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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아우구스띠노(1869~1936) 신부가 1900년6월12일 초가집 성당을 설립하였다.
호근동 하논성당(한논성당)터
위치 ;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 큰 소나무 주변
시대 ; 조선말(1900)
유형 ; 종교유적
호근동_하논성당터
호근동_한논성당복원계획도
하논은 원래 3만~4만 년 전에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생긴 대표적인 마르형(型) 분화구로서 바닥 면적은 216,000평, 너비는 1,000~1,150m이고, 높이 10~15m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하루 1,000~5,000ℓ의 용천수가 나오고 있으며, 500여 년 전까지는 호수였으나 물을 빼고 논으로 만들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하논은 제주 말로 ‘큰 논’이라는 뜻의 ‘한 논’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에는 5만여 년 동안 형성된 깊이 7m의 습지 퇴적층이 있어 시대에 따른 식생과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은 산남 지역 최초의 성당인 한논본당이 설립되었던 곳이다.
1899년5월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제주본당을 설립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Peynet)주임신부와 함께 보좌신부로 제주도에 도착한 김원영 아우구스띠노(1869~1936) 신부가 1900년6월12일 초가집 성당을 설립하였다.
1900년이면 대부분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전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몇 안 되는 한국인 신부로서 김원영 신부는 초기 제주도 남쪽 하논 지역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원영 신부는 섬 전역에 만연한 미신 숭배에 혀를 내둘렀다. 제주 사람들은 뱀을 칠성(七星)할망이라며 숭배하고, 집에 불이 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섬이나 해안가 지방은 전통적으로 미신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 정도인 줄 몰랐다. 문란한 풍속도 복음화의 큰 장애였다.
김 신부는 "제주의 주색잡기(酒色雜技)와 축첩(蓄妾)은 대한의 다른 도시는 물론 타국 어느 곳보다 심하다"며 주색잡기를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김원영 신부가 1901년에 집필한 「수신영약(修身靈藥)」 한글 필사본에 나타나 있다. 총 43장 분량의 「수신영약」에는 천주교 교리 특징, 천주교에 대한 제주민들의 의식, 제주도 풍습과 미신 등 사료 가치가 높은 글이 적혀 있다. 구한말 가톨릭과 토착종교(민간신앙)의 충돌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김 신부는 이런 상황에서 풍속과 미신 타파, 그리고 천주교를 올바로 알리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호교서이자 전교서 성격의 「수신영약」을 저술했다. 문답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의 글은 매우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다.
김 신부는 천주교가 서교(西敎)인 까닭에 믿을 수 없다는 데 대해 "불교와 유교도 인도와 중국에서 시작된 서방의 타국교"라고 말했다. 또 천주교는 임금과 어버이 존재를 부정한다는 뜬소문에 대해 "박해시대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신봉했기에 붙여진 말인데, 지금은 선교사들이 대황제 폐하의 공문을 갖고 대한 13도를 누비며 천주 성교를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횡행하는 미신과 이단적 풍속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척결 의지를 드러냈다.
"남녀가 많은 장부와 아내를 두는 것은 혼인의 도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호색(好色)하며 함부로 놀면 금수와 다를 게 없다. 제주에서 그런 것들이 아주 없어지기를 천주와 성모 마리아께 빌고 있다."
김 신부는 마지막으로 "제주민들이 육신에 병이 들면 선교사들에게 약을 구하러 오는데, 영혼이 질곡에서 빠져나오면 육신도 무병(無病)하니, 육신에 좋은 약만 청할 게 아니라 영혼에 좋은 약을 구하라"며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당시 김 신부는 갓 서품을 받은 새 신부였다.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선교 열정이 어느 때보다 투철한 시기였기에 의욕이 넘쳤다. 또한 성품이 강직했다. 하지만 그런 의욕과 기질이 오히려 도민들의 반발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은 측면이 있다.
김 신부 사목관할구역인 정의군 지역에서 유독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신축교안이 그의 관할구역인 대정군에서 촉발된 것만 봐도 그의 선교방법과 교안 발생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 신부는 "김 신부가 재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시간과 장소를 잘못 택한 것 같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 신부의 선교 열정까지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는 「수신영약」 말미에서 "영혼에 좋은 약은 진시황의 불사약보다 억천 배나 유익하여 불사불멸할 것"이라며 도민들에게 천주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899년 11월11일 한논공소를 설립하여 신자 20명, 예비자 30명을 두었으며 1900년 6월 12일 한논본당을 설립하여 신자 수 137명 예비자 620명을 기록할 정도로 공격적인 선교를 하였다.
그는 1901년 5월 사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가 있던 중에 신축교안이 일어나 제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지방의 성당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후 황해도 봉산과 함경도 안변 등지로 사목지를 옮겨야 했다. 일종의 문책성 인사였던 것 같다.
다시 제주도로 보내달라는 그의 요청을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는 목포에서 교안의 참상을 전해 듣고 슬피 울어야 했다. 1936년 10월 6일 선종하여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천주교 신자 수가 137명에서 35명으로 줄었고 하논 본당이 폐허가 되자, 한논본당은 1902년 6월 17일 다케 신부(프랑스人 1902~1915년 제3대 한논본당 주임신부)에 의해 서홍동 홍로본당(현 서홍동 면형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다케 신부 부임 당시 교인 수는 35명이었다고 한다. 1937년 8월 15일 현재의 서귀포성당으로 이전 정착하였다. 이후 서귀포성당은 모슬포성당, 성산포성당, 서귀복자성당, 중문성당, 효돈성당으로 분리되어가는 산남 지역의 모태 성당이 되었다.
하논성당 터 안내판에는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 이곳은 1900년6월12일 산남 지역 최초의 성당인 한논본당이 설립되었던 천주교회의 유서깊은 역사문화사적지입니다. 한논본당은 1902년 6월17일 서홍동 홍로본당으로 이전하였다가 1937년8월15일 현재 서귀포성당으로 이전정착하였습니다. 천주교제주교구서귀포성당〉라고 적혀 있다.
서귀포성당 설립 11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2010년도 제주도 용역조사 사업비를 보조받아 하논성당터를 찾아내었고 하논성당길이라고 하여 성지(사적지)순례올레길로 만들었다.
그 후, 2012년도 제주교구에서 제주관광공사와 함께 천주교성지순례길 6개 코스 68km를 조성하면서 하논성당길을 포함하게 되었다. 한논본당 복원 성지화 사업으로 초가성당(약 20평)을 복원하여 전시실로 활용할 계획이다.
(블로그 에뜨랑제나그네의길, 헤드라인제주 120828, 제민일보 120828, 헤럴드경제 130404, 뉴스천지 130405)
아래 사진은 한논성당복원계획도이다.
《작성 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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