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 기춘<侍子 奇春>
조실 방에 조용히 앉아서 한가히 졸고 있던 진묵은 큰방에서 떠드는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었다.
“도대체 기춘<奇春>이는 어째서 조실스님을 끌고 다니는 거지? 네게만 스승이시고 우리는 모두 소용없다는 거야?”
“아냐, 내가 왜 스님을 끌고 다니겠니? 스님께서 가자고 하셔서 따라간 것뿐인 걸.”
뭐라 구? 평소에 스님께서 누굴 제일 귀여워하시는데 변명을 늘어놓니? 스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는 걸 미끼로 너는 네 맘대로 스님을 이리저리 모시고 다니거든.“
“스님께서야 상좌들을 모두 사랑해주시지 어찌 나만을 생각해 주시겠니? 다만 현재 내가 시봉 드리고 있으니까 네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
“아냐, 지난해 대심<大心>이가 잠깐 시봉을 드린 적이 있었잖니? 그때 스님께서 대심이 를 물리치시고 딴 절에 가 있는 너를 우정 부르셨거든.
그토록 너를 귀여워 해주시니 너는 네 맘대로 스님을 업고 다니는 게 아니냔 말 야?
“허, 참. 그렇지 않대도.”
“스님께서 기춘 만 좋아하시니 점심에는 스님께 국수를 해드리렴.”
흔히, 사원에서 대중공양을 마련하는 때면 별미로 국수를 만드는 게 흔한 습관이다.
“스님만 드리면 되니? 기왕이면 전 대중이 먹도록 많이 만들어야지.”
“나 혼자 말이니?”
“그래, 기춘이 혼자서 만들어.”
서넛의 사미들이 공동으로 기춘이를 골려 주는 중이다. 조실스님은 큰 방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다시 방장실로 돌아왔다. 기춘이가 어떻게 대처 하는가 보자 함 이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아득한 추억을 더듬는다.
진묵의 나이 스물아홉이던가.
큰맘 먹고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 오른 그는 경남 남해안을 밟고 있었다. 석양이 붉게 물 드는 서녘하늘을 바라보며 항구도시인 마산<馬山>에 이르러 무턱대고 한 대문 앞에 서서,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하인을 부르는 것이었다.
“예 으 이-.”
이윽고 하인이 나왔다.
“산승<山僧>이 지나는 길에 하루 밤 드새 가려고 왔으니 주인께 여쭈어라.”
“ 뭐, 뭐라고 어린 중놈이 호령하다니? 내 원 참.....이 놈 썩 물러가라.”
어린 중이라고 하인이 깔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묵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다시 소리 지른다.
“허, 왜 이리 잔말이 많은고? 주인께서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안 소재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그, 그거야 사실이긴 하지만 너 같은 어린 중을 모시려는 게 아니고 아주 귀한 도승이 오실 거라고 기다리시지. 아니 그런데 네가 그걸 어찌 알지?”
“정말 무례한 놈이구나. 손님을 박대하면 집안이 망해, 저리 비켜라. 내가 직접 주인을 만나겠다.”
주인은 토반<土班> 으로서 세력도 당당한 선비이며, 남달리 불교에 심취한 분인데, 그는 간밤에 화엄신장이 현몽하기를,
“오늘 석가 부처님이 너의 집을 방문할 것이니 집안을 정결히 치우고 목욕재계하고 기다려라.”
이런 꿈을 얻은 주인은 정말 부처님을 맞을 마음으로 집안 권속에게 오늘 귀한 도승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소재하고, 예절을 더욱 바르게 하라고 일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종일 기다렸으나 묵어가겠다는 걸인 하나도 없다가 석양에 나타난 것이 진묵이었다. 주인은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불러 들 여 진묵에게 인사를 시킨다. 안주인, 아들, 딸, 하인들까지 차례로 큰절을 드리고 물러난 뒤, 이어 곧 저녁상이 들어왔다. 저녁상도 하녀가 있건만 주인의 막내딸이 직접 날라 왔다. 소찬이나마 진수성찬이었다.
“공양구가 변변치 못하옵니다만 많이 드십시오.”
갓 피어난 백합처럼 청초하고 싱싱한 아가씨의 고운 자태에 진묵은 난생처음 이성<異性>이라는 걸 의식해 본다.
그날 밤을 편히 쉰 진묵은 주인의 만류로 며칠을 묵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아가씨와 단둘이의 시간이 많았다.
“스님, 어째서 중노릇하는 것입니까?”
“나를 건지고 일체중생을 건지려고요,”
“그 일체중생 속에는 이 몸도 포함되나이까?”
“아가씨뿐이겠소. 개미 벌레까지도.....”
“그렇다면 이 몸을 먼저 제도해 주셔요.”
“단번에 제도하기란 어려운 거요. 다 인연과 시절이 맞아야지요.”
“이 몸은 보시는 바와 같이 규중에 있는 몸, 여지껏 외간 남자를 대해 본 적이 없 삽 다가 스님을 뵈옵게 되었는바, 스님께서는 제 맘을 송두리째 앗아 가셨습니다. 부디 이 몸 추하다 마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이쯤 되었으니 진묵으로서는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로서도 상당히 번민하던 차라, 여자의 고백은 그의 마음을 흔들 만 하였다.
“나는 출가한 몸이오. 그런 농담은 아예 마시오.”
자기 가슴에 이글거리는 이성을 그리는 불길을 은근히 삭이며 그는 점잖게 타이른다.
