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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영양 산나물한마당과 함께하는
제5회 혜명동양학연구회 역사문화탐방
1. 일시 -2011년 5월22일
2. 답사지역-경북 영양
3. 답사지역및 일정
7시 30분 혜명학당에서 출발-8시 10분 동명휴계소에서 조식
1)석보면
남자현 여사생가, 두들마을
2)입암면
봉감 5층 모전석탑, 연당 서석지, 선바위 수석박물관, 산촌생활박물관
3)영양읍
점심식사(만포식당),산마을 한마당 축제장
4)일월면
조지훈과 한양조씨의 집성촌 주실마을
대티숲 산책
5)안동시 임하 수곡마을에서 임하댐 조망
안동시내에서 저녁식사(6시-7시)
대구도착(8시 30분)
4. 참가인원 오전 45명+90명 총 135명, 오후 45명
5.참가비 25,000원
6. 지도인솔자 류동학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4리 출신, 단국대 법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불교사상사 전공),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조선후기 영남학파 논문 준비중)
대전대 철학과 박사과정(동양철학 전공-사주명리학 논문 준비중)
전 건동대학교(안동정보대학) 공무원양성과 학과장,
현재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사주명리학 고전반 전담교수,현 영남일보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 6월부터 연재
전 영남방송(안동,영양,청송,영주,문경,봉화,의성예천),대구큐릭스대구,대경방송역학이야기. 조선시대이야기 5년간 방송 강의 진행
전 매일신문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칼럼연재(2009,4-2010년 6월)
경북도청입지선정과 경북경찰청 입지선정 풍수고찰
200여회 동양학(중국사,한국사,유학,불교,명리학,풍수지리학 등)을 주제로 외부특강
다음 카페-혜명동양학아카데미 운영 중(조선시대이야기,명리학이야기, 동양학이야기 방송강의 무료 시청가능)
연락처-053-745-8425
7.답사유적지 설명
1) 남자현(南慈賢)여사 생가
남자현(南慈賢, 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93년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여사는 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홍보를 중시조로 하는 영양남씨 통정대부(정3품상계의 품계로 당상관급)를 역임한 남정한(南廷漢)선생의 둘째 딸로서 1872년(高宗 9年) 석보면 지경동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김병주(金炳周)에게 출가하였다.
여사(女史)의 남편인 김병주는 의병으로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상부(喪夫)한 후에 수비면 계동(桂洞)으로 이사하여, 가난한 살림살이에 여사는 손수 길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3대 독자이며 유복자(遺腹子)인 어린 아들 성삼을 키웠다. 25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유복자 김성삼을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낸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2002년 독립기념관에 이 구절을 새긴 남자현지사 어록비가 세워졌다.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1]라는 시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도 하다. 1933년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에서 변장한 채 정탐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 남자현은 60세가 넘은 나이었으며, 보름에 걸친 옥중 단식으로 건강을 잃고 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곧바로 사망했다. 1962년 여성으로는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 등이 있다.)이 추서되었다(류관순열사는 3등급인 독립장). 국가보훈처 차관을 지낸 김시복이 남자현의 손자이다.
2) 재령이씨의 집성촌 두들마을과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
[류동학의 매일신문 칼럼 동양학 이야기]2010년 5월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재령 이씨 영해파와 영양 두들마을
이달 9일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 7개 가문(진성 이씨·여강 이씨·의성 김씨·풍산 류씨·인동 장씨·재령 이씨·전주 류씨)의 후손들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국 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오일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 ‘숭선에서’의 전설적 작가 강준용 등 수많은 문인(文人)을 배출한 영양군에 모였다. 이들 7개 가문은 조선 후기 퇴계의 학문적 계승과 영남 남인의 여론형성을 주도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주실마을’과 함께 영양군을 대표하는 문화마을로 재령 이씨 영해파(載寧 李氏 寧海派)의 세거지이다. 현재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전통한옥 체험관, 정부인 장씨 예절관,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유서 깊은 이곳에 7개 가문의 후예 400여명이 스승과 제자로 연결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고 우의를 다지기 위해 재령 이씨가 주관해 모였다.
