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캐롤 리드의 <올리버!>는 내가 본 영화 중 명작 10편 혹은 20편을 뽑을 때 들어갈 작품이다. 영국영화임에도 미국의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을 포함하여 8개 부분을 수상하였다. 그해에 아카데미상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그럴 값어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내가 중학생 때 대구에 가서 보았다. 음악이 너무 좋아 영화음악 전곡이 수록된 LP판을 사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명장이 만든 명작이다.
캐롤 리드 1968년 작 <올리버!>
찰스 디킨스의 명작소설을 캐롤 리드가 뮤지컬로 만든 영화. 1968년작.
감독: 캐롤 리드(Carol Reed)
원작: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출연: 론 무디(Ron Moody), 올리버 리드(Oliver Reed), 쟈니 월리스(Shani Walis)
상영시간: 153분
제작: 도날드 알버리(Donald Albery), 존 울프(John Woolf)
19세기 초 영국 하층사회의 이면상을 70mm 화면 가득히 재현한 수작이다. 19세기 영국은 빈부의 차가 심해 가난한 사람은 몹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런던의 어느 빈민구제병원에서는 한 사람의 임산부가 막 숨을 거두려고 한다. 그녀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귀여운 사내아이를 순산한다. 그 아이는 올리버로 이름이 지어져 성장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런던의 어느 고아원의 식당을 배경으로 막이 오른다. 죽을 타려고 늘어선 줄 가운데 소년 올리버가 있다. 올리버는 죽을 더 달라고 떼를 쓰다가 원장의 미움을 사게 되어 장의사에게 팔려간다. 그러나 주인은 혹독하게 일을 시키면서 개밥을 먹이는 등 인간 이하의 대접을 서슴지 않았다.
올리버는 장의사에서 뛰쳐 나와 '사랑은 어디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애처롭게 굶주림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소매치기 소년 도자와 사귀어 그의 동료가 된다. 올리버는 노신사의 시계를 훔치려다 붙잡혀서 끌려간다. 노신사 브라운트는 올리버를 친손자처럼 귀여워하고 사랑한다. 그는 행방불명이 된 자신의 딸 낸시를 닮은 올리버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브라운트는 올리버에게 돈심부름을 시킨다. 그러나 큰 돈을 가지고 심부름을 가던 올리버는 소매치기단에 잡혀서 돈도 빼앗기고 심하게 매질을 당한다. 한편 고아원에서는 올리버를 낳고 사망한 여인이 부자 브라운트의 딸이고 올리버는 그의 외손자임이 밝혀져 큰 소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올리버는 소매치기단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비로소 평온한 생활을 보내면서 행복에 젖어들 수 있게 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라이오넬 바트가 뮤지컬로 만들고 그것을 캐롤 리드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으로 존 그린이 음악을 맡았는데, 브로드웨이에서는 롱런하였고 영국에서는 7년 동안이나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제4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캐롤 리드가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그 밖에 미술·녹음·특별상 등 8개 부문을 수상했다.
ㅡ두산백과
로만 폴란스키 2005년 작 <올리버 트위스트>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찰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하고 또 기다린다. 소년원에서 피죽 한 그릇을 더 얻어먹기 위해 밥그릇을 내미는 올리버 트위스트, 그 소년의 운명적인 모험이 이때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마치 소공녀 세라가 아버지를 여의고 다락방의 어린 하녀로 전락하는 순간이고,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은 작가 쥘 베른이 무인도에 15명의 소년들을 한꺼번에 표류시키는 순간이다. 19세기 유럽 문학 속의 소년, 소녀들에게 운명의 격랑은 그때부터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수없이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감동적으로 읽힌 것은 우선 그가 겪는 이야기 자체가 결코 누구도 겪고 싶어하지 않는 불운이었기 때문이다. 부모 없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고달픈가? 평범한 아이들은 올리버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 공포란 부모 없는 세상을 살아갈 때 생길 수 있는 만 가지 불우의 가능성을 추체험으로 느끼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안심한다. 그래도 내게는 부모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올리버도 결국은 행복해지지 않았나, 라고.
그러나 질문이 필요하다. 왜 소년, 소녀였을까? 왜 아이들이었을까?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좀 더 심층적인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 보이는 이유, 또는 그 공포가 다른 것에 비해 배가 되었던 이유는 주인공 올리버가 단순히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세기 유럽이었다. 산업의 굴레가 인간을 잡아가둔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의 사회적 기원이 아동 노동력의 착취가 만연하던 19세기 유럽 산업사회에 있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건 그다지 과장이 되지 않는다. 올리버는 그냥 아이가 아니라 일하는 아이다. 소년원에 처박히는 그 즉시 그에게 맡겨지는 것은 온통 일감이다. 그는 단돈 몇 파운드에 팔아먹을 수 있는 싸구려 인력이고, 장의사집에 가서도 슬픈 척하고 장례의 맨 앞에 서서 표정을 팔아야 하는 인부일 뿐이다.
