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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념, 역사적 실존의 주관성 상대주의 관념론에 대한 소고
지은이: 본 카페지기 이재원
내가 비록 철학이 절대 빈곤한 부산(釜山)이란 시골 촌(村)의 조그마한 무명 철학도(哲學徒)이라도 헤겔의 변증동일철학의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헤겔의 변증동일철학은 그 유혹이 너무나 심대해서 쇼펜하우어의 급이 아니면, 계급과 계층 불문하고 독해만 가능하면 모조리 다 넘어간다. 마치 남극의 거대한 빙곡(氷谷)의 얼음미인이 비너스의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황금털이 뽀송한 국부만 오른손으로 가린 채로 온기가 돌아 보이는 따스한 침상(寢牀)에 버스더미 누워서 백사의 성긴 천으로 몸을 덮고 왼손과 온몸으로 희미한 횃불 아래에서 연한 알비노의 푸른 분홍빛 광채를 은은히 뿜으면서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극진고통의 지옥의 직행 문이다. 들어가는 순간 평생 헤겔의 난쟁이 종복이 되어 그의 말씀만을 노트에 받아쓰다가 스스로 지쳐 종명하게끔 설계가 되어 있다.
나의 경험상 인간과 인류를 위한 자체의 최고의 덕목은 무조건 ‘자유’라고 본다. 자유에는 3가지의 맥들이 나란히 있다. 실제질량의 문명적인 정치적 자유와 현장경험의 문화적인 경제적 자유와 작가허구의 문학적인 철학적 자유이다. 자유에는 가톨릭적 자유와 캘빈적인 자유와 루터적인 자유가 있다. 보수적인 계급적인 자유와 생성적인 본래적인 자유와 점진적인 자각의 자유가 있다. 이들 후자들도 나란히 차례로 질량의 문명과 경험의 문화와 허구의 문학을 각각 그들의 존치(存置)적인 매개(媒介)로 삼는다. 탈레스와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가 데모크리토스와 고르기아스와 플라톤과 각각 한 조가 되어 원형 팔각의 역사의 링 위에서 문명과 문화와 문학을 방패(防牌)로 삼아 질량과 경험과 허구의 창검(槍劍)을 번갈아 들면서 도란도란 인간 존재의 역사의 명멸(明滅)의 이야기와 더불어 여태껏 피 뛰기는 무종(無終)의 격투를 멸망 대회전으로 벌이고 있다. 심판자는 존재적인 역사의 신이고, 관중은 생계유지(生計維持)의 동굴 속에 갇힌 생로병사의 민서(民庶)들이다.
현재 내가 사는 동네는 세계5대 무역항의 도시, 부산의 온천장로 125번 길로, 소방서 삼거리를 인파 속에서 자주 다닌다. 이 길은 자연의 정신인 로고스(Logos)의 질서답게 조용하면서도, 밤낮으로 불빛과 함께 계속 분주하다. 현재는 홈 플러스 등등 허브스카이 쌍둥이 빌딩 등을 위시하여 뉴욕 맨해튼급 위용을 자랑하지만 불과 60년 전만 하더라도 한독국립재활원이 있었고,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업소가 많아 흑백의 예쁜 혼혈아들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간간히 많이 보였다. 어린 초등아이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기 위해 감천당, 향미당, 미미당에서 아이스케이크를 받다와 푸른 통을 어깨에 메고 돈을 받거나 소주병 등 유리병을 받아 바꾸면서 여기저기로 하나라도 더 팔려고 뛰어 다녔다. 부산아이들보다 전라도아이들이 더 많이 팔았다. 목소리가 구수하고 듣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한때는 국립재활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한독직업학교를 세워 기능공을 몇 년간 양성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다녀갔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는 한 치의 차이도 없다. 그런데 무슨 정신이 다양하지만 한 줄로 발전하면서 절대정신으로 향한다는 말인가. 그냥 인간들이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변화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도 저녁이 있었고, 지금도 저녁이 있다. 내가 사라지면 아무도 그때의 모습을 모른다. 그런데 무슨 변증논리가 힘차게 줄기차게 계속 있다는 것인가. 생성(生成)으로 무모순의 인식적 변화만 순환적 형식과 함께 동일하게 있을 뿐이다. 세계가 아니라 세상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세상은 우연적 진화로 필연이 망각으로 겹친다. 동일률로 인정하더라도 모순지양적인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주지(周知)하다시피 논리학에서도 동일률과 모순율은 이미 답이 양자(兩者)가 동일하고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명칭과 보는 각도만 다르다. 그래도 변화가 있다면 존재에 대한 인식적 변화만 순환적으로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일어에 능한 독일시민들의 바른 정신을 위하여, 헤겔 그 자신 본인도 진짜 철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철학의 제왕인 마냥 독일어로 헛소리를 마구하는 베를린 대학의 살아 있는 절대 정신, 철학황제인 대철인(大哲人) 헤겔에 홀로 단기(單騎)로 도전하여, 헤겔의 요새(要塞)인 베를린 대학의 철학의 강단에서 다가오는 20세기를 배경으로 무기(武器) 삼아 하루라도 빨리, 진짜 독일 정신을 위하여 강사신분의 전사로 나선 것이다. 강단에 서자마자 곧바로 조소(嘲笑)를 받으며 쓰러질 줄 알면서도, 진짜 철인(哲人)이 자신인양 맞서 싸운 것이다. 헤겔에 미친 자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칸디나비아 레밍 쥐떼와 같다고 그는 보고, 이들을 단체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그는 진짜 철학을 그의 칼집에서 빼내 꺼낸 것이다. 개강 첫날 앉아 있는 서너명의 수강자를 보고 3일 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대학당국으로부터 수강신청자가 한 명도 없다고 통보를 받고, 강사료 한 푼도 못 받고 폐강을 당한 것이다.
