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교시 : 오리엔테이션 - 장소 :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층 (212호) * 경향신문사(전 문화방송국) 남쪽 옆 - 서대문역(5호선) 5번 출구 이용 (5분) - 시청역(1, 2호선) 1번, 12번 출구 이용 (10분)
* 2교시 : 경희궁 터와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시회 관람 |
◈ 경희궁 관람
◇ 경희궁 : 종로구 새문안로 45(사적 제271호)
- 광해군이 왕기설(王氣說)을 누르기 위해 세운 궁궐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광해군 9)에 지은 궁궐이다.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서 길지(吉地)에 새 궁을 세우려고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세웠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 : 인조의 아버지, 원종으로 추존됨)의 옛집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술사(術士) 김일용(金馹龍)의 말을 듣고 나서 그 자리에 궁궐을 세우고, 경덕궁(慶德宮)이라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왕기설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개입되어 있었다. 『궁궐지(宮闕志)』 기록에 의하면 경희궁은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는데, 정전과 동궁, 침전, 별당 등 1,500여 칸에 달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궐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仁祖)이다. 경덕궁의 창건은 1617년에 시작되어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되었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에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경덕궁 이름은 영조 때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종의 시호에 ‘경덕’이 들어가 있어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정문인 흥화문 앞쪽에 야주개[夜照峴]로 불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어 ‘야주개 대궐’로 부르기도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후에도 경희궁에는 조선후기의 왕들이 다수 거처했고, 경종과 정조, 헌종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을 경희궁의 동궁인 존현각(尊賢閣)에서 주로 보냈다.
이 기간에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범인은 홍상범의 사주를 받은 강용휘, 전흥문 등임이 밝혀졌는데,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2014년에 개봉한 영화 〈역린(逆鱗)〉이었다.
정조는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면서 왕위를 계승할 신분이 되자,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혜경궁 홍씨의 적극적인 권유가 이뤄졌는데, 혜경궁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만남을 미리 주선한 것이다.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경희궁에서 생활했는데, 경희궁에서 암살 시도가 자주 일어나자 1777년 8월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서울 도성 안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를 맞이하기 위해 독특하게 동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건물은 남향하고 있었다.
1624년(인조 2)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인조는 종묘에 나아가 신주를 봉안하고 돌아와서는 경덕궁에서 순직자의 직위를 추증하고 순절 자에는 정표(旌表)를 내렸다.
1627년(인조 5)에는 후금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했다.
현종은 재임 기간을 주로 경희궁에서 보냈으며,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회상전에서 탄생했다.
재위 46년 동안 창덕궁과 경희궁에 번갈아 거처한 숙종은 경희궁과 가장 큰 인연을 맺었는데, 1680년(숙종 6)에는 인경왕후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 창덕궁, 창경궁에 있던 숙종은 1717년(숙종 43) 왕세자(경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경희궁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1719년에 보령 60세의 헌수 하례를 숭정전에서 받았다.
숙종이 승하한 곳도 경희궁이었다. 1720년(숙종 46) 6월 숙종은 융복전에서 승하했고, 경종은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경종은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왕이 됐다.
1829년(순조 29) 10월 경희궁은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화재가 발생했다. 왕의 침전인 융복전, 왕비의 침전 회상전(會祥殿), 편전 흥정당(興政堂), 사현합(思賢閤), 월랑(月廊) 등의 건물이 화재의 피해를 입었다.
순조는 경희궁의 대규모 화재 이후 복원 사업을 지휘했고, 1832년 4월 경희궁 복원 공사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완성했다.
당시 화재를 당한 건물들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서 현재의 경희궁 복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순조는 1832년 7월 새로 중건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834년 11월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헌종은 1834년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진 후 경현당 등에서 업무를 보다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철종은 1859년(철종 10) 9월 26일에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61년 4월 12일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했다. 철종의 환어로, 왕이 거처하는 궁궐로서의 경희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경희궁은 광해군의 명령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한 후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東闕)'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경희궁의 규모는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경희궁은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이 중건된 후로는 궁궐로 쓰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1907년 경희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에 경희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고, 거의 모든 건물이 헐렸다. 일부는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궁궐의 영역도 도로와 주택지로 많은 부분이 잘려나갔다.
그 결과 현재 궁궐 모양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경희궁 터로만 남아 있으며, 숭정전 등 몇몇 건물만이 복원되어 있다.
경희궁의 건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은 정전인 숭정전과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에 일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정문 흥화문은 신라호텔 영빈관 문으로 쓰이다가 최근에 옮겨 왔으나 예전과는 다른 자리에 남향하여 서 있다.
한편 1980년 6월, 서울시는 경희궁 내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현대건설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바로 경희궁 터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가장 많이 파괴된 궁궐이다. 이는 흥선대원군 집권 시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 흥화문 안 내전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시는 2024년 7월 17일, 2026년에 경희궁 일대에 서울광장 10배에 달하는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경희궁 주변 한양도성과 돈의문을 복원해 역사성을 살리고, 녹지를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경희궁 내에 궁궐 숲을 조성하고, ‘왕의 정원’을 연출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