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 케이불 카 트래킹 -효도 관광 힐링 트래킹-
-제8화 악마가 사랑한 세체다 (Seceda)
2025년 7월 25일
구름 낀 아침, 그래도 떠나는 설렘
어제의 여정이 몸에 남긴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새로운 하루를 맞는 설렘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조금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걷기로. 호텔을 나선 시각은 오전 9시. 오르티세이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돌로미티의
봉우리들이 구름 속에 반쯤 숨어 있었다. 오늘도 날씨가 마음을 졸이게 한다.
하지만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
그 불확실성 속에서 마주하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묘미가 아닐까.
하늘로 오르는 시간
Funivie Seceda, 세체다로 향하는 케이블카 승강장에 도착했다. 9시 30분 우리는 하늘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케이블카는 15분간 Furnes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고도를 높여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변해갔다. 마을은 점점 작아지고,
산들은 점점 더 크고 웅장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케이블카로 갈아 타고 5분을 더 오르니,
드디어 세체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체다, 건조한 대지 위의 경이로움
'세체다(Seceda)'란 이름은 '건조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경사진 초원이 워낙 가파르고
급해서 항상 민낯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케이블카에서 내려 2,518m의
정상에 서니 그 의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3,000m급 거인들의 행렬이었다.
오른쪽 끝으로 사쏘롱고(Sassolungo)와 사쏘 피아토가 구름에 반쯤 가려진 채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완전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위용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했다.
어제 다녀온 알페디시우시도 저 멀리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인사를 건넸다.
중앙에는 셀라(Sella) 산군과 오들레(Odle Peaks) 산군이 마치 대자연의 대성당처럼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회색빛 암석과 초록빛 초원이 만들어내는 색의 대비는 신이
직접 붓을 들어 그린 수채화 같았다.
그리고 왼쪽 끝,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보였다. 악마조차 사랑에 빠졌다는
그 봉우리. 세체다의 상징과도 같은 뾰족한 능선 뒤로 2,984m의 페르체다(Furcebetta)가
그리고 그 너머 3,025m의 사쓰 리기아스(Sass Rigais)가 산 마루금을 따라 하늘을 찌를
듯 이어졌다. 그 능선을 넘어가면 오들레 산군의 장관이 펼쳐진다고 한다.
'이것이 신이 만든 걸작이구나.'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십자가가 품은 기도
세체다의 최고 정상 언덕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고도 청량한 고산의 바람. 십자가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통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예수님이,
이곳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이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계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 웅장한 자연 앞에서,
그리고 이 고요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그저 작고 겸손한 존재일 뿐이었다.
안개 속에 숨은 악마의 얼굴
칼로 자른 듯 날카로운 세체다의 봉우리들. 악마마저도 사랑에 빠졌다는 그 풍경을
온전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개가 끈질기게 전망을 가렸다. 기다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바람이 안개를 걷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연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구글 지도에서 빌려온 맑은 날의 세체다 사진을 보며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저 안개 너머에 얼마나 경이로운 풍경이 숨어 있을지. 언젠가 다시 올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여행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을 때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법이니까.
오늘의 여정, 그리고 변화하는 계획
오늘의 트레킹 계획은 이랬다.
세체다 출발 → Troier 산장(2) → 피에랄 롱기아(Pieralongia)(3) → Firenze 대피소(4) →
콜 라이저 케이블카(5) → 케이블카로 산타 카타리나 마을 하산 → 버스로 오르티세이 복귀 →
주차장에서 차량 픽업 → 호텔 귀환.
총 6km, 약 2시간 30분의 트레킹. 초보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코스이다
초원 위의 평화로운 시간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거대한 산들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마치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은 초원 평원을 마음껏 즐겼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새어 들어올 때마다 초원이
반짝이며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공기는 맑고 투명했다. 한 모금 들이마실 때마다 폐
깊숙한 곳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바로 앙상블(ensemble)의 행복이구나. 햇살과 공기, 초원과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교향곡. 우리는 그 속에서 한없이 작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부가 되어 있었다. 10시 50분, 우리는 트레킹을 시작했다.
