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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천정과 소헌 이규헌 선생 소개 영상(이오걸 제작)
활천정
https://www.youtube.com/watch?v=IkV_45tNtOQ
울주군 두동면 봉계에서 언양 쪽으로 막 벗어나면 두서면 활천리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 200미터 쯤에 두북초등학교가 있다.
학교 뒤편 나저막한 산 아래, 아늑하고 양지바른 남향으로 아담하고 고풍스런 한옥 3칸의 정자가 활천정이다.
활천정(活川亭)은 울주군 두서면 활천내와로 34-7[활천리 339]에 위치한다.
정자 앞으로는 복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 또한 조선 선비의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정자는 선비의 처소답게 아담하고 정갈하면 고졸한 품격이 어우러져 울산에서 보기 드물게 옛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산임수형 정자이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1.5칸] 규모의 팔작 홑처마 지붕 건물이다. 다만 부연이 없는데도 알추녀 형태를 가진 이중 구조의 추녀를 가지고 있으며, 추녀 끝에는 모두 귀면와가 있다. 중앙에는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으며 방 뒷면 좌우에는 반침(半寢)[큰 방에 딸린 조그만 방을 달았다. 기둥은 앞 열만 원주를 사용하였고 초익공이다. 정자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쪽 쪽마루를 이용하는 특이한 구조를 갖추었다. 기단은 외벌대이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흙과 돌을 섞어 담을 만들고 기와를 얹었다. 모든 부재에 오일스테인을 바른 흔적이 보이고 창방, 도리의 뺄목과 서까래 마구리에는 부재 보호를 위해 흰색 칠을 하였다.
이 정자는 매헌공 겸익(謙益)의 9세손 규현(奎現1855-1934)공을 위한 정자다.
동쪽 방은 역열재(亦悅齋)-학이시습불역열호(學以時習不亦悅乎)-서쪽 방은 이회암(以會庵)-이문회우(以文會友)라 하여 공부하는 방,친구와 담소하는 방으로, 이름을 구별하여 놓았다.
공은 농소 천곡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식의 공부를 위하여 부모가 경주 내남 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조의 최성암(崔惺巖)에게 사사 학문을 익혔고, 중년에는 두서면 복안으로 이사하여 후학을 가르치심에 전력하여 제자가 162명이나 되었으며, 제자들이 짓기 시작한 활천정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80세의 일기로 졸(卒)하였다.
「울산 활천정과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 내용 요약
울산 최북단의 유서 깊은 농촌마을 활천리에는 자연과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활천정이 있다. 활천정은 경치를 즐기기 위해 세운 일반적인 정자와 달리, 사람들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교류하기 위한 배움과 인격 수양의 공간이었다.
활천정은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이 1933년 제자와 벗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 그러나 선생은 정자가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제자와 후손들이 그 뜻을 이어 활천정을 지켜왔다.1855년에 태어난 이규현 선생은 타고난 천재라기보다 꾸준한 노력으로 학문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에게 모르는 것을 끊임없이 묻고 배우며 학문을 깊게 했고, 후에는 지역 유학과 예학의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선생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안분지족(安分知足)이었다. 세속적인 욕심과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예(禮)를 바탕으로 자신과 가정, 지역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 고향에 남아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나라와 지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 예절과 인격을 중시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믿었다.
핵심 메시지
활천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간 한 선비가 욕심을 내려놓고 예와 학문으로 사람을 키우며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정신의 공간이다.
오늘날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는 현대인에게 이규현 선생의 삶은 “남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욕심보다 사람됨을 먼저 생각하라”는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울산 활천정(活川亭)소개
울산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활천리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이어져 온 조용한 마을이다. 푸른 들판과 맑은 물길, 산세가 어우러진 이곳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은 정신과 이야기를 품은 한 채의 정자가 서 있다. 바로 활천정(活川亭)이다.
활천정은 흔히 볼 수 있는 경승지의 정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아름다운 산과 물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워진 정자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학문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지역의 예와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 활천리와 활천정의 터전
활천리는 울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적인 공간으로 소개된다. 주변에는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고,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적과 역사문화 유산의 흔적도 남아 있어 이 지역이 오랜 세월 삶의 터전이 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활천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변화와 정비를 통해 자연친화적인 마을로 이어져 가고 있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활천정의 모습은 이러한 마을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특히 활천정은 산 정상이나 강변의 절경이 아니라 논과 마을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활천정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사람들이 찾아와 만나고 배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생활 속의 정자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풍류의 정자가 아닌 배움의 정자
우리나라의 많은 정자는 아름다운 산수와 경치를 즐기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활천정은 그 목적부터 달랐다.
활천정은 사람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스승과 제자가 가르침을 나누며, 친구와 선비들이 교류하던 공간이었다. 때로는 지역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활천정은 단순히 쉬어 가는 정자가 아니라,
배움의 공간이며, 인격을 닦는 공간이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공간이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작은 학교이면서도 사랑방이고,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3. 소원 이규현 선생과 활천정
활천정의 중심에는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이 있다.이규현 선생은 1855년에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유학자였다. 조선 말기부터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이 위협받던 시기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처음부터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강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스승에게 하나하나 물으며 학문을 익혔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 그를 뛰어난 학자로 성장하게 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타고난 재능보다 배우려는 자세와 꾸준한 노력이 한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
이규현 선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고, 다시 많은 제자에게 전했다.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에게 이어지고, 제자의 가르침은 다시 후학에게 이어졌다.