재령 이씨 영해파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았다. 재령 이씨는 고려 성종 때 이우칭(李禹稱)이 경주 이씨에서 분적하여 황해도 재령에 세거하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모은 이오(茅隱 李午)가 경남 함안 모곡리에 정착하여 낙남조(落南祖)가 된다. 영남일대에 거주하는 재령 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예이다. 이후 이오의 증손 이애가 영덕군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고, 이애의 손자 운악 이함(雲嶽 李涵,1554~1632)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나랏골)에 충효당을 짓고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운악 이함은 진성 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시청, 시형, 시명, 시성, 시진)을 두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재령 이씨 영해파는 모두 운악 이함의 후예들이다.
이함의 3남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과 정부인 장씨 장계향 부부는 아들 7형제(상일, 휘일, 현일, 숭일, 정일, 융일, 운일)를 두었는데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七賢者)라고 불렀다. 특히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인 1남 정묵재 이상일(1611~1678) , 2남 존재 이휘일(1619~1672) , 3남 갈암 이현일(1627~1704), 4남 항재 이숭일(1631~1698) 그리고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1657~1730)와 6남 융일의 아들인 고재 이만(1669~1734)은 재령 이씨 ‘칠산림’(七山林)으로 불릴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석계의 장남 이상일(1611~1678)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사위가 되었다.
석계의 3남 이현일(1627~1704)은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임란 이후 영남인으로는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귀암 이원정(歸巖 李元禎)에 이어 세 번째로 판서직에 오른 인물이다. 갈암의 3남 밀암 이재(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인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 형제를 거쳐 다시 대산의 외증손인 전주 류씨의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1777~1861)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학맥이 외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재령 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관계에 있어 ‘지고 밑지라’는 가풍을 실천하며 신의로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덕을 베풀면서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키워낸 영남 남인의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사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장씨부인의 생애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퇴계-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이은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僉知)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재령(載寧) 이씨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이시명은 전실(前室) 김씨로부터 1남[상일(尙逸)] 1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 장씨로부터 6남[휘일(徽逸), 현일(玄逸), 숭일(嵩逸), 정일(靖逸), 융일(隆逸), 운일(雲逸)] 2녀를 두었다. 장씨 부인은 7남 3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던 것이다.정부인 장씨는 선조 31년 경북 안동 서후면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결혼전까지는 무남독녀로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으신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선생의 적통을 이으신 부친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를 모시고, 부모에게 온갖 사랑과 훈도를 받으면서 소녀시절을 보냈다.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 《소학》과 《19사(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 역사서)》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인 원회운세지수[元會運世之數]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 결혼당시는 내외법이 더욱 강화되어 가는 시대였지만, 남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과 함께 부부는 서로 손님처럼[相敬如賓], 더 나아가 서로 동지로서 공경하면서, 때를 맞추는 중용[時中]의 모범을 보이는 여성중의 군자로서 살아갔다. 특히 그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하게 보이는 딸이자 가정주부이면서도, 그 평범하게 보이는 힘으로 시가와 본가 두 집안을 모두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家]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하여 열 자녀를 제대로 키워냈다.
정부인 장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란·호란 같은 국가적·문화적 위기의 시대를 여성의 위치에서 어떻게 극복해 갔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과 같이 전쟁의 혼란과 사회적 격변을 겪음으로써 '어른'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여성이면서도 스스로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준 대표적 여성상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은 정부인 장씨를 맹자(孟子)나 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현명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다.
현대문학의 거장 작가 이문열
1948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서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基下曲]으로 등단 이 마을은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으로 그의 저서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많은 작품속에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는 무대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이 생가 주변에 에워싸고 있어 이문열이 왜 문학에 심취하고 또 많은 대작들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만하다. 현재 여산 문학연구소, 향토유물관을 건립하는 등 문화마을 조성하고 있다.
석계고택(石溪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이 건물은 조선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때의 학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이다.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이 서당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 선생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되었다.
