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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 - 정치/이수태
논어는 그 자체가 탁월한 정치 교과서다. 그동안 논어가 일반 대중 사이에서 무슨 인생론 정도로 막연하게 여겨져 온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은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논어는 수많은 정치적 단편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때문에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논어란 단지 대다수 농민과 노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소수 귀족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호되게 비판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논어를 정치 교과서로 규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소 과장된 무엇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논어가 다루는 정치의 논리는 너무 단순하고 이상적이기만 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치 입문생이 참고할 만한 처세훈도 없고 권력의 작용에 관한 현실성 있는 세부항목도 없고 『맹자』에서와 같은 그럴듯한 정치이념도 없다. 그 때문에 크릴(H.G.Creel)과 같이 공자에 대해 비교적 많은 연구를 한 사람도 노나라에 도둑이 많아지는 것을 걱정하는 계강자에게 공자가 “단지 당신께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하더라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안연/19의 경우를 두고 이렇게 논평하였다.
“이것은 훌륭한 설교일지는 몰라도 범죄의 만연을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언으로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물론 그때 공자의 목적이 실제적인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러려고 하였다면 실제 그럴 수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공자는 중국문화의 최고 거장으로서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만약 그때 실제로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았다면 그 일을 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이 공자의 정치학이 정치학 이전의 단순한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논어가 정치 교과서가 되는 데에 방해된다기보다 오히려 든든한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된다. 실제 공자의 이 단순하고 이상주의적인 정치학을 배운 제자는 모두 노나라의 중요한 정치인이 되었다. 자로와 자공, 염유는 물론 중궁, 민자건, 자유, 자하, 공서화 등도 모두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스승의 이상주의적이고 단순한 가르침을 허황하게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다함없는 실천적 과제로 여겼다. 이러한 현실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논어를 보면 공자는 정치(政)를 바로잡는 것(正)으로 이해하면서 이 바로잡는 것은 위정자의 바른 몸가짐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란 바로잡는 일입니다. 당신이 올바름으로써 앞장선다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12/18
따라서 여러 곳에서 공자는 정치의 본질을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일관된 관점의 간단한 변주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
계강자(季康子)가 물었다.
“권장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공경스럽고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엄숙히 정사에 임하면 공경하고 효성과 자애를 다하면 충성스러워집니다. 착함을 거양하여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권장할 수도 있겠지요.” 2/20
권장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자면 원칙적으로 위정자인 당신이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공자는 확고한 태도를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여러 충고가 자기 자신의 향상에 대해 절망하는 대부분의 위정자에게 얼마나 공허하게 들렸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들은 정치가 무엇을 ‘하는 것’이라는 완고한 전제를 했었기에 몸가짐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존재 문제는 그것이 숨겨진 것이면 숨겨진 것일수록 위정자의 모든 드러난 행위보다 더 빨리, 더 광범위하게, 더 속속들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공자는 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확고히 붙잡고 있었기에 어떤 구체적 과제 앞에서도 이 단순한 원칙을 거침없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에게 위정자 자신의 바른 몸가짐(其身正)으로 압축되는 공자의 정치학은 한없이 단조롭게 여겨졌고 심지어 사람들은 공자의 이러한 입장을 막연히 정치학 이전의 그 어떤 것으로 간주해 왔다. 이는 맹자의 역성혁명 이론 등이 오히려 훨씬 본격적인 정치학처럼 인식해 온 것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공자의 원칙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로 이 단조로움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위정자의 바른 몸가짐이 온전히 전체 현실의 변화에 이어진다는 데에는 확실히 신비로운 측면이 있다.