철학이 투쟁이든 관조이든 신에게는 그 모두가 다 동일한 것이다. 신이 정한 세계는 이미 그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인간들만의 변증법적 자각의 점진 논리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오로지 모양만 달리하는 변화생성의 자유만이 온몸으로 그 자리에서 즉시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은 자유의 모습으로 본질에 항상 앞서는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동산(東山)의 생명과 주인이 바뀌는 모습으로, 신(God, 神)이 제시하고 정한 자연(自然)의 지상(地上)에서 여러 번, 다수(多數)로 반복으로 있어 왔을 뿐이다. 자신만의 자각적인 발전(發展)이란 것도 지구(地球)에 비친 달의 모습처럼 변화생성의 전환(轉換)의 모습처럼, 모든 연이은 개별자(個別者)에서의 생로병사의 한 순환일 뿐들이다. 그게 바로 칸트의 물자체인 주관적 인식 넘어 보편인 정신으로, 본래적인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人間)만이라도 찰나(刹那)이지만 추상적 무목적성의 생로병사적인 반복성을 잠시라도 잊어먹고, 나 자신만의 영겁(永劫)의 겁으로 나와 남을 ‘자유로운 존재’로 직시(直視)하고 직시해주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철학에서 ‘자유’라는 것도 보통 남자들처럼 2차선 도로로 머리 나쁜 인간들이 파벌을 만들어 세 가지로만 겨우 사상(思想)으로 분류하여 노력하여 연구하고 쓸데없이 공부하면서 파벌 속에 또 세(勢)를 모아 유토피아의 조화(調和,harmony)라는 명목 속에 투쟁과 갈등을 목숨 걸고 하지, 다변(多辯)의 여자들처럼 넓고도 드 넓은 양차선(兩車線)으로 무한정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온몸으로 사치(奢侈)와 자유(自由)를 셀프(self)로 직시하여 돌대가리들이 강단과 필드 등에서 작전을 짜고 떼를 모아 싸움을 하든지 말든지 세기적인 사유의 프러시아 철학자 독일의 도덕철인(道德哲人) 칸트(I. Kant, 1724.4.22-1804.2.12)처럼 경제적 자유만 실제체험의 자유로 인정한다. 돈이 가장 유일하게 우리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돈을 벌기 위해 분주하고, 이곳 거리도 60년 전엔 아이들도 아이스케이크 통을 들고 다니면서 소리 높혀 용돈을 벌었다. 그리고 헤겔처럼 인간들이 신(神,God)을 어느 한 국면(局面)으로 초월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근본적인 종(種)이라도 되는 양, 인류를 역사철학으로 규명(糾明)한답시고 아주(阿州)나 남미, 동남아 등의 석기시대급의 오지(奧地)의 토인(土人) 원주민들을 별도로 구분하여 우습게 보지마라. 어릴 때에 데려와서 바로 키우면 21세기 우리 아이들과 똑 같다. 크면 비행기도 몰 수 있다. 즉 발전하는 인간이란 애초부터 없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오로지 신이 제시한 의지만이 환경적 생성(生成)으로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무목적성의 영구반복 순환적인 의지만의 환경적 생성이 무한세계(無限世界)가 아닌 유한세상(有限世上)으로 있을 뿐인데, 생의 단자적(單子,Monad) 의지가 모이고 모여서 응결을 이루어 찰나인 나를 세계적 세상의 영겁으로 보아, 보수적 문명 물질의 기계론적인 독자적인 계급과, 피차(彼此) 선악의 문화를 넘어서는 화학론적인 영혼적 자유의 계층과, 정신적인 허구의 맹목적인 목적론의 수단피체(手段被逮)의 객물이 서로 순서 무시하고 모이고 모여 번개불처럼 소리내면서 충돌하여 상중하의 계급과 계층을 만들어 물질과 마음, 영혼이 과학과 정신, 종교를 여러 규격으로 점철로 만들어 가위바위보처럼 끝없이 우승열패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를 노려 독일의 철학자 헤겔(G.W.F, Hegel)이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어 철학의 제왕으로 절대적 지지를 얻어 철인황제의 모습으로 독일정신의 성지(聖地) 메카인 베를린 대학에서 살아 있는 정신적 거목(精神的 巨木)으로 등장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말도 안 되는 동일한 정신목적의 변증법적 발전논리로 해괴하게 인간을 무지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학문적 철학 사기꾼으로 보면서, 도전에 대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면서 뒷걸음치며 물러서면서도, 한 곳으로 몰아 넣는 집단의 맹목에서 독일시민을 단체로 구하고자 20세기의 인간 자유의 본래적 모습의 횃불을 삶에 대한 생(生)의 의지(意志)란 이름으로 매일 똑같은 모양으로 아침저녁으로 떠 오르며 반복(反復)으로 사라지는 태양처럼 기다린 것이다. 이에 철학 불모지인 부산의 무명 철학도인 본인이 내가 사는 온천장로125번길 소방서삼거리를 이야기 삼아 걸어 가면서 마음 속으로 몇 자 적어 철학적으로 각색을 하여 탑재를 해 본다. 차례차례 반복으로 여러 복수(複數)인 우리들이 단수(單數)인 나 개인으로 하나 둘씩 여기에서 영영 사라지더라도 후인(後人)들이 똑 같은 모습으로 대(代)를 이어 순환반복으로 연이어 이 길을 숨을 쉬며 동시동작(同時動作)처럼 온 몸으로 살아 지나 갈 것이다. 정신철학마저도 어떤 자유이념을 향한 점진적인 역사발전의 모습이란 것은 없다. 오로지 살아숨쉬는 현실직시의 생존적 자유만이 중언부언 반복으로 점철할 것이다. 인류든 인간이든 사람이든 신이 허락하는 순간까지만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서 똑같은 모습으로 '생에 대한 의지'로 살다가는 것이다.
