 행정구역 ; 2개 읍, 6개 면, 186개 행정리(65개 법정리)
*** 태안 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종별 : 국보 307호(지정일2004.08.31.)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원이로 78-132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소재 백화산 정상부근의 바위에 새겨진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높이 向左佛 身高 255cm, 向右佛 身高 240cm, 중앙보살 181cm)은 1966년 2월28일 보물432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 2004. 8. 31 국보 제3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 안면송림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독개길 176 안면송림
하늘을 찌를듯이 곧게 자란 천혜의 적송 군락은 궁궐을 짓고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을 정도로 우수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 꽃지해변(할미·할아비바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산29-100
수려한 할미, 할아비 바위를 배경으로 붉은 태양이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빚어내는 황홀한 저녁놀 풍경은 서해안 최고의 낙조임에 틀림이 없다.
*** 서산 간월암
소재지 ;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1길 119-29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 홍성군 ==
+ 충절의 위인 배출지 – 최영,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홍주의병 등
+ 행정구역 ; 3읍 8면 150개 법정 + 인구 ; 101,192명 (2018.09.30.현재)
***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작성하였으며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주이며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萬)海입니다.
한용운 선생은 민족독립·불교유신·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節義의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저서로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1889~1930)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입니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입니다.
김좌진 장군은 1910년대 대표적인 국내 비밀결사 단체였던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된 이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918년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으며,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마침내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약 10일간 9차례 일본군을 격퇴하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 홍성 백야사 [洪 城 白 冶 祠]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사우(祠 宇)로 김좌진(金 佐 鎭) 장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사당은 1991년에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일대를 김좌진장군 생가지로 성역화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은 한식목조와가로 총 24.37평의 규모이다.
** 김좌진장군기념비
종별 ; 충남 문화재자료 167호(1984.05.17.)
주소 ;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7-4
김좌진(1889~1930) 장군은 홍성에서 태어나 15세에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농사지어 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 청산리 대첩 [靑 山 里 大 捷]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의 청산리에서 5만 명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 홍성 홍주읍성(홍주아문/여하정/안회당/조양문)
종별 ; 사적 231호 (지정일 1972.10.14.)
주소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을 짓고 경의문, 망화문과 관영을 경영하였다. 문종대에 이 성에 문이 4개가 있었으나 남문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조양문은 고종 7년(1870)에 한응필의 개수로부터 비롯되나 1955년 새로이 수축, 단장한 것이다.
** 홍주아문 [洪 州 衙 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아문.
지정종목 ; 사적 제231호(1972년 10월 14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성문
홍성 홍주읍성에 속한 아문으로,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다. 안회당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목조건물이다.
** 안회당 [洪 城 安 懷 堂]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 軒).
전체 22칸 규모의 목조와가(木 造 瓦 家)건물로 1678년(숙종 4)에 홍주군의 정사당(政 事 堂)으로 건립하였다.
** 여하정[洪 城 余 何 亭]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정각(亭 閣).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 軒)으로 사용된 안회당(安 懷 堂)의 뒤뜰에 있다.
1896년(고종 33)에 홍주목사 이승우(李 勝 宇)가 건립하였다.
** 홍주성역사관
홍주성역사관은 홍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전통을 계승하며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자 조성되었습니다.
지역의 전통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역사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인 시설로 구성되었습니다.
** 조양문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홍성읍)
문화재지정 ; 사적 제231호(1972.10.14 지정)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 홍주의사총
문화재지정 : 국가사적 제431호(2001.8.17.지정)
면적 : 40,166㎡ 시설물 : 분묘 1기, 창의문, 창의사, 진충문
대한제국 시기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중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입니다.
<인터넷자료 편집>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