이 단조로움 속의 신비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설혹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 백성을 유도(有道)한 데로 이끌어 가고자 한 계강자의 계획을 공자가 반대하고 오직 계강자 자신의 바름만을 촉구한 공자의 태도도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을 논어 단편에서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저 정치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정(司正)이니 부패 척결이니 하는 일련의 되풀이하는 조치가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새로움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선뜻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공자의 이 단조로운 정치학은 기실 “己所不欲,勿施於人(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이라는 공자의 일반적인 원칙을 정치적 차원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하고자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타인에게 어떠한 것도 베풀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함으로써만 우리는 남에게 나아갈 수 있고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이 원칙은 공자의 권고이기 이전에 객관적 법칙이다. 그러나 계강자 등의 위정자들, 심지어는 그의 제자마저 대부분 이 교설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의 향상이 정치라는 객관적 세계에 아무런 매개도 없이 이어질 수 있는지 그들로서는 이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맹자마저도 “한갓 착함이 세상을 바로잡기에는 부족하다.”라는 말을 지지할 만큼 공자의 이러한 생각은 전통 유교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이 몰이해의 한 장면이 헌문/45에 극히 시사적인 한 단편으로 남아 있다.
자로가 군자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경(敬)으로써 자신을 닦는다.”
자로가 말했다.
“그러할 뿐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닦아 사람들을 편안케 한다.”
자로가 말했다.
“그러할 뿐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부심했던 것이다.” 14/45
여기서 “경(敬)으로써 자신을 닦는다.”라는 말은 자로의 “그러할 뿐입니까?”하는 불만족스런 반응에 따라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라는 데에까지 부연되지만 이는 자로의 이해력에 좀 더 근접해 가기 위한 공자의 노력일 뿐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닦는다는 원칙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거나 물러선 것이 아니다. 따라서 如斯而已乎?를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하는 공손한 반문으로 해석하여 공자가 그에 따라 노력해야 할 과제를 단계적으로 제시했다고 보는 종래의 해석은 이 대화의 민감한 쟁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자로의 반문이 마치 공자의 더 차원 높은 답변을 유도하기 위하여 미리 짜 놓은 각본처럼 되어 있는데 이 어색함도 이 대화가 잘못 이해됐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다.
공자는 사실 군자에 대해 무슨 거창한 개념정의를 기대하였음이 틀림없는 자로에게 “경(敬)으로서 자신을 닦는다.”라는 한 마디로써 일부러 그 어떤 곤혹을 안겨 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완고함에 부딪혔기 때문에 공자는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고 하는 말로 修己의 의의를 피력하는 대신 그것은 “요순도 오히려 부심했던 것이다.”라고 말하여 더 이상의 퇴로를 강하게 차단하였던 것이다. 그가 정치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오로지 질적인 그 무엇이었지 전혀 양적인 것이 아니었다. 양이 질에 종속한다는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공자의 대원칙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이 단순한 정치학이 그 단순함만을 이유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한 변화의 계기가 어떻게 마련되느냐 하는 것을 숙고하고 그 진정한 변화의 계기로서 위정자 자신을 바로잡는 일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주목하고 있었던 사람은 뜻밖에도 정치 일선에 종사하고 있던 자공이었는데 그는 이와 직접 관련된 두 개의 단편을 남기고 있다.
자공(子貢)이 말했다.
“주(紂)의 선하지 못함이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하류에 처하기를 싫어한다. 천하의 악이 다 거기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9/20
자공(子貢)이 말했다.
“군자의 잘못은 마치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잘못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우러르게 된다.” 19/21
확실히 자공의 언급은 공자의 단도직입적인 그것보다 적지 아니 설명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는 주(紂)의 실제 선하지 못함과 알려진바 선하지 못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미묘한 언급을 통하여 위정자와 천하 사이에 구조적으로 형성되는 일련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또 자장/21에서는 군자를 일월에, 민중들을 그 일월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비유함으로써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는 위정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강조하여 역시 그러한 상관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위정자의 자리는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증폭되는 특별한 자리라는 점이 자공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이 점은 공자가 정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에서 애쓰고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주지시킨 데에서도 발견되는 점이다.
자장(子張)이 정사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사를 맡아봄에는 안일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정사를 수행함에는 충성으로써 해야 한다.” 12/15
자로(子路)가 정사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하고 애써 하여라.”
더 청하자 말씀하셨다.