들꽃의 향연
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색이 고운 수염달린 초롱꽃(Bearded Bellflower)이었다.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도 평화로웠다. 목에 단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딸랑, 딸랑. 그 소리가 이 고요한 초원에 더욱 깊은 평온을 더해주었다
보라빛과 푸른빛이 섞인 종 모양의 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는 모습은 마치 작은
요정들이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반겼다.
변덕스러운 날씨, 그리고 첫 빗방울
하지만 돌로미티의 날씨는 여자의 마음보다 더 변덕스럽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구름이 급격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바람의 기운이 달라졌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분위기.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제도 날씨 때문에 멋진 전경을 놓쳤는데, 오늘도 이러면 어쩌나...'
마음 한편이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이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비가 오는 날에만 느낄 수 있는 또다른 풍경도 분명 있을 테니
Troier 산장에서의 잠깐의 휴식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우리는 Troier 산장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산장 안의 공기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초원을 흠뻑 적시고
있었지만, 이곳은 아늑하고 포근했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완전 무장을 준비했다. 레인 재킷, 방수 바지, 배낭 커버까지.
이제 비가 와도 걱정없다.
신기하게도 완전 무장을 끝내고 나니 빗줄기가 더 세어졌다. 자연이 우리를 시험하는 걸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중 트레킹을 결심했다.
계획의 변경, 안전이 최우선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길은 점점 미끄러워졌다. 돌로미티의 날씨는 산에서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또다시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원래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2부 능선에 있는 피에랄 롱기아(Pieralongia)를 거쳐 가는
코스였지만 이를 포기하고 더 빠르고 안전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Malga Odles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계속 비를 맞으며 조심스럽게 흙탕길을 내려왔다.
비 속의 트레킹, 그래도 아름다운
다행히 세체다에서 콜 라이저(Col Raiser) 케이블카까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초보자라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코스였다. 미끄러운 길만 조심한다면
빗속에서도 저 멀리 앞쪽으로는 내일 트레킹할 3,200m의 사쏘롱고 산군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신비로운 환영을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비는 가랑비처럼 가볍게 내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
조금만 조심하면 트레킹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1시간을 넘게 걸어 내려오는 동안 나는 위대한 대지의 경이로움에 계속 감탄했다.
태초부터 만들어진 이 대지 위에서 자비롭고 아름다운 풀들, 나무들, 돌들은 각자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응하며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어떤 풀도 "나는 왜 여기 있어야 하지?"라고 묻지 않았다. 어떤 돌도 "나는 왜 이렇게 생겼지?"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주어진 자리에서 존재하며 전체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순수함이 위대로워 보였다.인간은 자꾸 이유를 묻고, 목적을 찾고, 더 나은 것을 바라지만,
자연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완벽했다.
오들레 농장, 그리고 하산
12시 30분, 드디어 오들레(Odle) 농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5분만 더 내려가면 콜 라이저 케이블카 승강장이었다. 비에 젖은 몸이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우리는 바로 Alm Hotel, Col Raiser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2시 50분, Col Raiser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산타 카타리나 마을로 내려왔다.
케이블카 안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우리가 걸어온 초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 때문에 3시간 반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세체다의 초원에서 충분히 힐링했다.
케이블카의 역사
이 케이블카는 1963년에 건설되어 1988년 현대식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20년마다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2008년에 큰 수리를 완료했고 2028년에
또 한 번의 보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의 아름다움
케이블카 정류장에 내리니 버스가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르티세이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산타 크리스티나
(St. Cristina) 마을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꽃들이 탐스럽게 걸려 있는 베란다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창문들. 알프스 전통
양식의 목조 건물들.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매일 이런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정말 부러웠다.
오르티세이 성 안토니오 광장
버스 종점은 오르티세이의 S. Antonio 광장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차했다.
아들 동현이가 혼자 택시를 타고 오르티세이 케이블카 승강장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가져오기로 했다. 그동안 우리는 광장 주위를 천천히 구경했다.
