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베드로)의 묘 앞에 서면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 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재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다.
찾아가는 길
제 2 경인 고속 국도 서창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빠져 나가면 42번 국도인 수인 산업 도로와 닿는다. 자연 주유소 길 건너편에 안내 푯말이 있다. 남동 정수 사업소 울타리를 끼고 20분 정도 걸으면 이승훈 묘에 다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