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빛의 제국>
2010. 5. 22. 토.
-문학동네 2008년판
* 그는 세상일의 모든 처음을 생각해보았다. <본문중> *
오랜 시간 남파간첩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가정을 꾸려나왔다. 나는.
<언젠가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남파 당시의 지령을 잊을 정도로 남한 생활에 푹 빠져 살아왔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북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같이 밀파된 동지들은 하나같이 남한에서 꾸린 가정을 버리려 들지 않는다. <북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조국이 그들에게 해준 것이 없는데 충성심을 보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북으로의 귀환 여부를 놓고 갈등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는.
나는 피붙이라고 없는 남한에서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내 피를 이어받은 자식을 낳음으로서 가족을 만들었는데. 나는 여기서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딘가. 갑자기 일상이 혼돈으로 빠져버렸다. 나는.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격적인 고백 앞에 아내는 코웃음을 친다. 나에게는 그 비웃음이 <그까짓 조국이 무엇인가>라는 비아냥으로 들린다. 대학을 나오고 사상 투쟁을 거쳐 운동권을 이끌기까지 했던 나는 지금 무력해서 아내에게 매달리고 싶다. 그 앞에서 살려달라고 빌고 싶다. 당신을 속여 죽을 죄를 지었어. 제발 나를 살려주오. 제발.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