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라본 시편 23편은 저자인 필립 켈러에게 시간과 공간의 흐름과 이동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봄에 베이스 캠프인 목장을 떠나 한 여름의 산 정상에 이르렀다가 가을에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는 여정, 그리고 다가올 겨울은 다시 베이스 캠프인 목장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피한다는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통과하게 되고 산 정상의 기름진 꼴도 먹게 되는 것들을 목자였던 다윗이 목동의 용어로 이 시를 썼다. 그래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해충과 기생충 예방을 위한 조치이며,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차려주시는 것'은 이리나 표범같은 위해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꼭대기(저자는 이 의미를 위해 영어의 테이블 대신 스페인어의 메사를 설명한다)의 기름진 풀을 양떼가 뜯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6절의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겨울에 베이스 캠프인 목장으로 돌아와 지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집'은 목장을, '영원히'는 겨울 내내를 가리킨다(WBC 어휘 설명 참조).
목동이었던 다윗은 일년을 주기로 양떼를 이끌고 봄, 여름, 가을 동안 양을 먹이러 먼 여정을 떠나곤 했다. 그는 시편 23편을 통해 2~3절은 봄을, 4~5절은 여름을, 그리고 마지막 6절은 가을과 다가올 겨울의 계획을 묘사했다. 1절은 양과 목자의 관계와 소유권을 설명한다. 그리고 화자를 목자가 아닌 양으로 설정하고 시를 썼다. 여기서 양은 다윗 자신으로, 목자는 여호와로 치환되었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자신의 양을 위해 수고와 노력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다윗을 위해 모든 수고와 보호를 아끼지 않으신다. 양들이 자신에게 느끼는 신뢰와 공감을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신뢰와 의탁으로 비유한다. 자신이 양들에게 좋은 목자가 되려고 애쓰는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수고와 고통, 그리고 사랑과 은혜로 오버랩 된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는 표현은 이미 다윗이 필립 켈러가 말하는 양과 목자의 한 몸 됨을 느끼고 있음을 알려준다(행 4:25).
아마 다윗은 가을 산에서 하산을 앞두고 있는 듯하다(6절). 이제 목장의 베이스 캠프로 내려가면 그는 겨울의 긴 날들 동안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때는 쉼이 있고 재충전이 있고 보고 싶었던 가족과 친지들과의 재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목장에서 길게 거하는 것은 한해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다. 돌이켜보면 이 한해 하나님은 자신과 양들을 지켜주셨다. 그리고 새 봄 또 새로운 양떼 몰이가 시작될 것이다. 당연히 너무나 당연하게 하나님은 새롭게 나와 양떼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이 인도와 보호는 다윗의 평생에 영원할 것이다.
다윗은 이 시를 쓰면서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양떼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쓴 것이 아니기에 과장도 꾸밈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심 그 자체를 아름다운 시어로 엮어놓았다. 이제 다윗의 한해는 그의 평생이 된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 (토브[ṭôb])과 인자하심 (헤세드[ḥesed])은 모든 성도들을 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가운데 성육하신다. 하나님 신앙은 더 이상 삶과 동떨어진 철학이나 개념뿐인 추상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함께 숨쉬고 역동하며 동행하는 하나님이시다. 역사가 될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한 고단한 삶의 인도자요 보호자인 주님이시다. 이것을 가리켜 실존이라 해도 좋고 삶의 자리라고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 평생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시편 23편에서 저자인 필립 켈러가 느끼고 묵상한 내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