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章草와 今草 초서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에 대해 동한의 조일(趙壹)은 『비초서(非草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초서의 흥함은 옛날에 가깝지 않은가? 위로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드리운 바가 아니고, 아래로 황하와 낙수에서 토해낸 바가 아니며, 가운데로 성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대개 진나라 말엽에 형이 높고 법이 엄밀하며, 관청의 문서가 번거롭고 쓸데없었고, 전쟁과 공격이 아울러 일어나 군대의 명령서를 주고받으며 질주했으며, 깃에 꽂은 격문이 어지럽게 날았으므로 예서를 대략적으로 빨리 써서 급하고 빠름에 이르렀을 따름이다. 가리킴이 쉬운 것은 성인의 업이 아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깎아내고 번거로움을 생략하며, 복잡한 것을 덜어 간단히 하는 것을 귀히 여겨 힘써 알기 쉽게 바꾼 것은 일상적인 법도가 아니다. 夫草書之興也, 其於近古乎. 上非天象所垂, 下非河洛所吐, 中非聖人所造. 蓋秦之末, 刑峻綱密, 官書煩冗, 戰攻竝作, 軍書交馳, 羽檄紛飛. 故爲隸草, 趣急速耳. 示簡易之指, 非聖人之業也. 但貴?難省煩, 損複爲單, 務取易爲易知, 非常儀也. 이 글은 당시 초서를 비평했던 문장으로, 일이 급해 핍박당해서 “일에 임해 마땅함을 좇는다[臨事從宜].”라는 상황에 간편하게 쓰는 기초에서 초서가 나타났던 사실을 알린 것이다. 전서를 초솔하게 쓰는 것이 곧 초전(草篆, 즉 古隸)이 되었고, 둥글게 전환하는 것을 평평하고 곧게 발전하여 한예가 이루었으며, 다시 파책과 기복을 더해 곧 팔분서가 되었다. 고예에서 한예로 변천할 때의 초기 간서, 예를 들면 <천한삼년간(天漢三年簡)>ㆍ<시원이년간(始元二年簡)>은 이미 전서ㆍ예서ㆍ초서가 서로 섞인 현상이 있다. 후경창(候鏡昶)은 「논서한서예(論西漢書藝)」에서 “서한 선제(宣帝, 기원전73-49) 때의 <신작삼년간(神爵三年簡)>과 성제(成帝, 기원전32-7) 때의 <양삭원년간(陽朔元年簡)>은 이미 비교적 성숙한 초서가 나타내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순수한 장초이다.”라고 했다. 이 시기가 바로 한예가 팔분서로 변화되고, 팔분서가 점차 성숙되는 시기이다. 이를 보면, 팔분서가 형성함과 동시에 초서도 형성과 발전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초서는 단독자의 필법이 간단하고 쉬우며 빠른 필세가 있다. 이는 “예서의 필법을 풀어 흩뜨려 급함에 나아간 것이다[解散隸法, 用以赴急].”라는 것으로 형성된 새로운 서체이며, 이미 갈고리로 연결하고 구부려 꺾는 특징이 있다. 동한의 간독에서 이미 장초의 서체가 있는데, 예를 들면 광무제 (光武帝, 25-57) 때의 <건초십이년간(建初十二年簡)>, 명제(明帝, 58-75) 때의 <영평십일년간(永平十一年簡)> 등이다. 이는 새로 일어난 장초가 한나라 하층 서예가가 장기간 실용 과정에서 형성하고 창조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시대의 산물이지 결코 성인이나 소수의 몇몇 서예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항(衛恒)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으나 작자와 성명을 알지 못한다[漢興而有草書, 不知作者姓名].”라고 한 것과 같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 장초를 잘 썼던 서예가로는 두도(杜度)ㆍ최원(崔瑗)ㆍ최식(崔寔) 등이 있고, 역사에서 장초를 창조한 것으로는 사유(史游)ㆍ두도ㆍ장제(章帝, 76-88)설 등이 있다. 이는 비록 실제와 부합하지 않지만, 두도와 최원과 같은 서예가들이 당시 초서로 유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초서발전에서 나타난 공헌은 말살할 수 없다. 초서의 응용은 처음엔 비록 장초의 실제가 있었으나 장초라는 이름은 없었다. ‘장초’라는 명칭은 장회관이 『서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건초 연간(建初, 76-84)에 이르러 두도가 초서를 잘 써서 장제에게 칭찬받았다. 장제는 그 필적을 귀히 여겨 조서로 초서를 써서 일을 올리라고 했다. 대개 아뢰는 글인 章奏로 인하여 후세에 이를 장초라고 일컬었다. 至建初中, 杜度善草, 見稱于章帝, 上貴其迹, 詔使草書上事.……蓋因章奏, 後世謂之章草.