“농담이 아니옵니다. 스님은 스님이어도 좋고 속인이어도 좋습니다. 아니 스님이기에 더욱 좋을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제도해 주실 수 있기에........
저는 이미 결심한 몸이오니, 천라도 만 리라도 따라 다니겠사옵니다. 물리치지 마십시오.“
“아니, 나도 아가씨를 처음 대하면서부터 아가씨에게 이끌리는 강렬한 힘을 느꼈었소. 아마 이미 이 힘이란 숙생의 인연의 힘인가 싶소. 그러나 이 인연의 힘은 깊이 따져 보면 업연<業緣>의 소치이지 해탈하는 법력은 아닌 것이오.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다 겁 생<多怯生>에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가 싶소. 더러는 부부지간으로 또는 부모와 자식지간으로, 또는 형제지간으로 또는 친구지간으로 수백 수천 생을 만났다 헤어졌다 하였을 것이오.
냉철히 생각해 보건대 이게 다 무<無>어요? 한낱 업연의 장난이지. 허나, 이제는 우리도 미몽<迷夢>을 깨어서 정작 수승한 인연을 맺어 시방법계에 자재우유<自在優遊>하며 보살의 대원 행<大願行>을 실천해야 할 줄 아오.“
진묵의 간곡한 얘기를 듣던 아가씨는 수그렸던 고개를 살포시 들며,
“이 몸도 굳이 세속 정<世俗情>으로 스님을 얽매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모르게 스님께 이끌리는 이 마음을 억제할 수 없군요. 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속인연보다 불연<佛緣>으로 다시 맺어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이 몸도 머리를 깍 고 먹물 옷을 입겠사오니 항상 곁에서 모시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출가위승 한다면 물론, 도반이겠으나 남녀가 유별하니 함께 지니시란 어려운 일이오. 서로 헤어져 살아도 도반의 우정을 가지고 탁마해 나간다면 그도 좋은 인연일 것이오.”
“그건 싫어요, 저는 스님을 모시고 살고 싶어요.”
“ 그러려 면 남자가 되어야지요.”
“어떻게 하면 남자가 됩니까?”
“부처님께 발원하면 내생에는......”
“그럼, 그렇게 하겠어요, 제 이름은 기 춘 이어요. 지금부터 10여년 후에 기춘 이란 동자가 찾아 뵈 오면 저인 줄 아시고 스님의 시봉을 시켜주십시오.”
“아니, 그럼 지금 곧 이생을 하직하겠다는 거요?”
“무슨 미련이 있기에 주저하겠어요? 거룩한 스님 숙생에 인연 깊은 스님을 모시게 되는데 어찌 망설이겠어요.”
“음..........”
“스님, 약속해 주세요. 저를 받아 주시겠다고요.”
“약속하지요.”
진묵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겁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이 아가씨는 부처님께 나아가 발원 기도드리고는 이내 이 세상을 하직하였음은 물론이다.
기춘이는 정말로 12세적에 진묵에게로 왔다.
진묵은 기춘이란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를 맞아 시봉으로 삼았다. 기춘이는 스승에게 지극한 효성을 드렸다. 진묵도 늘 기춘이를 데리고 다녔고 각별한 지도를 하며 그가 크게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진묵은 남녀의 정애<情愛>의 인연을 이렇게 불연<佛緣>, 법연<法緣>으로 돌려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참으로 남이 실천하기 어려운 불사를 그는 능히 해낸 것이다.
“얘, 기춘아.”
스승의 부름을 받은 기춘은 곧 방장실<方丈室>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열일곱의 나이에 비해 훨씬 숙성한 시봉은 언제나 스승의 의중을 살피는데 남보다 앞선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스승을 존경하고 알뜰히 모시는 그였다.
“국수를 만든 다지?”
“네......”
“국수를 네 손으로 대중의 발우에 담아라. 그리고는 이 바늘 하나씩을 국수 위에 얹어 놓아라.”
“바늘은 무얼 하시려 구요?”
“시키는 대로만 해라.”
기춘이는 바늘 쌈지를 들고 나갔다.
이윽고 점심 공양을 알리는 작은 종이 울렸다.
기춘 이는 조실스님이 명한 대로 발우에 국수를 담고 그 위에 바늘 한 개씩을 얹었다.
대중들은 모두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조실스님을 바라보면서 기춘이 에게 힐난한다.
“기춘아, 웬 바늘은?”
“조실스님의 명령이야?”
국수 나누기를 마치고 기춘은 제 자리에 가 앉자 조실스님은 입을 연다.
“오늘 공양은 보아하니 기춘이 혼자서 마련한 것 같다. 너희는 놀고 앉아서 기춘 이의 공양을 받은 셈이다. 너희가 능히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앉아서 남을 시켜도 된다. 대중은 구만한 자신이 있기에 기춘 이만 시켰을 줄 안다. 모두들 어서 국수 공양을 해라.”
주문치고는 무서운 주문이다.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먹으라니 말이다.
진묵은 국수를 휘저어 먹기 시작한다. 바늘도 어느 사이 국수가 되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중은 모두 얼굴이 흑 빛이 되었다. 진묵의 도력에 새삼 경탄하면서.....
그들은 일어나서 조실스님에게 큰절을 하고 참회 드린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큰스님 시봉을 함부로 다루면 못써.”
“예, 다시는 않겠습니다.”
진묵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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