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번역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17)
[3 부] 생애 후반부
번역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20장 : 개화기, 1932년부터 1939년까지
폴 위르츠 Paul Wirz
섬 암자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목가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많은 신규 이민자들에게는 그다지 쉬운 일 이 아니었습니다. 인류학자인 폴 위르츠 박사는 이 기간 동안 이웃 섬인 파라파두와에 집을 가지고 있 었고 정기적으로 섬 암자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 는 유럽에서 새로 온 많은 사람들이 직면한 환멸에 대해 글을 씁니다.
다음은 위르츠의 책 Einsiedler auf Taprobane: Geschichte Dreier Insein(“타프로바네의 은둔자들: 세 섬 이야기”)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Wirz의 설명은 섬 암자에서의 삶의 측면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냐나띨로까 및 기타 승려에 대한 설명을 보여줍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Wirz는 파라파두와 섬을 섬 암자의 스님들에게 넘겼습니다.
황량하고 매우 좁은 이 섬은 1984년 독일 태생의 테라바다 스님인 아야 케마(Ayya Khema)가 파라파두와 여성출가자 암자(Parappaduva Nuns Hermitage)를 설립한 1984년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암자는 약 5년 동안만 지속되었습니다. 위르츠는 냐나띨로까를 “빤디따Pandita”(“학식있는 사람”)라고 부릅니다.
“파라파두와”는 호수에 있는 유일한 섬이 아닙니 다.근처에두개의섬이더있었는데,최근까지작 은 수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 섬들은 화려한 녹색과그늘이보이며,둘중작은섬은가느다란야 자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에 비해 파라파두와는 맹그로브의 녹색 지대로 둘러싸여 척박하고 황량합 니다. “코코스 섬”인 폴가스두와는 둘 중 더 크지만 최근에 야자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바른 이름이 붙여 지지 않았습니다.
꽃이 만발한 히비스커스와 다양한 잎이 달린 크로 톤관목으로둘러싸인잘닦인길은정글덤불을통 해 오두막에서 오두막으로 구불구불 이어집니다. 오 두막에는 사프란색, 노란색, 벽돌색 옷을 입은 경건 한 비구들과 사미들이 살고 있습니다. 첫눈에 그들 의 하얀 피부색은 원주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인들이 이 섬 암자를 거주지로 선택했음을 드러냅니 다. 사실, 이 작은 섬에는 감동적인 역사가 있었습니 다. ...
1926년에는 [빤디따가]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원은 정부에 의해 스리랑자 사람 에게 싼 가격으로 팔렸지만, 후원자의 중재를 통해 빤디따는그사원을다시그의소유로되돌려놓았 습니다. 시간이 지나 파괴되었던 건물이 재건되었습 니다.빤디따는지칠줄모르는열정으로다시학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학술 작품, 크고 작은 논문, 빠알리어 번역은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습니 다. 그들은 빤디따가 불교학자와 빠알리 학자들 사 이에서 눈에 띄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폴가두와가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나라의 불교도들이 오고 갔지만 많은 사람들 은 폴가두와에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진 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큰 기대를 가지고왔던많은사람들이상당히환멸을느낀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단조로운 삶, 억압적인 고독, 그리고 그들이 익숙 했던모든것을갑자기포기하는것,그리고마지막 으로, 아침에 마을에서 걸식하는 동안 스리랑카인이 제공하는 매우 단조롭고 보잘것없는 음식, 이것은 대부분 젊은 백인 불교도들에게 큰 희생과 금욕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 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 이비구가되어사프란색옷을입고빨리오지나인 도,미얀마로떠나억압적인고독에서벗어날수있 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에 택한 길을 계속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 니다.많은사람들은조만간각자의길을갈것입니 다. 그러나 유럽에서 처음 온, 열정적인 이들 대부분 은 실제적인 불교의 현실을 어떻게 알았으며, 폴가 스두와에서 실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 인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영감과 열정으로 가득찬그들은유럽에등을돌렸습니다.그러나배 를타고약속의땅에도착했을때그곳에서무엇을 만날지 그들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모든것이예상했던것과달랐다는것을알게되었 습니다.
도착후그들은아름다운자연과겨울에도그리덥 지않은기온에매료되었습니다.처음며칠과몇주 는그곳의삶이제공하는새롭고생소한것들,그리 고주변환경을배우고관찰하는것으로가득차있 었습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빛을 잃기 시작하고, 새롭고 낯설은 것이 평범해지면 영감도 사라지고 벌 거벗고 딱딱한 현실만 남게 됩니다.
