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맛있게 읽은 57년 전의 일기
지난 달 KBS 1라디오 <정관용의 지금 이 사람>에 출연한 이종옥 씨 사연은 감동이 컸다.
1954년 생인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3년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며 하루의 삶을 반성하며 지난 시간을 회상할 수 있어 즐겁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쓴 일기 중 초등학교 3학년인 1963년부터 1975년 입대 전까지 내용을 추려 《몽당연필은 아직 심심해》라는 책을 냈다.
책에 삽화를 그린 이재연 씨 사연 역시 특별했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난 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칠십이 다 된 나이에 도서관 그림동아리를 통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기의 배경이 된 1960년대 충북 괴산의 산골 마을과 배움의 꿈을 가진 가난한 소년의 삶을 그림으로
다 표현했다.
정식으로 배운 그림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정겹다.
끼니를 거르고 학교에 가야하지만 배급으로 주는 강냉이죽을 거부하고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며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아이,
온 식구가 술지개미로 주린 배를 채우고 학교에 갔다가 대가리에 소똥도 안 떨어진 자식이 숙제도 안 해오고
아침부터 술 처먹었다고 선생님께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된 선생님은 숙직실로 불러 하얀 쌀밥에 계란후라이 무우짱아찌가 들어있는
자신의 도시락을 내주었다.
글짓기 대회 가던 날, 이쁜 선생님은 장터에서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사 입히고 몇 번을 때우고
꿰맨 타이야표 검정고무신을 벗기고 새 운동화까지 사 주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버스 타고 교육청 가는 길에 지독한 멀미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아침에 먹은 보리밥과 된장찌개를 다 토해 새 옷도 운동화도 얼룩졌다.
글짓기 대회는 참석도 못하고 중간에 내려 30리 길을 되돌아 오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년의 아쉬움이 애틋하다.
소 풀 먹이러 갔다가 외딴집의 잘 익은 살구 열매를 따러 나무에 올라갔다가 뜻 밖의 광경을 목격한다.
최목수와 과부 아줌마의 끙끙대는 소리~ 살금살금 나무에서 내려오다 주머니에서 빠져 나온 살구가 뜨락에
쏟아지는 바람에 최목수 한테 멱살을 잡혔지만 혼도 안 나고 돈 십 원을 받았다.
"오늘 횡재한 날"이라 쓴 일기를 읽으며 내 얼굴도 벌게졌다.
중학교 진학도 못 하고 재건 중학교 1학년 과정 다닌 게 전부인 그의 학력이지만 소년의 글은 진솔하고 섬세했다. 일기를 쓰면 배움과 삶에 의지를 다졌을 마음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대견하다.
이종옥 씨의 일기를 읽으며 오십여 년 전 내가 썼던 일기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림일기를 잘 썼다고 선생님이 상을 주셨다.
그때 부터 학년이 올라가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렸다.
그림 그리고 일기 쓰는 게 좋아 매일 일기를 썼다.
모아 뒀으면 제법 양이 많을 텐데 그 일기장을 내 손으로 다 태웠다.
아픈 엄마가 밥을 지을 수 없을 때, 또 한 푼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부업을 나간 엄마가 늦게 들어 오던 날이면
내가 밥을 해야 했다.
부엌 한 쪽 부뚜막에 가마솥이 있었는데 물을 데우거나 뭔가를 끓일 때 요긴했다.
어린 나이라 불 피우는 게 서툴어 불쏘시개 용으로 종이를 쓰는 게 제일 쉬웠다.
마땅한 종이가 없어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내 일기장을 한 두 장씩 뜯어 불을 피웠다.
사르르 불이 붙어 나무에 옮겨져 잘도 탔다.
그렇게 일기장이 모두 탔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아깝다.
그때 쓴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또 다른 나의 분신이라 보물처럼 여길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