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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른 만경강 물길 가운데 삼각주처럼 형성된 땅에 시민들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지만, 여기도 사람 흔적은 볼 수 없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대수로의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목상(木上)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걸려 있습니다. 목천포 위(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겠지요.
다리 건너 마을 안을 들여다봅니다. 가로수나 동구나무로 플라타너스를 심은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인 듯, 거대한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수관부(樹冠部)는 잘려 나간 채 마을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느티나무를 베고 플라타너스를 심게 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요?
꽤 잘 관리하고 있는 집은 한 집 정도인 것 같고 나머지는 역시 삭아가는 마을입니다.
동자교 부근에 이르자 대수로는 또 한 번 오른쪽으로 직각 전환, 북서쪽을 향합니다.
목천삼거리가 가깝고 이리남초등학교가 보이는 이 언저리가 원래의 목천포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이제 정말 뙤약볕 길이 이어집니다.
이 일대는 낡은 수로 옹벽이나 수문을 새로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걷기가 더욱 힘듭니다.
- 동자교 ~ 농산물 도매시장 -
키 큰 메타세쿼이어로 둘러싸인 익산시 농산물시장 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곳에서 점심을 먹을 작정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한 「수문의 사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소수로(小水路) 물길의 사거리 모서리를 모두 곡선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직선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근대공법」에 이런 낭만도 있었네요!
이렇게 예쁜 수문 보신 적 있습니까?
낡아서 다시 짓는 일이 있더라도 이 모양만은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듭니다.
- 농산물 시장 -
농산물시장 안의 「함바」 아주머니는 인심이 좋습니다.
(아! 참고로, ‘함바’는 일본말입니다. ‘飯場’이라 쓰고 ‘함바’라 읽습니다. ‘밥 먹는 곳’이라는 단순한 뜻이지요. 우리말로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구내식당’?)
시장 입구에 「한식뷔페 5천원」이라고 쓴 안내판을 보고 들어왔는데 막상 1만 원짜리를 내니 4천원밖에 거슬러 주지 않습니다. 왜 6천원을 받느냐고 했더니, 오늘부터 올랐다는 거예요! 저기 벽에 써 붙인 걸 보라면서. 하필 5월 6일 오늘부터 ‘재료값 상승으로’ 1천원을 더 받겠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 대신 더 맛있게 모시겠다나요.
나는 바깥의 간판을 보고 들어왔노라고 한 즉, “아차, 거기를 고쳐놓지 않았구나…” 혼잣소리를 하며 잠깐 고민하더니, 계란 프라이 하나를 서비스로 주겠다고 합니다.
내친 김에 농담을 더 해봅니다. “프라이 말고, 계란말이 해 줘요.”
아주머니는 “계란말이는 시간이 많이 걸린게… 반숙으로 해 드리까?”
나는 일부러 계란말이를 고집합니다.
그러면서 음식을 내 접시에 퍼 담아 식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만, 아무리 기다려도 서비스로 주겠다는 프라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거의 다 먹었을 무렵까지도 안 나옵니다. 쑥국이 맛있어서 좀 더 먹으려고 찬장(뷔페, buffet)에 다가가서 “왜 프라이는 안 주시오?” 항의 했더니,
“여기다 해 놨는데 안 가져 가시길래 계란말이가 아니면 안 잡숫는 줄 알고 딴 사람 줬어요.”
“그래요… 나 대신 딴 사람이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요.”
그렇게 슬쩍 물러서며 쑥국 대접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더니,
잠깐 사이에 프라이를 담은 작은 접시를 가지고 왔네요.
“밥 다 먹었는데 뭘 또 일부러…”
아주머니의 마음씀이 고맙습니다. 다 먹었습니다.
옆 식탁에는 농산물을 출하하려고 나온 농사꾼,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운수업 하는 사람…들이 북적이며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나는 그 틈에 끼이지 못하므로(‘핵인싸’는커녕) 그런 연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너무나 심심하니까요.
- 오산면, 목천교차로, 오산천 크로스 -
식당을 나와 또 길을 걷습니다. 곧 오산천과 교차하는 지점을 만나게 되는데, 그 앞에 농어촌공사 사무실이 있어 들릅니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생각에서요.
그런데, 아, 이 공간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이 어린이날 대체휴일이어서가 아니라, 벌써 몇 년 째 비어있다는 느낌이 확 옵니다. 정문은 체인으로 잠겨 있고 정원에도 잡초가 그득합니다.