유우당(惟于堂)
건축 이야기
이상도(李相度)의 주도로 1832년(순조32) 주사동(做士洞)에 짓기 시작하다가, 당시 이상도의 병환이 깊어지자 그의 맏아들인 이기찬(李箕燦)이 집이 완성했다. 소와(素窩) 김진우(金鎭宇)를 찾아가 집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였다. 김진우는 『서경(書經)』『군진편(君陳篇)』의 ‘오직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다.[惟孝友于兄弟]’라는 구절에서 ‘유우당이라고 했다. 이후 1900년대 초반에 유우당은 이돈호(李暾浩)에 의해 현재 두들 마을로 이건하게 되었다. 그 뒤 1980년 문중의 주도로 중수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판
유우당(惟于堂)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의 글씨이다. 응와 이원조는 조선 후기 영남남인 계열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퇴계-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 입재 정종로의 학통을 이은 학자로 19세기 대학자인 한주 이진상의 숙부이다. 성주 한계마을이 고향이다. 그는 영남의 남인이 관계에서 소외되었던 시기에 한성판윤, 공조판서 등의 실직을 거쳐 종일품 숭정대부의 품계에 오른 고관이며, 퇴계 이후 영남 주리학의 계통선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성리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1,700여 수의 시가를 남긴 문인이며, 다섯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한 탁월한 행정가였다.
유우당기(惟于堂記)
소와(素窩) 김진우(金鎭宇, 1786~1855)가 이기찬(李箕燦)의 부탁을 받고, 유우당의 건립 내력과 함께 당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기문은 『소와선생문집(素窩先生文集)』 권5에 실려 있다. 김진우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자는 계노(啓魯), 호는 소와(素窩)이다.
유우당중수기(惟于堂重修記)
1980년에 유우당을 중수하고 1981년에 주손인 이용희(李龍熙)씨가 중수한 내력에 대해 쓴 글이다. 중수기는 국한혼용문이다.
문중 이야기
- 항일운동가와 항일시인을 배출한 유우당
유우당은 이시명의 중형인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후손인 이상도(李相度)가 주창하고 이기찬(李箕燦)이 완공한 살림집이다. 원래는 주남리 주사동에 있었는데, 이돈호가 현재의 위치인 원리리 두들마을로 이건하였다. 유우당은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지역과 나라를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와 항일시인을 배출한 곳으로 이름이 높다.
- 이돈호(李暾浩, 1896~1942)
이돈호는 이시형의 후손으로 석보에서 출생하였다. 학문과 덕행으로 널리 유명하였는데, 1919년 5월에 경북유림단이 파리강화회의에 여화회서(黎和會書)를 김창숙(金昌淑, 1879~1962년)에게 은밀히 휴대하게 하고 파견할 때, 비밀리에 날인하여 투옥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건국사업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하여 1995년 8월 15일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 이병각(李秉珏, 1910~1941)
이병각은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선호, 어머니 권씨 부인 사이에 2남 5녀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대이고 족보에는 병각(秉珏), 나중에 호를 몽구(夢駒)로 하였다. 유림단 사건이 일어난 뒤 큰집인 유우당으로 출계하였다. 이병각은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세에 안동 광산김씨 김호영과 혼인하였다. 1915년 서울로 상경해 중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서울로 미치자, 항일운동에 가담 옥살이를 하면서 퇴학을 당한다. 1930년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머무르면서 반체제운동에 가담하고, 얼마 후 정세변동으로 귀국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청년운동 민중운동에 관계하며,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눈물의 열차』가 당선 되여 문단에 등단하게 되고 중앙일보에 1년간 근무를 한다.
이병각은 이육사, 김동리, 신석초, 오장환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특히 이육사는 이병각이 병으로 눕자, 동거하며 자신이 피하면 친구가 병이 더 심한 줄 알고 불안해한다며 오히려 가까이 지내며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병각은 몸을 추스르지 않고 작품을 쓰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41년 11월29일 만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병각은 『오직 진군을 할 따름이다』, 『생쥐이야기』, 『농민문학의 본질과 농본주의의 폭로』, 『풍자와 우화시에 대하여』 등 6년간의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시 22편, 소설 3편, 수필 7편, 평론 13편을 남겼다.