런던으로 들어와 소매치기 소굴에 합세한 이후에도 그의 역량은 소매치기의 노동력일 뿐이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시시각각 그가 일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 사실 어린 시절 우리가 느꼈던 안도감은 우리는 부모가 있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우리는 부모 밑에 있으므로 착취당하며 일을 해도 되지 않는구나였던 것이다. 올리버는 사회의 떠도는 상징적 ‘산업 도구’였고,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오직 그를 거둬주는 브라운 로우만이 그에게서 어떤 노동력도 갈취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사회를 빗댄 소설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의 기나긴 여정의 공포를 그렸으며, 그를 둘러싼 폭력의 사회를 다룬 작품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전제가 있고 나서야, 『올리버 트위스트』의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라는 사실이 비로소 의외가 아닌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때는 그가 공포와 폭력의 기운에 손을 댈 때이고, 그 공포와 폭력의 기원이 사회의 어딘가에 집단적으로, 그러나 알아차리기 힘든 음모의 형세로 응집해 있을 때다. <로즈마리 베이비>(한국 제목은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악마의 씨>의 악마와 그 광신도들(그것은 끝내 실재의 형상으로 나타나 살인광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를 살해하는 결말을 낳았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아래 풀리지 않는 범죄적 마성으로 거듭되는 비운의 가족 사회사, 그리고 가장 최근 영화 <피아니스트>의 역사적 죄악의 홀로코스트까지, 그것들은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인간 사회학의 기원에 그 근거를 맞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폴란스키의 촉수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감지한 것은 그다지 의외는 아닌 셈이다. 실상 원작 자체가 대단히 무섭고 음산한 폭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폴란스키는 원작의 틀을 크게 벗어나 변형적인 형태로 영화를 완성하고자 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소년원에서 쫓겨난 올리버(버니 클라크)가 장의사집에 인부로 갔다가, 다시 도망쳐 런던의 소매치기 집단으로 흘러들어가고, 거기에서 올리버를 이용하려는 패긴(벤 킹슬리)과 악당 빌 사이크스(제이미 포어만)를 만나고, 다시 그를 구해주는 브라운 로우를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되도록 충실히 소설의 이야기를 축약하고 있다.
사실, 폴란스키는 이렇게 유명한 원작을 영화로 다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처음에 고민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데이비드 린의 1948년작 <올리버 트위스트>, 캐롤 리드의 1968년작 뮤지컬 <올리버!> 이후 이 소설을 소재로 한 그렇다 할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문학 『올리버 트위스트』를 제대로 옮겨놓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폴란스키는 원작이 갖고 있는 분위기를 대부분 흡수하고자 한다.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는 런던의 야경과 괴물과 사람 그 중간의 형상을 갖춘 반인반마들(특히 벤 킹슬 리가 연기하는 패긴 영감)을 스산한 느낌으로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바로 폴란스키의 영화를 곧잘 지배하는 음산함, 그것의 소년·소녀적 버전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폴란스키라는 이름을 앞에 걸고 판단할 때 이 영화를 어떤 야심적인 영화적 성과물로 보기는 힘들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이들도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데(단역으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실상 그런 식의 강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흥미로운 점은 영화 자체가 아닌 다른 데 있다.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고전 명작을 선택할 때조차, 어른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환기시키듯 아이들에게 무서움을 심어주는 그런 작품을 폴란스키가 골랐다는 점이다. 제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마저 음산한 폭력의 기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폴란스키, 그의 그런 영화적 운명이 더 흥미라면 흥미다.
ㅡ정한석
재탄생한 올리버
김용언 기자
폴란스키는 디킨스의 원작 삽화를 담당했던 조지 크루크생크의 삽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정교한 화면 구성을 통해, 단순한 줄거리 압축으로만은 전달할 수 없는 원작의 정수를 스크린에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해리 포터』는 비할 바 아니다. 여기 영문학 사상 가장 비참하고 힘겨운 유년기를 보내는 소년 올리버 트위스트와, 그를 착취하는 악당 파긴(벤 킹슬리)과 빌 사이크스(제이미 포어맨) 일당이 있다. 사실 처음엔 놀랍기만 했다. 시퍼렇게 벼린 칼날처럼 삶의 근저에 도사린 공포 심리에 집착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가족 영화’를 만들다니? 그것도 데이빗 린과 캐롤 리드가 각각 드라마와 뮤지컬로 성공적으로 영화화한 찰스 디킨스의 원작을? 우려의 시선도, 호기심의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올리버 트위스트>를 보고 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러 서구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올리버 트위스트>는 칸을 휩쓸었던 전작 <피아니스트>와 더불어 로만 폴란스키의 가장 사적인 영화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부모님을 크라카우 유대인 수용소에 빼앗기고 공포에 떨면서 숨어 지냈던 폴란스키가, 12세의 나이에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힘겨운 체험을 생생하게 문자로 옮긴 찰스 디킨스의 원작에 공감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 때문에 폴란스키는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부드러움으로 올리버에게 깊은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늘 구박받고 오해받던 올리버가 소매치기 파긴 일당에게 생애 최초로 따뜻한 칭찬과 환영을 받자 환한 얼굴로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장면이 그토록 가슴 저린 것은 감정 이입의 시선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영문학 사상 최고의 악당 중 한 명인 파긴을 그리는 방식이다. 벤 킹슬리의 탁월한 열연에도 힘입은 바 있겠으나, 폴란스키는 파긴을 순전한 악인으로 보지 않았다. 파긴은 올리버에 대한 살의와 애정 사이에서 흔들리고, 살아남기 위해 교활한 감각을 최대한 발달시킬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쉽게 선악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없고, 악당이라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이며 모던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엔딩 신에서, 파긴을 면회간 올리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저한텐 은인이세요”라고 말을 건네는 장면이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는 샤를 보들레르나 에드거 앨런 포처럼 대도시의 위대한 관찰자이자 시인 중 한 명이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런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런던은 결코 화려한 활기로 충만한 대도시가 아니라 음울한 범죄와 타락으로 들끓는 생지옥이다. 런던의 상징 빅 벤과 런던 브리지는 가련한 아이들에게 조금도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폴란스키는 디킨스의 원작 삽화를 담당했던 조지 크루크생크의 삽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정교한 화면 구성을 통해, 단순한 줄거리 압축으로만은 전달할 수 없는 원작의 정수를 스크린에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단순히 아동 영화로 치부할 수 없는 많은 영화들이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 역시 그중 한 편에 당당히 포함된다.
ㅡ필름 2.0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