성 안토니오 교회의 소박한 아름다움
광장 한쪽에 자리한 성 안토니오 교회(Chiestta Sant' Antonio)가 눈에 들어왔다.
1673년 로마네스코 양식으로 건축된 이 교회는 성인 안토니오에게 봉헌된 곳이었다.
오르티세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작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졌다.
정문 위에는 성 안토니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교회는 아담했지만 여섯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특색 있고 아름다웠다.
햇살이 그 창문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색의 향연이 경건함을 더해주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했다. 밖의 번잡함과는 달리 안은 깊은 평온으로 가득했다. 29m 높이의
양파 모양 종탑에는 세 개의 종이 있다고 했다.
주제단은 1850년 파올 폰 데슈반텐의 작품으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묘사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단 오른쪽과 왼쪽에는 성 루프레히트와 성 우달리히를 묘사한 조각상이 서 있었다.
바로크 양식의 설교단 아래 벽에는 네 명의 복음서 저자 조각상도 보였다.
중세의 그림 같은 마을
교회를 나와 다시 마을을 둘러보았다.
오르티세이가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의 집들은 마치 중세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을 자아냈다.
우리들의 호텔이 있는 Val Gardena 마을도 뒷산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알프스의 산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자연이 인간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의 만찬
렌트카를 픽업한 우리는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와 샤워와 휴식을 취했다.
오늘 저녁은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에 있는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
'라 탐부라(Steakhouse LA TAMBRA)'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주인이 직접 몇 개의 체인점을 운영하는 유명한 곳이라더니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만석이었다.
이색적인 와인 서빙
주문을 마치고 현지산 포도주 한 병을 시켰다.
그런데 주인이 직접 나와 와인 서빙을 했는데 그 방식이 독특했다. 와인 잔을 종이에
문질러 약간의 열기를 더한 후 와인을 따라주었다. 와인의 향과 맛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처음 보는 서빙 방식이었지만 그만큼 와인에 대한 정성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티본 스테이크의 완벽한 맛
그리고 드디어 메인 요리, 티본 스테이크가 나왔다.잘 손질된 스테이크가 먹기 편하게
도마 위에 담겨 나왔다. 야채와 함께 곁들여져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점심을 샌드위치로 간단히 때웠던 터라 배는 이미 허기져 있었다.
첫 입을 베어 물었을 때의 그 감칠맛이라니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며 미각을 깨웠다.
완벽하게 익은 고기의 부드러움과 겉면의 바삭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와인 한 잔과 함께 즐기는 스테이크.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몸은 피곤했지만 미각은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가성비 좋은 저녁
와인 한 병을 포함한 3명의 저녁 식사 비용은 280유로. 이 정도 퀄리티를 생각하면 상당히
가성비가 좋은 식당이었다. 배도 부르고 마음도 만족스러웠다.
호텔로 돌아와 포근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곤한 몸이 침대에 닿는 순간 스르르 잠이 들어왔다.
오늘도 잘 보냈다는 만족감과 함께.
오늘의 트레킹 정리
원래 계획:1234567
세체다 → Troier 산장 → 피에랄 롱기아(Pieralongia) → Firenze 대피소 → 콜 라이저 케이블카
변경된 실제 코스: 1237
세체다 → Troier 산장 → Malga Odles 산장 → 콜 라이저 케이블카 →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
비로 인해 안전을 위해 코스를 단축했지만 그래도 세체다에서 3시간 이상을 보내며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참고: 푸른색으로 표시된 트레킹 루트는 콜 라이저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하산하는 코스다.
총 거리: 6km 소요 시간: 3.5시간 난이도: 하
코스: 콜 라이저 케이블카 → 페르메다 → 홀리 레이크 → 감스블루트 산장 →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
여운
이것으로 악마가 사랑한 초원 '세체다'를 마음껏 즐겼다.비가 와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 비 오는 날의 세체다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으니까. 안개 속에 숨은 봉우리들은 더 신비롭게 느껴졌고 비에 젖은 초원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순간 이곳에 있었다는 것.
이 자연 속에서 숨 쉬고, 걷고, 느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가치 있는 하루였다.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