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책, 반려(伴侶) 북(book)
시인 하재영
“지난 명절에 우리 집은 동물원이 되었습니다.”
운영하는 카페 ‘시월(詩月)’를 찾았던 어느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동물원이라니?
동물원을 찾았던 몇 군데를 떠올리며 동물들을 상상했다. 교사로 있을 때 에버랜드 내에 있는 동물원을 여러 번 들렀다. 수학여행으로 아동들을 인솔했기 때문이다. 사파리 투어용 버스를 타고 호랑이, 사자들을 보면서 환호했다. 한번은 호랑이가 짝짓기 하는 모습도 보았다. 보기 드문 장면이라 아직도 그 장면은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해외여행에서도 동물원을 찾았던 곳이 여러 곳이다. 가족들과 베트남 나트랑 여행 중 빈펄(Vinpearl) 리조트 내에 있는 동물원은 손주들과 함께 했던 곳이라 더 의미를 두게 된다. 백호, 원숭이, 기린, 하마 등 다양한 동물들이 어린 손주들의 관심을 끌기에 나 역시 천천히 걸으며 동물들의 생김새를 살폈던 곳이다.
모든 동물들은 사람과 일정한 거리에서 자기들의 영역을 확보하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닌 것 같다. 많은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글쎄 큰 녀석은 고양이를. 작은 녀석은 개를 데리고 온 거예요.”
시집 장가갈 나이가 지났음에도 애인을, 아니 출가하여 손주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넋두리를 그냥 웃음으로 뭉개기에는 어딘가 씁쓰레한 세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동물을, 식물을 소위 말해서 ‘반려(伴侶)’란 단어를 붙이며 생활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이 으레 그렇듯 집안 곳곳에는 동물들이 있었다. 외양간에는 소 한 마리가 눈을 끔벅거리고, 돼지우리에는 돼지가 꿀꿀거렸다. 부엌에서 나오는 자싯물(개숫물)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었다. 닭도 길렀고, 토끼도 기른 적이 있다. 그중 우리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동물은 바둑이었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개 이름을 흔하디흔한 바둑이라고 불렀다. 대문 안쪽에 목살이로 묶어 두기도 했지만 밖에 나갈 때는 목살이 없이 우리를 따라 나왔다. 들과 산을 누비다 집에 되돌아갈 땐 바둑이는 우리보다 빨리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야, 바둑아 잘 잤니? 너 도둑 들어오지 못하게 집 잘 지켜!”
아침에 일어나서도, 잠자기 전에도 묶여있는 바둑이와 말놀이를 했다. 애꿎게 바둑이에게 화풀이를 한 적도 있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바둑이에게
“야. 저리 못가. 너 싫단 말야.”
대부분 한국의 가정에서 그랬듯이 개 키우기는 한 여름 복날이 지나면서 마무리 되었다. 복날 보양식으로 바둑이를 식탁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게 다 시골 주택에 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안마당, 바깥마당이란 공간에서 동물들은 가족처럼 생활했다. 방 안에서 생활하지 않았지만 동물들은 한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들은 경제적이든, 영양적이든 어느 순간 송아지로, 강아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골 살이를 벗어나면서, 직장상활하면서 동물을 곁에 둔다는 일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 등살에 어린 진돗개를 아파트에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였다. 남쪽 베란다에서 기르던 진돗개는 쑥쑥 자라 서너 달 만에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랐다. 결국 분양했던 집으로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기르지 않았다. 식물 역시 관심을 두어야 함에도 몇 개월 지나면 말라비틀어져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적을 두었던 직장을 은퇴하고 귀향하면서 나는 아파트보다 넓은 주택을 소유하게 되었다. 새벽이면 이웃에서 키우는 수탉 울음소리도 들리는 청주시 변두리였다. 주택에 딸린 터도 넓어 온갖 것을 들여놓아도 빈 공간은 넉넉했다. 자연스럽게 화분은 물론 개집도, 고양이 집도 한 채씩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내 소유로 동물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수시로 집을 비우는 습성으로 그것들을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빈 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양이집은 이따금 길고양이들이 찾았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사료를 고양이 집 앞에 주었다. 개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뒤쪽에 두었다. 두었다기보다 처박아 두었다란 표현이 옳을 것이다.
대신 다달이 임대료가 들어오는 창고 두 동 중 한 곳을 내 보내고 그곳에 책을 넣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하던 도시에서 유일하게 남았던 헌책방(40여 년 운영)이 없어지려 할 때 인수까지 한 상태였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낸 사람으로 한 도시의 헌책방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헌책방에 있던 책들도 틈틈이 옮겼다. 오랫동안 시골집에 쌓아두었던 책은 이미 옮긴 상태였다. 창고는 서고로 자리잡아 갔다. 종종 주변 분들도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왔다. 2021년 귀향 후 책을 넣기 시작한 창고는 완전 서고로 탈바꿈하였다. 명칭도 카페 ‘시월(詩月)’자를 따서 ‘시월서고(詩月書庫)’라고 칭하였다.
창고였던 곳이라 한 겨울 추위와 한 여름 더위, 장마의 습기는 내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겨울이 서서히 물러갈 때였다. 카페 ‘시월(詩月)’ 앞 낮은 아파트에 갇혀 있던 노인 한두 명이 보이기 시작하며, 식물들도 순을 내밀었다. 그 순에는 꽃망울도 있고, 쑥과 냉이도 있었다.
나 역시 겨우내 들어온 책을 구석구석에 넣는 일로 궁리를 해야 했다. 책 넣을 자리가 좁았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 정리하고, 정리했다. 사람만 간신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책들은 서고를 차지하며 자신들이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 정도가 되었다.
봄을 맞아 서고로 들랑거리는 발길이 잦아졌다. 카페 ‘시월(詩月)’에서 책을 읽다가도, 화분을 만지다가도 서고로 향한다. 아직은 눈 밝아 책 제목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후일 눈은 침침하고, 쓰다듬던 책들은 꿔다놓은 보리 짝처럼 먼지 쌓인 애물로 머물(지금도 그렇지만)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책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나를 힘나게 하는 ‘반려’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마 전 김형석 교수의 글을 신문에서 읽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삶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 글에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았기에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백 살 넘게 사는 비결이었다고 했다.
서고 어딘가에는 김형석 교수의 오래 전 책도 있다. 또 시집도 몇 천 권 있다. 동물원 이상으로 다양한 동물들을 설명한 동물도감도 여러 권 있다. 뿐만 아니라 동물을 소재로 쓴 동화집, 소설집, 시집도 있다.
시월서고!
쌓여있고,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다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책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들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위로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고에 들랑거리며 책을 만지고, 넘겨보기도 하고, 책의 키 높이를 같이하려 꽂았던 책을 옮기기도 한다.
그것이 내게는 즐거움이다.
그것이 반려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24년 3월 31일(일) 카페 ‘시월(詩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