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민일보 황영준 칼럼 2010. 1. 11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이 쓴 자신의 신앙간증 ‘죽으면 죽으리라’에는 본인 이야기와
주기철 목사, 최권능 목사, 박관준 장로님도 소개하고 있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제 때 죽지 못한 자신을 두고 ‘실격된 순교자’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 신실한 신자들의 증인으로 살려두셨을 것이다.
안이숙의 어머니는 미국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성경학교도 4년이나 다녔다.
신앙생활이 철저했다. 일본으로 무역하는 남편은 불신자였고 친일 인사였다. 일본 관리들과 가까이 지냈고 전쟁 때는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딸이 감옥생활을 해도 흔들림이 없었다. 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떠나는 딸에게
“너 이번에는 정말 매일 죽어야 한다. 이젠 정말로 세상과는 아주 떠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세상은 다 잊어버리고 천성 문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천성문 외에 아무것도 보지말고 생각도 안해야 해!” 하고 당부했단다.
형무소에서 헤어지면서도
“예수님이 네게 사시게 하려면 너는 죽어야 한다. 매일 죽어야 해. 천성 문에서 만나자. 누가 먼저 가든지 천성 문 앞이다...거기서 만나자.” 하였단다.
모녀가 성경대로 살자고 다짐하며 일사각오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일본의 항복 직전이었다.
미군 B29 비행기가 떼를 지어 하늘을 덮고 폭탄을 쏟아놓았다. 일본 여러 도시와 군사기지가 폭격을 맞고 군인과 민간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평양에도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공습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면 간수들이 안이숙이 있는 제1방 앞으로 몰려왔다. 하나님을 믿는 그녀 곁에서 안전하기를 바라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날은 이보다 수 천 배나 더 무섭고 떨릴 거예요... 미국 비행기는 폭탄을 떨어뜨리고 불사르고 우리를 죽이지만 죽은 후에 더 무서운 것이 오니까요.” 하며 예수 믿으라 권했다.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 안이숙을 일제의 핍박과 전쟁 통에도 살려놓으셨다.
8‧15 조국광복. 칠흑 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소련군은 무지하고 야만적인 점령군이었다. 보는 대로 빼앗고 여자들을 괴롭히는 짐승이었다.
어느 날 소련의 앞잡이가 찾아왔다. 평양경찰서 유치장에서 보았던 공산당 그 사람이 소련군 중령과 함께 나타났다. “안 선생님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만 아시는 분이니 살아있는 천국을 제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모스크바로 모시고가서 산 천국을 똑똑히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한다.
안이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파티가 있다며 그녀를 데려갔다. 사실은 호랑이 굴에 납치된 것이다. 이 순간을 피해야했다.
틈을 타서 버선발로 도망쳐 나왔다.
그날 밤, 어머니와 함께 평양을 떠났고, 피난민들에게 총질을 하는 3‧8 사선(死線)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무신론 악마의 세력에서 구하시고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안이숙의 일사각오 신앙은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부터 미국에 전해졌다.
만주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바이람-Byrum(한부선-Bruce F. Hunt 동역자)이 글을 썼던 것이다. 그녀가 박관준 장로님과 ‘죽으면 죽으리라’ 한 마디를 남기고 일본 제74회 제국의회에 들어가 조선기독교 탄압을 규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투옥된 사실을 소개했다. 그가 쓴 소책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수 십 만권이 미국과 캐나다에 배포되었다. 태평양전쟁 직전에 강제출국을 당해서도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 교회 형편과 안이숙을 소개했다.
어느 날 안이숙을 찾아온 미스 코오가 감격스러워하면서
자기 어머니가 보내준 1천불을 미국행 여비라고 내놓았다.
“아! 당신은 우리 미국에서 굉장하게 이름이 났는데도 당신 자신이 어떤 이인가를 모르시는군요.” 하며 미국 방문을 청했다. 안이숙은 알지 못했던 일이다.
1948년, 3개월 작정으로 간증집회차 태평양을 건넜다.
그녀는 소원대로 침례교신학교에 입학하고 결혼도 하여 미국에 주저앉았다.
에스더(Esther)라는 이름으로 많은 교회를 방문하여 천황주의 일본, 하나님을 거역한 일본의 교만과 멸망을 말하고 한국 교회의 믿음의 승리를 간증했다. 한국 전쟁 전란은 이렇게 피했다.
김두영 목사님이 1938년 7월 어느 날 평양이천교회 집회 중에 교회가 경찰의 공문서를 받았다.
‘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國家至上)이냐 종교지상(宗敎至上)이냐. 책임 있는 답변을 하라.’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방성대곡을 했다고 말한다.
오늘 나는 과연 핍박과 투옥과 죽음이라는 뻔한 결과를 알면서 신자다운 대답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