“안일하지 마라.” 13/1
이는 바로잡는 기능으로서의 정치를 담당하는 자가 자신의 임무 수행이 가지는 파급 효과를 고려함이 없이 국소적 안일에 젖으면 전체 현실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미치게 될 해악을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체제의 사회에서든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소수 지배층의 계급적 경직화는 모두 이러한 안일의 결과였다. 안일하게 누리는 위정자의 자리는 실상 모든 백성이 쳐다보고 그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대하는 특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보다 근접되게 관찰하려면 역시 공자가 다양하게 언급하는 덕(德)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정자의 몸가짐과 세상을 바루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매개도 필요 없지만, 양자를 잇는 현상학적인 관계점을 우리는 덕(德)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이 덕이라는 개념은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에게는 가까운 생활 용어가 되어 있는데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 생활용어로서의 덕이 논어에서 공자가 설파하는 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은 덕을 virtue나 moral force라는 용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서양인에 비하면 커다란 이점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덕을 주로 정치 지도자의 자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은 아마 어느 정도는 봉건주의 시대의 권력질서라는 사회적 여건에 의해 더욱 강조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덕에 대한 강조에는 패권의 추구라는, 춘추 말기를 먹구름처럼 휘덮고 있던 눈먼 유인(誘因)과 그러한 유인에 꼼짝없이 휩쓸리고 있던 무자비한 권력,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짓밟히고 있던 대다수 민중의 고통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공자는 덕을 무엇보다 외형적인 것에 대한 대응개념으로 설정하였다.
덕은 곳곳에서 힘(力:14/35)에, 겉모습(色:9/17)에, 정령(政:2/3)에, 영토(土:4/11)에, 제재력(殺無道:12/20)에 대응하면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천리마는 그 힘을 일컬을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컬을 것이다.” 14/35
황간(皇侃)의 설명처럼 이 말은 “당시의 풍조가 덕을 경시하고 힘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주자가 그의 『논어 집주』에 인용한 윤돈(尹焞)의 해설처럼 “재주만 있고 덕이 없는 것”을 경계하는 평면적 차원보다는 한 차원 높은 의도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눈, 특히 권력질서를 포함하여 정치현실을 보는 눈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덕과 힘은 두 개의 대등하게 병렬된 요소가 아니다. 덕은 힘의 근원이며 현실적인 모든 힘의 출현과 소멸에 작용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이 보이지 않게 나무를 자라게 하고 무성하게 하듯 현실의 표면적인 힘을 엮어내고 연출한다. 따라서 천리마 이야기는 우리가 사물의 어느 측면에 시선을 주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덕의 작용은 이인/25의 한 조그마한 단편 속에 아주 소박하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4/25
공자는 이 말을 결코 거창하거나 은밀한 어떤 것에 대한 암시로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호기심은 이 짧은 말에서 몇 가지 사실을 분석해 낼 수 있다. 우선 덕은 외롭지 않다는 말은 춘추시대 말기의 현실 가운데에서 덕이 얼마나 소외되고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이 점은 위영공/4의 “유(由)야, 덕을 아는 자는 드물구나!”하는 말에 의해서도 잘 뒷받침된다. 그러나 공자는 이 각박한 가운데서도 덕은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웃(隣)은 역시 단순한 이웃이면서도 의미 있는 한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이 이웃은 바야흐로 거대한 연대를 지어내는 고리라는 점이다.