이는 일정한 근거가 있을 수 있으나 역대의 설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한과 진나라 사이에 장초를 쓴 명가로는 두도ㆍ최원ㆍ최식ㆍ장지ㆍ나휘(羅暉)ㆍ조습(趙襲)ㆍ위기(衛?)ㆍ황상(皇象)ㆍ삭정(索靖) 등이 있다. 두도ㆍ최원ㆍ최식 등의 장초는 현재 원적의 전해짐이 없다. 장지의 <추량첩(秋凉帖)>, 오나라 황상의 <급취장(急就章)>, 진나라 왕희지의 <표노첩(秋凉帖)>, 삭정의<월의첩(月儀帖)>ㆍ<출사송(出師頌)> 등은 대략 모두 당나라 사람이 임모하여 쓴 것으로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근거와 그들과 같은 시대에 장초로 쓴 간독을 보면, 그 당시의 장초는 원필이 방필보다 많고, 명료한 파책 필세가 있으며, 글자와 글자가 이어지지 않고 글자마다 구별된 독립 형태를 이루었다. 장초의 서사는 “장법은 검소하고 편하다[章務儉而便].”라는 것을 요하기 때문에 금초처럼 방종하고 돌림이 많은 것과 같지 않았다. 장초는 파책을 띠고 있으므로 서사할 때 삭정이 『초서세(草書勢)』에서 “그 손가락을 운용한다[運其指].”라고 말한 것을 중시하여 금초와 서사에서도 큰 구별이 있다. 초서는 장초의 과도기로 말미암아 금초에 이르렀고, 역대로 내려오는 설은 동한시기의 장지가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장회관은 『서단』에서 장지에 대해 “최원ㆍ두도의 법을 배워 그것을 변화하여 금초를 이루었다[學崔杜之法, 因而變之, 以成今草].”라고 했다. 그의 초서 특징은 “글자의 체세는 일필로 이루었는데, 우연히 이어지지 않은 것이 있어도 혈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이어지는 것에 이르러 기후가 그 행마다 통했다[字之體勢, 一筆而成, 偶有不連而血脈不斷. 及其連者, 氣候通其隔行].”라고 했다. 장초의 글자마다 독립된 상태를 개변하고, 솜처럼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기맥이 관통하는 금초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원숭이를 매단 계곡의 형상과 쇠사슬을 갈고리로 하여 고리처럼 연결한 것 같고, 정신의 변화는 스스로 그러한 것 같으며, 변화의 형태는 다함이 없다[若懸猿澗之象, 鉤鎖連環之狀, 神化自若, 變態不窮].”라는 것과 같은 금초는 실제로 이후 광초의 물꼬를 열었다. 금초를 쓰는 용필은 둥글게 꺾어 연결하여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므로 삭정은 장지 금초의 서사 관건은 “그 팔을 돌린다[回其腕].”라는 데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장초와 금초가 필법에서의 구별과 서로 다른 특징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초서의 발전은 장지에 이르러 또한 실용성에서 예술성으로 변화한 시기이다. 장지가 초서를 매우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해 장회관은 『서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집의 옷과 비단은 반드시 먼저 글씨를 쓰고 후에 표백했다. 연못에 임하여 글씨를 배움에 연못물이 전부 검게 되었다. 凡家之衣帛, 必先書而後練之. 臨池學書, 池水盡墨. 이는 예술가가 서예에 빠진 것을 생동하게 썼기 때문에 서예사의 미담이 되었다. 