어마어마한 부지와 어마어마한 건물을 이렇게 놀리고 있다니요!
안내판에는 “63억여 원을 들여 전북농지개량조합이 지었다”는 말이 쓰여 있고 “그 재원을 조달하는 데 농지수용보상금이 들어갔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할 말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농어촌공사일까… 농민들에게서 땅 빼앗은 보상금으로 건물 짓고, 지어놓은 건물은 쓰지도 않고 있고…
전북농지개량조합은 또 뭘까? 농어촌공사에 건물 지어 기부나 하는 조직인가? 일제 때의 수탈조직 「수리조합」과 다른 점은 뭘까…
섣부른 판단은 물론 금물이지만 우선 얼른 드는 생각이 그러합니다.
농어촌공사가 이 지점에 있는 것은 곧 나타날 「오산천 크로스」의 하저 터널을 관리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그 관리에 이렇게 거대한 시설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나중에야 든 것일까요?
목천교차로는 23번 국도(남-북)와 번영로(동-서)가 교차하고, 물길은 오산천(남-북)과 대수로(동-서)가 겹쳐 지나는 복잡한 곳입니다. 교차로의 남쪽에는 부농마을이 있습니다.
잠행하는 수로의 현장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오산천을 좀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목천면이 끝나고 오산면에 들어선 것이군요. 북쪽 상류로 올라가봅니다. 며칠 전에 지나온 오산리와는 한자가 서로 다릅니다. 오산리는 梧山, 오산면은 五山.
오산천은 만만치 않게 큰 하천입니다. 자연하천이지만 이만큼 긴 직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인공을 가미한 흔적이지요. 둑을 시멘트로 굳히지 않은 것은 이 개울도 폐수처리용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오래된 다리 하나를 보고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옵니다.
「오산천 크로스」는 교차로가 넓은 만큼 중간 저수조(?)인지 워터 슬라이드 구간(?)인지 큰 것이 두 개나 있어 위용을 자랑합니다. 매우 큰 낙차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물이 건너가고 있어야 하는데 움직임이 없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리를 건너가 반대쪽(하류)에서 수구를 들여다보아도 물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한 농기계 수리업체가 차지하고 있는 둑길 부지.
돌아보니 워터 슬라이드(?) 위에 돌판이 붙어 있습니다.
‘養國本(양국본)’이라. 나라의 대본(농업)을 양성한다.
비교적 얌전한 글씨의 소유자인 이 사람은… 어렵사리 ‘아리가(有賀)’라는 성을 쓰는, 이름은 ‘光○’라고만 읽혔습니다. 직책 표시는 없습니다. 이 터널 수로는 타이쇼오 10년(1921년)에 완공되었다고 쓰였네요.
목천교차로를 넘어간 곳에 대수로 잠관의 진짜 출구가 있습니다.
이곳은 ‘흙가든’이라는 식당이 둑길을 온통 차지한 채 영업도 하고 농사도 짓고 있네요.
하류 쪽 수구 윗부분에서 돌판을 또 발견했습니다.
‘五山里川潛管(오산리천 잠관).’
‘잠관’은 터널 도수관이라는 뜻이고, ‘오산리천’은 오산천을 말합니다. 1백 년 전에는 그렇게 불렀군요. 글을 쓴 사람은 조금 아까 본 돌판의 그 사람입니다.
터널의 입구와 출구 모두에 휘호가 있는 것은 그만큼 크고 중요한 크로스라는 뜻이겠지요.
대수로의 물은 거꾸로 흐르는 것으로 보일 만큼 고요하고 물이 가득 차 있군요. 어쩐지, 상류에서부터 물이 거의 정지되어 있다 했습니다.
식당의 젊은이에게 “이 물이 흐르고 있느냐” 물은 즉, 지금은 출구 쪽에서 퍼올리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입니다.
- 남전리, 전군가도, 삼길천 잠관 -
목천삼거리에서부터 대수로는 이미 「전군가도」(26번 국도, 번영로)와 이웃하여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대수로의 남쪽은 남전리입니다.
이곳도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지만 웬일인지 중수로는 거의 황폐하게 버려져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로 위에 비닐하우스 용 파이프를 쳐서 그늘막을 올리는 뼈대로 삼기도 해놓았습니다. 그 그늘 아래에서 물놀이라도 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가만 보니 김제시의 공업용수도로 쓰인다는 팻말이 보입니다.
(찌그러지고...)
(...부서진 중수로의 수문들.)
(사진 위, 아래 : 전군가도.)