그래도 범인(凡人)들이 보기에 무릇 모든 것이 자꾸만 달라, 발전해 보인다고 굳이 다르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면, 헤겔과 다른 진짜 철학자의 일인(一人) 답게 불변의 존재에 대한 기술적 표현만이 다르다고 말해 줄 것이다. 우리는 점점 싸면서도 질 좋은 옷을 자기가 직접 노력하여 번돈으로 각양각색으로 골라 마음대로 입으니까 이를 우리는 자유의 점진적 발전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원래부터 자연의 선악과 속에 그대로 있었다. 헤겔은 자연(自然)에서마저 선악과를 통째로 삭제하여 말도 안되는 그의 변증철학의 심증(心證)대로 유사(類似) 각색을 하여 만인(萬人)이 독서(讀書)만 하면 모조리 다 넘어가게끔 책(冊)으로 만들어 놓았다. 쇼펜하우어는 참고 또 참다가 그의 자연철학을 보고는 결국 폭발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의 자연의 내재적 불변의 단칭적 자유, 선악(善惡)마저 부정하는 이런 절대적 사기꾼으로 부터 레밍화되어가는 독일시민을 헤겔의 절대적인 정신적 마취에서 구하기 위해 그는 베를린 대학인 헤겔의 요새에서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을 선택하여 동일한 주제의 새로운 해석을 들고 1:1 도전장을 공개로 낸 것이다. 첫날에 보인 서너명의 수강생을 보고 3일간 분투하였지만, 결국은 폐강으로 돈도 못 받는 결과로 참담했지만 20세기의 빛이 이미 언덕 너머 서서히 정확하게 인류 전체에 다가오고 있었다. 20세기의 그 무수한 빛의 깃발 속에는 그의 주장인 '생의 의지'도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리틀보이(Long little boy)와 팻맨(Short fat man)으로 터지기 전에 군단으로 전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 그는 부친(父親)의 유산(遺産)으로 넉넉한 그의 집안 소파에 홀로 앉아 김이 모락모락나는, 상인들이 배(船舶)로 공수(空輸)해 온 따뜻한 남미의 커피를 자기 돈으로 사서 마시면서 일부라도 그를 인정하는 논단과 기사를 신문으로 자주 보면서 자족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그의 가슴 속에서 만족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엔 헤겔의 정신적 변증자연철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끝판왕으로 보였다. 인간의 특성을 비인간적인 존재층에 귀결시키는 당시(當時) 유럽 수준의 근대성을 쇼펜하우어는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20세기 인간의 폭발하고 번잡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복잡하고 번쇠(繁衰)하고 대(代)를 이어도 모든 자연과 정신은 개별적 인간 속에서만 신(神,God)의 도움으로 모양 그대로 순환적이지만 부동의 자연과 함께 무늬만 바뀌면서 잠시 있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으로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다시금 비교하면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적에 한 개인이나 사람 그 자체로만 봐야지, 헤겔처럼 추상적인 인륜 속의 인간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루소적으로 국민적 자유주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사람을 위한 보편적 철학이 아니고, 특정 목적을 위한 매우 위험한 주관적 사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가 20C의 문을 바르게 연 철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 속에 변화만 있지 자기 반성의 변증법적 발전이란 말 장난이다. 인간의 변화란 기계론적 변화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계론적 변화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좀더 나은 혜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냥 살기 편한 혜택이지, 무슨 목적을 띤 발전적 방향이라고 보면 난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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