조일이 말한 것을 근거로 삼은 초서의 본의는 “일에 임해 마땅함을 좇는다[臨事從宜].”라는 것이나 장지 때에 이르러 그가 초서를 쓴 경험의 말한 것은 오히려 “너무 바빠 초서를 쓸 겨를이 없다[悤悤不暇草書].”라는 것이다. 예술의 창조를 하기 위한 장지의 경험은 예술창작의 규율에 부합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 동한의 사부가인 조일은 『비초서』에서 “초서의 근본은 쉽고 빠른 것이다[草本易而速].”라고 했고, 두도ㆍ최원ㆍ장지의 때에 이르러 초서는 “오히려 어렵고 더딘 것이다[反難而遲].”라는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흥기한 것은 “장지의 초서를 애모함이 공자와 안연을 바라는 것보다 지나쳤다[慕張生之草書過于希孔顔焉].”, “모두 창힐ㆍ사주를 폐하고 다투어 두도ㆍ최원을 법으로 사사로운 글씨를 서로 주고받으며, 거의 홀로 글씨에 나아간다 하며 핍박되고 급함에 나아가므로 초서에 이르지 않았다[皆廢倉?史?, 競以杜崔爲楷, 私書相與, 庶獨就書, 云適迫遽, 故不及草].”라는 현상이다. 조일의 『비초서』는 초서가 단순한 실용성으로 말미암아 예술성으로 향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초서에 대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전적으로 힘써 연찬함이 굳고 우러러봄이 높으며, 수고로움을 그만 두는 것을 잊고 저녁에도 걱정하여 쉬지 않으며 해가 저물어도 밥 먹을 겨를이 없다. 열흘에 붓 한 자루가 닳고 한 달에도 몇 자루의 먹을 소비하며, 소매는 검은 비단과 같고 입술과 치아가 항상 검었다. 비록 무리와 함께하는 자리에 처하더라도 한가하게 말하거나 희학질을 하지 않고 손가락을 펼쳐 땅에다 획을 긋고 풀로 벽을 상처 내며, 어깨가 구멍이 나고 껍질이 깎이며, 손가락과 손톱이 꺾이고 부러져 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오히려 쉬거나 멈추질 않는다. 專用爲務, 鑽堅仰高, 忘其罷勞, 夕?不息, 仄不暇食. 十日一筆, 月數丸墨, 領袖如?, 脣齒常黑. 雖處衆坐, 不遑談?, 展指?地, 以草?壁, 臂穿皮刮, 指爪?折, 見?出血, 猶不休輟. 이는 바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초서를 좋아하고 사랑한 것을 잘 반영한 글이다. 초서를 쓰는 것이 일종의 예술 창조가 되어 취한 것과 같고 미친 것 같은 정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바로 초서가 고도의 예술경지에 진입하도록 한 사회의 기초이다. 장지와 같은 서예가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 기초에서 초서가 실용성의 과도기로 말미암아 예술성에 이르는 시기에 중대한 공헌이 있는 인물이다. 그를 ‘초성(草聖)’이라 일컫는 것은 바로 그가 초서 발전에서 공헌했던 것을 충분히 긍정하는 것이다. 장초는 한나라로부터 형성하여 위진남북조를 거쳐 날로 점차 세력이 쇠미해졌으나 금초는 오히려 한과 진나라 이래로 날로 발전하여 당나라에 이르러 최고봉에 도달했다. 그리고 장욱ㆍ회소와 같은 고도의 예술성취가 있는 서예가가 나타나 줄곧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
출처: 한국서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이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