최근 이병각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2006년 4월에 두들 마을 석계고택 맞은편에 이병각 시비와 이병각 시인 안내판이 세워졌다.
3)영양의 탑문화
경상북도의 동쪽 경북 북부의 영양군은 영양 청정 고추와 일월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산나물, 반딧불이, 흑염소의 고장으로 유명하다.영양은 주곡리의 조지훈 생가, 감천리의 오일도 생가, 석보면 원리리(두들마을)의 이문열 생가 등이 있는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영양은 안동 못지않은 모전석탑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탑은 곧 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한 무덤이다. 예로부터 불가에서 가장 경건한 신앙 행위는 부처님의 묘소인 탑에 참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처님을 믿는 곳에서는 불사리를 얻어와 탑을 짓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감화를 받는 자리에서는 또다시 헤아릴 수 없이 사리가 거듭 생겨났다는 전설적인 믿음으로 후대의 분신사리를 등장시켜 탑을 지어 왔다. 심지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된 정성스런 공양물도 불사리와 마찬가지라는 신앙심을 빌어 오랜 세월 동안실로 끊임없이 탑을 세워 왔던 것이다. '모전석탑'이란 전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탑보다 모전석탑이 더 많이 유행하였다. 모전석탑은 그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석재를 벽돌처럼 작게 가공하여 전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유형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석탑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다만 표면을 전탑처럼 가공하여 축조한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탑으로는 경주 분황사 석탑(국보 30호)을 위시하여 파손된 그 동남쪽의 탑, 제천 장락리 7층석탑(보물 459호), 영양 현2동 5층석탑, 영양 봉감동 5층석탑, 영양 삼지동 석탑, 상주 상병리 석심회피탑이 있고 그밖에도 시대가 분명하지 않은 제천 교리 석탑, 안동 대사동 석탑, 군위 남산동 석탑 등이 있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면서 일반형 기단 위에 축조된 탑으로는 의성 탑리 5층석탑(국보), 의성 빙계동 5층석탑, 선산의 죽장사지 5층석탑 , 선산 낙산동 3층석탑, 경주 용장리 3층석탑, 경주 오야리 3층석탑, 청원 영하리 석탑 등이 있고, 입방체기단의 예로는 경주 남산동 3층 석탑과 경주 서악동 3층 석탑 등이 있다.
현1동 십이지 3층석탑(보물 제610호)은 탑의 전체 높이는 4.27미터이고,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며 3층 옥개석이 반쪽 깨어져 있고,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
4)선바위와 남이포에 얽힌 남이장군의 야사
입암면 연당리(慶北 英陽郡 立巖面 蓮塘里)입구에 우뚝솟은 선바위와 선바위 시설지구가 자리한 남이포(南怡浦)에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비슷한 야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옛날 선바위 안쪽 연당리(蓮塘里) 석백(石白) (속칭 돌백리) 석백지(石白池)가에 아룡(阿龍)과 자룡(子龍)이라는 형제가 살았다.남이장군과 대적하다가 항복하였다.
그 후부터 양군이 대전하던 이 계포(溪蒲)를 후인들은 남이포(南怡浦)라 하며 지금도 선바위 꼭대기를 처다 보면 칼 자욱이 뚜렷이 보인다고 한다.
지금은 영양군에서 선바위 위락및 휴양지구로 개발하여 호텔, 특산물판매장, 고추, 분재, 수석 전시관이 있고 선바위건너편 절벽 밑에 남이정사(八角亭)가 있으며 이 남이정사를 관람하기 위해 건너가는 석문교(石門橋)다리에 분수와 조명을 설치하여 영양군의 관광(觀光)명소(名所)로 알려져 있다.
이 선바위와 남이포의 남이(南怡)장군이 전설(傳說)속 인물이 아닌 실존(實存) 인물이므로 남이(南怡)장군의 행적(行蹟)과 야사(野史)를 적어보고 저 한다.
