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 양조비법 보유 석회암반수로 제조 최고 술맛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유명 군납품에 해외 인지도 치솟아
기사사진과 설명 이기춘 문배주 인간문화재. 국주(國酒)의 명성을5 대째 잇고 있다. 필자제공 |
술이 국가 경쟁력인 시대에 살고 있다. 중국 마오타이, 영국 스카치위스키, 프랑스 코냑, 독일 호프, 러시아 보드카, 멕시코 데킬라, 일본 사케. 애주가들이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하는 명주들이다. 이처럼 세계 각국에는 자국을 대표하며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국주(國酒)의 브랜드 명성이 자자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주는 무엇인가. 문배주(酒)다.
기사사진과 설명 사당안의 문배주 완성품. 세계의 명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문배는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품종인 배(梨) 이름이다. 예부터 문배 과육과 꽃에서 발산되는 그윽한 향내는 남녀 간 춘정을 움직여 ‘고목나무도 꽃피게 한다’는 회춘향으로 유명하다. 일찍이 우리나라에는 찐 수수와 조, 밀 누룩을 발효시켜 문배향을 재현해 내는 증류 양조기술이 전승돼 오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술 담그는 비법을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로 지정(1986. 11. 1)했는데 그 기능은 백이(百怡) 이기춘(李基春·70) 씨가 보유하고 있다.
백이의 문배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문배주는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건배주와 만찬주로 쓰였고 중요 국빈행사 때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주로 선택됐다.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은 방한 시마다 문배주 칵테일을 찾았고,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은 이 술을 맛본 뒤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정상회담(1991) 당시는 독주를 즐기는 그의 입맛에 맞춰 50도짜리 문배주를 특별 주조하기도 했다.
술의 본래 말은 수블 또는 수술로 전해진다. 고려 때엔 신하들이 왕에게 좋은 술을 빚어 진상해 벼슬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 문헌기록엔 수을·수울로 나타나는데 국문학자들에 따르면 수블→수을→수울의 어원 변화를 거쳐 술로 정착됐다고 한다. 조선조 선비들은 술 마시는 품격과 운치·주량 등을 당시 9품 벼슬과 견줘 주구품(酒九品)으로 구분했다.
1품·절경독주(절경을 벗 삼아 독작) 2품·산천대주(들에서 친구와 대작) 3품·자가독주(집에서 독작) 4품·붕우대주(친구 집에서 대작) 5품·주점독주(술집에 가 독작) 6품·주점회주(술집에서 돌려 마심) 7품·예주(제사 또는 잔칫집 술) 8품·회음주(공식석상에서 돌려 마심) 9품·부복주(어른 앞에서 엎드려 마심). 이 중 1품보다 앞서는 최고 경지를 월야독작(月夜獨酌)이라 해 교교한 달밤에 혼자 마시는 술을 꼽았다.
“술은 물맛에 의해 좌우되는데 석회암수를 최고로 칩니다. 공교롭게도 세계 명주들은 석회암 층에서 솟는 물로 빚어진다는 공통점이 이를 입증합니다. 평양 대동강 변의 주암산(酒岩山) 물이 석회암반수여서 술 맛 내는 데 최고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주암산 주변의 양조회사가 5~6개나 있었으니까요.”
세계적 명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문배주 발상지도 주암산 아래 평양시 감흥리 15번지에서 시작된 평천양조장이다. 백이는 “당시 평천양조장의 매출액이 평양시 예산과 맞먹었고 고 김일성 주석이 왕래하며 문배주를 즐겼다”고 상기시킨다.
증조모(박씨)→조부(이병일)→부친(이경찬·1915~1993 초대 기능보유자)의 뒤를 이은 백이(1995년 기능보유자 지정) 후계자로는 아들(이승용·39)이 전수조교로 지정돼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때 백이는 평양 대동강 물을 수입해 문배주를 제조하겠다고 북한에 제의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보유한 문배주 제조 핵심기술인 효모 발효법과 주암산 암반수를 버무려 남북 화해의 물꼬를 터보려는 집념의 소산이었다. 북한에도 문배주 공장이 있으나 전통비법 주조술은 백이가 보유하고 있다. 6·25 전쟁 때 이경찬 옹이 월남하며 문배주 효모 종자는 물론 방건우 당시 공장장까지 데려왔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지점장까지 지낸 백이는 아버지한테 문배주 전통비법을 전수받으며 석회암반수를 찾아 전국을 답사했다. 마침내 찾아낸 곳이 현재 주조장이 있는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서암리 203-4번지다.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한 후 기자로 활동하는 아들을 퇴직시켜 제조기술을 가르쳤고, 공장장도 방건우 씨 대를 이어 아들(방정환·60)이 맡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그중 양조기술도 국가문화를 지탱하는 고급문화 가운데 하나라고 자부해요. 예부터 술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외국 술의 양이 엄청납니다. 기왕이면 세계가 감동하는 최고급 명주를 생산해 국가경제에도 보탬이 되고 브랜드 명성도 굳히고 싶어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서 칠레산 포도주 수입량은 그 이전보다 11.4배 증가한 반면 우리 전통주는 국내 주류 출고량의 0.3%에 불과하다는 통계다. 유럽연합(EU)과의 FTA 타결로 프랑스 와인이 관세 없이 상륙할 경우 우리 전통주 시장의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국내에는 50여 종의 전통주가 있으나 문배주(86-가호)·면천두견주(86-나호)·경주교동법주(86-다호) 등 3개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로 나뉘어 지정돼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81-31번지 포암문배빌딩 4층에는 문배주 연구실과 함께 백이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는 문배주 역사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수십 종류의 완성주 술병과 함께 각종 사료가 보관돼 있다.
문배주의 세계화를 위한 노력도 열정적이다. 미국 뉴욕에 현지 지점을 개설했고 중국·일본·유럽 등지에서도 자체 영업망을 통한 마케팅으로 꾸준히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2012년에는 향긋한 유자향이 나는 ‘적도(赤道) 소주’를 개발해 홍콩에 상륙시켰다. 문배주는 23도·25도·40도의 3종류를 생산하는데 현재 군에 납품하는 건 23도짜리다.
“세계는 이미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이기는 자만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우리 전통주도 국내 시장의 치열한 경쟁과정을 거쳐 세계 주류시장을 공략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 음주문화도 주도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성숙된 경지로 도달해야 되겠지요.”
백이에게 주량과 주도를 물으니 ‘문배주를 감별할 정도의 소량’이라면서 시인 박목월(1916~1978)의 명시 ‘나그네’를 암송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규 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