농사짓는 둑길이 걷기 불편하여 전군가도로 빠져나와 걸어봅니다만, 이 길도 보행자에게 친절한 길은 아닙니다. 보행자 도로가 따로 있지 않고, 가드레일이 높게 쳐져 있는데다 이쪽도 불법점유 농사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약간의 그늘을 던져주는 벚나무 가로수는 고맙지만요. 벚꽃철에는 이 길도 인기 있는 길이라 들었습니다.
곧게만 뻗은 길을 터벅터벅 걸으려니 점점 꾀가 납니다. 특별한 풍경이 나타나지도 않고 변화 없는 직선도로. 대수로에도 한동안 변화가 없습니다. 점점 하류로 갈수록 그럴 것이라는 예측이 들자, 버스를 타고 쉽게 이동해버릴까? 라는 잔꾀가 머리를 쳐듭니다.
‘까미노 델 산띠아고’ 같은 8백 킬로미터의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이런 유혹에 시달리겠지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사도를 허용하면 안 돼!”라고 자신을 다그칩니다.
마침, 「아름다운 순례길」도 이 구간에서 가끔 안내판이 보입니다. 미륵사터까지 가는 길일까요?
야동마을을 지나치고, 금몽마을을 들러 봅니다.
폐허나 다름없는 마을인데 경로당은 깔끔하게 지었군요. 이용하는 주민은 몇이나 있을지.
금몽마을을 빠져 나오면서 ‘타임 슬립’이라도 한 것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일본식으로 2층으로 지은, 나중에 시멘트로 발라 보강한 것 같은 집이 동네 어귀에 있습니다. 아주 좁은 시멘트 다리를 건너 좁은 골목을 들어가야 통하는 집.
과연, 이 지역을 되살릴 방법은 있는 걸까요?
마을을 나와 7백미터를 더 걸어간 곳에 신석마을이 있습니다. 번영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군가도」를 만들 때에는 마을이 두 조각 나든 말든 마을 가운데를 뚫고 지나갔지만, 수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마을을 비껴 굽이쳐 흐르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은 매우 큰 마을이었군요. 교회도 두 군데나 있고 원불교 교당도 있습니다.
마을입구 모정에서 내려다본 들판에는 익어가는 보리밭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칩니다.
북쪽 신석마을은 남쪽의 원신석보다 조금 현대적이랄까요, 열매교회라는 교회와 옆에 붙은 까페와, 보건진료소 등으로 활기가 있어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비디오’ 가게도 있어요! 이미 문 닫은 지 오래지만.
마을 안길에는 70년대식 삼각지붕의 ‘표준농가주택’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신석을 하직하고 다시 본류로 돌아옵니다.
- 삼길천 크로스 -
250미터 쯤의 곳에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크로스를 또 하나 만나게 됩니다.
물이 잠행(潛行)하기 시작하는 곳 다리 위에 한 사나이가 낚시를 드리우고 섰습니다.
물이 콸콸 빠져 내려가는 모습이 거품으로만 보입니다.
터널 입구에 붙은 돌판에 ‘維水泱泱(유수앙앙)’이라 썼습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깊고도 깊도다.
글 쓴 이는 ‘하라 시즈오[原靜雄]’라는 왜인이고 직책은 미상입니다.
반대편에서는 수중모터로 빨아 당기는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옵니다.
터널 출구 위에도 돌판이 붙어 있으되, ‘三吉川潛管(삼길천잠관)’이라 썼군요.
(사진 위 : 출처불명의 이름, 삼길천.)
그렇다면 이 자연하천은 ‘삼길천’이라는 뜻인데…
1백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의 다리 이름이 ‘삼길교’인 것 외에는 이 하천이 삼길천이라는 어떤 힌트도 없습니다.
마침 수구마다 물깊이를 재며 다니는 농어촌공사 직원(?)이 있어 이 하천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 역시 잘 모르겠다고 하네요.
언뜻 드는 생각.
‘三吉(미요시)’은 일본에서 자주 본 인명·지명입니다. 당시 지배하던 왜인들이 이름 없는 개울에 (또는 있어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익숙한 「미요시가와[三吉川]」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것은 아닐까…
- 일정 마무리 -
이제 오늘의 두 번째 핵심 눈대목 「탑천 크로스」까지 1.5킬로미터.
작정하고 걸으면 이십 분이면 도달할 거리지만, 에너지가 바닥났습니다. 거기까지 갔다 오면 귀가시간도 너무나 저물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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