공(公)의 姓은 南이요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휘(諱)는 이(怡)로, 조선 태조조(太祖朝) 개국 일등공신(開國 一等功臣) 의정부(議政府) 영의정 (領議政)이신 충경공(忠景公) 휘(諱) 남재(南在)의 현손(玄孫)이며, 태종(太宗)의 부마(駙馬 사위)인 의산위(宜山尉) 시(諡) 소간공(昭簡公)이신 휘(暉)의 장손(長孫)이며 부사(府使) 빈공(份公)의 장자(長子)로 세종 25년(世宗二十五年 1443)에 출생 하셨으니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장손(長孫)이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증손(外曾孫)으로 세종과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7세때 무과(武科)에 급제 25세때 길주(吉州)에 나아가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이어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건주위(建州尉 만주땅)의 여진족(女眞族) 이만주(李滿洲)를 정벌할 때 또한 공을 세우고 돌아와 적개공신(敵愾功臣)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하고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시고 이듬해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르셨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한 후 유자광(柳子光)이 모함하여 장군을 모반(謀叛)한다 하고 백두산시(白頭山詩)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이오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라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라는 시(詩)는 명장(名將)으로서의 웅지(雄志)를 보여주는 유명한 시❯중 미평국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처 그 증거라 하여 국문(鞠問)을 받게 되어 죽었다. (예종원년, 1468년)
산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대장등(華城郡飛鳳面南田里大將嶝)에 계신데 자손이 없어 돌보는 사람이 없더니 6대 방손 약천 구만공(藥泉九萬公)이 수묘(修墓)하였고 1968년 족후손(族後孫) 정사(廷四)씨 영우(永祐)씨 들이 정성껏 치산을 하고 1971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어 화성군수(華城郡守)가 묘비를 세우게 되었으며, 사당은 소간묘(昭簡廟 의산위공 사당)에 함께 모시어 아우 되시는 군수 초공(郡守 怊公)의 자손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배위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좌의정(左議政) 익평공(翼平公) 람(覽)의 따님과 고성이씨(固城李氏) 서윤(庶尹) 호연(浩然)의 따님이시다. 순조(純祖) 18년(1818년)에 관작(官爵)이 복구 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구봉서원(龜峰書院)에 배향 되었다
5)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과 서석지
집안의 내력
정영방의 가계는 동래(東萊)에서 나왔는데 먼 조상인 정목(鄭穆)은 고려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고조인 정환(鄭渙)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가 되어 연산군 때에 직간(直諫)을 하다 쫓겨났다. 증조인 정윤기(鄭允奇)는 생원을 지냈으며, 조부는 진사 정원충(鄭元忠)이다. 부친은 정식(鄭湜)이며, 모친은 안동인으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가족 관계
정영방이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서 종조(從祖)인 정건원(鄭元健)의 아들 정조(鄭澡)의 양자가 되었는데 양모(養母)는 진성이씨였다.
부인은 전주류씨인데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된 기봉 유복기(柳復起)의 딸이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혼(鄭焜), 정쟁(鄭烆), 정렴(鄭燫), 정제(鄭焍)이고, 세 딸들은 각각 김시준(金時準), 생원 이신규(李身圭), 조정환(趙廷瓛)에게 시집갔다.
우애로운 형제
정영방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뛰어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성심을 다해서 상례를 마쳤으며, 형인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에게는 우애와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10리 거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맛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보내지 먼저 입에 넣은 일이 없었다. 형이 병이 나면 근심하여 잠을 잘 때에도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학맥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영방(鄭榮邦)의 자는 응보(應輔),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퇴계 학파인 서애 류성룡의 학맥을 이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학문과 시가 자못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다.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지만,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가 계속되고 스스로도 벼슬에 생각이 없어 낙향하여 진성(眞城) 임천동(臨川洞)에 머물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여생을 오로지 학문과 시(詩)로 소일했다 한다. 1636년(仁祖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 1동)에서 살았다 한다.
집 서쪽의 시냇가에 작은 연못을 파서 서석지(瑞石池)라 이름하고, 이 연못을 마주하여 집을 짓고 각각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으로 이름 붙였다. 1650년 봄에 선영 아랫동네인 송천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6월에 감기가 들어 7월 7일에 머리 감고 손톱 깎아줄 것을 명한 후 편안히 운명하였다. 이 때 나이가 74세였다. 안동부 동쪽에 있는 선어연(僊漁淵)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 묘소는 와혈지로서 유명하다.