고대 중국의 성왕들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들은 사실 모두 이 고리와 관련이 있다. 문왕(文王)으로 추대된 주나라의 서백(西伯)도 이 이웃이라는 작은 고리의 어마어마한 연대를 통하여 주대 천 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공자가 덕정을 강조한 것은 그가 그만큼 정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외유 중에 만난 초나라의 대정치가 섭공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섭공(葉公)이 정치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까이 있는 자는 기뻐하고 멀리 있는 자는 오는 것입니다.” 13/16
공자의 경험적 인식 방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 단편은 아무런 해설이 필요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정치의 본질을 제시해 주고 있다. 덕에 대한 이해 없이 권력과 지배와 통합을 지향하는 것은 그런 뜻에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영토(領土)를 마음에 둔다.”라는 공자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어쩌면 권력에 대한 추구는 덕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덕에 대한 절망의 양상이 바로 권력에 대한 추구인지도 모른다. 위정자의 덕을 현상학적 관계점으로 하여 바른 정치가 구현되는 이 전체 모습을 공자는 위정/1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치를 덕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뭇 별들이 그를 둘러싸고 도는 것과 같다.” 2/1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는 특별한 별이다. 그러나 그 움직이지 않음을 통하여 그 별을 둘러싼 다른 뭇 별의 움직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한다. 이것은 남면(南面)이라는 유교의 독특한 통치 철학과 관련되는데 남면에 관해서는 위영공/5에 더욱 명료한 공자의 설명이 남아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 자는 곧 순임금이실 게다. 무릇 무엇을 하셨겠느냐? 스스로 공경히 한 채 똑바로 남면하셨을 뿐이다.” 15/5
이는 모든 ‘하는 정치’에 대립하여 진정한 정치의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남면 사상 안에는 하는 정치에 대한 의식적 경계가 포함되었다. 위정자는 그의 〈함〉을 통하여 그의 〈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창출하지 못한다. 모든 〈함〉은 〈됨〉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미리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도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니 정치의 진정한 치중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명백한 것이 아닌가?
공자의 정치학은 이 단순한 입장으로 시종하고 있다. 정치에 관한 공자의 이러한 근본적 입장은 자연히 정치(政)라는 개념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치보다 훨씬 넓고 깊게 설정한다. 논어에는 이에 관한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그 중 위정/21은 가장 직접적으로 그 점을 보여주는 단편이라 하겠다.
혹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효성스러우시오! 효성이야말로 형과 아우에게 우애를 다하게 하고 정사에까지 베풀어지는 것이오!'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도 또한 정치니 어찌 그것만을 정치라 하겠소.”2/21
정치의 개념을 이렇게 넓게 잡고 대화의 상대방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느 정도는 공자의 의도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정치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염유에게 보여준 것도 그 중 전형적인 것이었다.
염자가 조정에서 돌아오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늦었느냐?”
염자가 대답했다.
“정사(政事)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일이다. 정사가 있다면 비록 내가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나도 함께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13/14
적지 않은 해설자들이 취지가 명백한 이 단편을 두고 공자가 자신이 등용되지 못한 데에 따른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한 것은 뜻밖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그는 진정한 정치(政)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려 했을 뿐이다.
계강자의 조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바로잡는 일을 하고 있다면 비록 내가 그 일을 함께 도모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나라에서 전개되는 크고 작은 모든 실정에서 내가 그것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공자는 말하려 했던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정치냐 하는 것을 둘러싸고 공자와 염유가 보여준 현격한 시각차는 학이/10에서 자공과 진자금(陳子禽) 사이에서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자금(子禽)이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한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정치를 아십니다. 스스로 그것을 구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누가 일러준 것입니까?”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온후함과 선량함과 공손함과 검약과 겸양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얻는 것이오. 선생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여느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오.” 1/10
공자에게서 한 나라 정치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구체적 정보를 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 척도에 기준하여 그 나라의 인정과 물정을 보고 듣고 경험함으로써 피할 수 없이 일정한 판단에 이르는 것이다. 진자금은 공자가 그 나라 정치의 실상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것이 자못 신통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실상에 접근하는 경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정한 두 가지 경위, 즉 스스로 정보를 구하는 것과 누군가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정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대해 자공은 공자께서 그 나라 정치의 실상을 아는 것은 공자가 객관적 정보를 입수하여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그런 기성의 정보를 가져다주어서도 아니며 한 나라의 정치가 구현해야 하는 마땅한 덕성을 척도로 삼아 그 나라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임을 피력한 것이다.