나는어떤의도로든대부분희망에차있고온갖 종류의환상으로가득차서유럽에등을돌려이곳 폴가스두와에서 새로운 집을 찾은 모든 사람들에 대 해책을쓸수있었습니다.근처마을주민들에게보 고하게 하면 그들만의 무미건조한 유머가 가미된 재 미있는 이야기들이 뒤섞여 들려오게 될 것이다. 시 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야기들이 쌓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쁜 말이 많았고, 빤디따 자신이 스리랑카사람들에 의해 매우 존경받고 소중히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모든 백인 승려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경험을 겪은 후, 빤디따는 실제로 폴가스두와에서의 생활에 적합한 사람은 거의 없으 며 누군가가 와서 위대한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격려하기 전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입니다.
열대 지방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을 곧바로 폴가스 두바로 보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곳에서그는찌는듯한더위와고독속에서집없는 삶을 떠맡고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냐나틸로카는 유럽을떠날때무엇을기대해야할지도모른채지 나치게 열정적이고 낙관적이고 아주 성실하게 폴가 스두와에 머물 것을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 절하지않았다면많은어려움을면할수있었을것 입니다. 그리고 비구의 평화로운 특징을 항상 보여 주지 못한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있었습니다. 폴가스 두와에 정착하자마자 그들만의 방식으로 위대한 스 승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 서섬의평화는한번이상깨졌습니다.그러나보통 이러한 문제들은 평화를 깬 사람들이 폴가스두와의 삶에적합하지않다는것을깨닫고스스로빨리떠 났기 때문에 끝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체코인, 특히 독일인, 심지어 가끔 일본 인, 미얀마인, 인도인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섬 암자에 왔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왔고 다양한 동기에 따라 왔지만,모두인류에게반박할수없는진리,즉괴 로움의 진리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팔정도를 가 르친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습 니다. 심리학자는 분명히 여기서 흥미로운 연구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여기에 오는근본적인동기를볼수있습니다.비록누군가 가 아주 침묵하고 닫혀 있었습니다고 해도, 짧거나 오랜시간이지나면그사람은마음을열어야할것 입니다.
새로 선택한 종교에 대한 열정과 근면으로 가득 찬 전직 가톨릭 신부였던 젊은 독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서 최근까지 자신이 순종했던 가톨릭교와 교황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러 나이제그는확신에찬불교도가되었고,머리에연 기가날때까지하루종일책뒤에앉아불같은기사 를썼으며,그글에서그는자신의행위를정당화하 고 모든 면에서 고타마의 가르침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는또한가능한모든기회를이용하여섬암자에 온 사람들과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토론 중 에 그는 이교도들을 열렬히 공격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종종 정말로 이상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 대해서도 그는 시급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현대 유행”의 선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불렀고 “사업 에는더많은삶이있어야한다”그리고“상사들은 끔찍할 정도로 게으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회사이 다”라고 믿었습니다
왜많은규칙,고독,금욕주의,단식,모든것을포 기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에 대한 불안과 이성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많은 것 이 독일어로 번역되었는데 왜 빠알리어 연구가 필요 한가? 그는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는기사를계속쓰고열정적인강의를했는데,그 의 능력에는 신념과 천재성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의 스승과 상사에게는 더더욱 인정을 받지 못했습 니다.
그가 등을 찌르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분명하지 않
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인기를잃고있다는것과자신을표현하는데좀더 온건했습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 았습니다.
모두가 그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떠나는 것이더낫다는말을마침내분명히듣게될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한 비구계 를 받은 직후 떠나 라트나푸라(Ratnapura)로 가서 큰 사원에 머물면서 사원 대학에서 도왔습니다. 그 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 다. 그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라고 할 때까지 그의 태도로 사람들 을 물리쳤고, 심지어는 즉시 유럽으로 돌아가라고까 지했는데,그들은그에게두번말할필요가없었습 니다.그는검은옷을노란법의로바꾸었을때예수 회의태도를비구의태도로바꿀수없었습니다.그 리하여 그는 여행을 위해 조심스럽게 저축한 돈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안도감을 가지고 자신이 겪은 경험 이후 다시 그에게 소중해진 고국으로 돌아갔습 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겪었습니다. 가톨 릭 신부만큼 변덕스럽진 않지만 섬 암자의 생활에 더 적합하지도 않은 중년의 폴란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교도도 아니었고 불교에 대한 성향도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공부하기 위해서러 왔던 인 도의 요가 가르침을 접했습니다. 그는 둘러보고 싶 은섬암자에도착했을때참을수없는더위와더욱 이 추방에 비유했던 억압적인 고독을 우연히 발견했 습니다.그는매우긴급하게약속의땅인인도로떠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