마루 위에는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이 걸려 있다. 이 마을에는 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1979년 12월 28일 중요민속자료 10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서석지는 1982년 2월 20일 서울 산림청 임업시험장 강당에서『한국정원문화연구회』주최로 열린『서석지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문화재 전문위원 민경현(閔庚玹)씨가 이 정원(庭苑)이 갖는 독특한 양식과 조경술(造景術)등을 분석 평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하였다.
6)한양조씨의 집성촌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습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한양조씨들의 집성마을이기도 합니다.
한양조씨는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조적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와 영양군 세거 성씨이다.
안동의 한양조씨는 1600년대 중엽 조적(趙績)이 영주에서 안동으로 옮긴 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한양조씨가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고종 때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의 현손 조인벽(趙仁壁) 때부터이다. 조인벽의 아버지는 용성총관을 지내고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진 조돈(趙暾)이며, 아우 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조선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다. 조인벽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 1347~1417)은 찬성사, 조위(趙渭)는 우의정을 지냈다. 한양조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크게 번창하면서 한성으로 옮긴 조돈의 후손들이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한양을 본관으로 하면서 형성되었다.
입향경위는 1518년 기묘사화 때 조온의 현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조위의 증손인 현감 조종(趙琮)은 화를 피하여 영주로 이거하였다. 조종의
장자 조인완(趙仁琬)의 후손은 풍기 와단에,
차자 조예완(趙禮琬)의 후손은 임하면 오대리에 정착하고,
삼자 조지완(趙智琬)의 손자 조관(趙貫)은 병자호란 뒤 출세를 단념하고 옛 안동부 감천현(현 예천군 감천면)에 이거하였으며 후손 중 문과 6명, 진사 15명을 배출하여 일대에 두루 알려진 가문이 되었다.
사자 조신완(趙信琬)은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조신완의 증손자인 조적(趙績)이 세상을 뜨자 부인 청송심씨는 막막한 두메산골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무작정 길을 떠나 저전리에 정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양조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조신완(趙信琬)의 증손 조적은 안동 저전(현 서후면 저전리)에 정착하였으며, 조적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서후면 저전리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세거하여 오고 있다. 마을 북쪽에 천등산(天燈山)이 우뚝 솟아 있고 천등산에서 발원한 송야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저전리에 거주하는 총 190여 가구 가운데 한양조씨는 약 16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마을 동쪽에 쌍계서재(雙溪書齋)가 있다.
오자 조형완(趙亨琬)의 아들 조원(趙源)은 영양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일월과 주곡에서 크게 문호를 개창하였다.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原糖里: 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壺隱公 趙佺)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廷珩)선생은 1630년(인조8年)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壺峯) 덕순(德純)선생과, 옥천(玉川) 덕린(德?)선생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주실마을은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곡동 옥천종택(注谷洞 玉川宗宅)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고택(古宅)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7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록서당(月麓書堂)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등이 추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선생과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存省齋), 오른편은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과 간옹 이헌경(艮翁 李獻慶)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조지훈 생가(趙芝薰 生家)
•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
이 집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文章誌)에[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志操)있고 풍류(風流)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곡(注谷)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낙화〉〈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조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기었다.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이었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이었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7)대티골숲길
경북 영양군 최북단에 위치한 일월면 대티골은 낙동정맥의 내륙에 위치한다.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일월산을 품고 경북에서 가장 높은 해발 1,219m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낙동강 상류 지류인 반변천(伴邊川)의 발원지이자 연중 강수량이 풍부한 곳이다. 마을 뒷산인 일월산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며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동물 Ⅰ,Ⅱ급인 수달과 담비, 삵이 사는 청정자연지역이다. 대티골 숲길은 31번 옛국도와 일제강점기 임업자들이 만들었다는 상판길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 초반, 국도신설과 임업의 쇠퇴로 현재는 사용되지 않지만 최근 임도와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31번 옛 국도는 자연복원되었고 표지판만이 그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