이처럼 질문과 대답이 서로 차원을 달리함으로써 독자가 한 차원 더 높은 세계에 대해 눈뜨게 하는 것은 논어 단편만이 가지는 특장이라 하겠다. 정치의 개념을 본질적인 깊이에서 사용한 흔적은 좀 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경지에 있지 않으면 그 사리를 논의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不在其位,不謀其政(8/15,14/27)이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의해서는 안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현상도 결국 政을 공자가 생각했던 만큼 본질적인 깊이에서 보지 않고 피상적인 눈으로 바라본 결과라 할 것이다.
제경공(齊景公)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임금은 임금 노릇을, 신하는 신하 노릇을,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하고 말한 것이나 자로가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하는 질문에 “반드시 명칭을 바로잡겠다.”하고 말한 것도 모두 정치를 특수한 영역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사의 보편적 원리에서 다룸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정치가 인간성의 단순한 연장선에 있다면 정치의 원리는 단지 인간의 원리이고 인간의 지향이 바로 정치의 지향이라는 공자의 단순한 정치학은 충분히 그 의의를 갖는 것이다.
끝으로 봉건질서 재건론, 춘추말기의 현실에서 공자의 정치적 입장이었다고 알려져 온 한 가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공자의 정치적 목적이 와해하여 가던 주대 봉건질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은 서구 민주주의의 도입 과정에서 처음 제기하였고 그것은 공산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실상 논어에는 공자가 주대 봉건주의를 재건하려 했다는 어떠한 증언도 남아 있지 않다. 주공(周公)에 대한 그의 남다른 존중이 그러한 주장의 근거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비약이다.
또 팔일편 첫 두 장에서 공자가 삼가(三家)의 참람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그것 역시 주대 봉건질서를 옹호한 증거라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밖에 공자가 주대 봉건질서를 재건하려 했다는 이렇다 할 입증 자료는 더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봉건질서 재건론이 등장하였을까? 그것은 공자를 봉건질서 재건론자로 규정해 둘 현대사회의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대부분 사람은 공자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공자에 대한 비판을 마련해 둔 사람이며 바로 그들의 선입견에서 봉건질서 재건론이 태어났던 것이다.
논어를 온통 가득 채우는 정치에 관한 명백한 여러 언급을 제쳐 두고 구태여 그를 단순한 근왕주의자(勤王主義者)나 봉건적 위계질서 신봉자로 격하하고자 가당치도 않은 몇몇 단편을 억지로 그 증거라고 내세우는 안간힘은 기이한 느낌이 들 정도다. 공자는 국민투표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주왕(周王)을 중심으로, 그리고 노나라의 군주를 중심으로 봉건적 위계질서를 재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의 지배적인 질서인 임금-신하-백성의 질서를 현실적인 질서로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질서를 뒤엎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거나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어지러움을 개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자의 목적이 봉건질서의 재건에 있었다는 결론을 당연히 도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시 군주가 무력화된 가운데 삼가(三家)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권력질서를 공자가 사실상 인정하였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접근 방법이다. 질서의 와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됐고 그러한 현상은 훨씬 근본적인 문제점에서 비롯한 것인 만큼 표면적인 질서의 재정립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따라서 공자가 계강자의 참람을 지적한 것에서 그 지적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공자로서는 계강자가 노나라의 실권을 쥔 유력한 대부로서 스스로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이상적인 권력구조의 확립을 피상적으로 도모하는 것보다 백 배나 더 중요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와 같이 인간 행위의 깊은 동기를 통찰하고 그 위에서 바른 행위의 길을 제시한 자에게 어느 한 시대가 확보한 정치적 비전 ― 그것이 공화정이든 프롤레타리아 독재든 ― 을 강요하는 것은 모든 정열의 시대가 흔히 그러했듯 본질을 비켜가는 일련의 역사적 착시(錯視)일 뿐이다.
그는 민주 공화주의자가 아니었듯 봉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에게 봉건질서 재건론자의 누명을 씌우는 것은 손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손쉽게 규정하려는 자들의 값싼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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