활천정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의 계승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4. 배움의 즐거움과 사람을 모으는 공간
활천정에는 그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이름과 의미가 담겨 있다.
한쪽에는 역열재(亦悅齋)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는 『논어』의 첫 구절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과 연결된다.
즉,
배움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공간에는 이회암(以會庵)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는 학문과 문장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활천정은 단순히 한 사람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가 만나고, 친구와 벗이 모이며, 학문을 논하고, 세상의 일을 걱정하고, 서로의 마음과 뜻을 나누는 곳이었다.
활천정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세워진 정자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순히 많은 사람을 모으는 데 있지 않았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고, 올바른 생각을 나누며, 지역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5. 이규현 선생이 추구한 안분지족의 정신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가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안분지족이란 자신의 처지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간다.
누가 더 좋은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여행했는지를 인터넷과 SNS를 통해 매일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그러나 이규현 선생의 삶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남보다 얼마나 더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는 세속적인 욕심을 좇기보다 자신의 삶을 바르게 가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오늘날 활천정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6. 예(禮)로 자신과 세상을 바로 세우다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이 평생 중요하게 생각한 또 하나의 가치는 예(禮)였다.
그에게 예란 단순히 격식을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
예는 자신을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가정을 바로 세우고, 지역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삶의 기본이었다.
그는 외출할 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는 등 자신의 몸가짐을 엄격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옛날 선비의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워야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할 수 있다는 정신의 실천이었다.
그에게 예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어졌다.
한 사람의 바른 마음
→ 한 사람의 바른 행동
→ 바른 가정
→ 바른 지역사회
→ 바른 나라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일,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7. 벼슬보다 후학 양성을 선택한 선비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이 살아가던 시대는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많은 선비들은 나라와 자신의 앞날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이규현 선생은 벼슬길에 나아가 권력과 명예를 얻는 길보다 고향에 남아 후학을 기르는 길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벼슬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예를 바로 세우며,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을 키우는 것이 진정으로 지역과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활천정이 지닌 가장 큰 의미이다.
활천정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한 사람이 나라와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며 사람을 키우기 위해 마련한 공간인 것이다.
8. 완성을 보지 못한 활천정
활천정에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담겨 있다.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교류하기 위해 이 정자를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정자가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꿈꾸던 공간이 완성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활천정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남긴 뜻은 제자들과 벗들,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각지의 사람들이 활천정을 찾아 선생을 기리고,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이것이 바로 건물은 한 사람이 세웠지만 그 정신은 많은 사람이 함께 완성한 활천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 활천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활천정은 과거의 오래된 건축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바쁘고 불안하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달려간다.
그런 우리에게 활천정과 이규현 선생의 삶은 조용하지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말 행복한가?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정말 성공인가?
나는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바르게 살고 있는가?
활천정이 전하는 답은 어쩌면 단순하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배움을 즐기며,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은 사람을 바로 세우고 사람을 키우는 데 있다.
활천정은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세워진 공간이었다.
10. 맺음말
울산 활천정은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가 아니다. 그곳은 한 시대를 살아간 선비 소헌(小軒) 이규현 선생이 학문과 예를 통해 사람을 키우고, 지역을 바로 세우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정신의 터전이다.논밭 한가운데 조용히 서 있는 활천정에는 화려한 권력도, 높은 명예도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스승과 제자의 정이 있고, 배움의 기쁨이 있으며, 벗들의 우정이 있고, 한 시대를 걱정했던 선비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그래서 활천정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과 비교하며 조급해하지 말라.
욕심보다 사람됨을 먼저 생각하라.
배움을 멈추지 말고, 사람을 키워라.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아라.
활천정은 한 채의 정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정신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울산의 소중한 정신문화유산이다.
-. 활천정 중수
活川亭 重修記 終
水自咽薄 逶迤而北來國東都 四十里而爲活川沿流而村亦曰 活川自蠻倭竊柄折屬于蔚州之斗西面 臨流而 亭亦扁以 活川蓋有取於紫陽夫子一鑑有源之義乃故處士小軒李公 晩年蒐裘之 營其園林 雲物之勝 有公之友故脩軒崔公所記 尙揭于楣 夫公生丁前韓之末種學績文而値世板蕩奄見搰夏無以施諸攸爲遯世旡憫於是焉誦先王之法言遵先民之懿訓以詔後進焉 公旣歿無復下惟者亭亦爲風雨所漂搖久而將圯曾孫東苾 病之圖所以堂構之道其姑夫崔君在林聞而樂爲之相其役旣落復爲之請記其顚末于不佞不佞記昔嘗侍隅於先王考或先外王考庭下得竊瞯公儀度於座上者有幾次時甚稚少若夢中記夢不能細得 領會而今所依俙者其雅飭之容儀規矩之律度復其所說多應 是心性之微奧今古之序列居然爲六七十星霜人事異昔感慨隨之 遂樂其能繼述不自揆其淺劣敢書之如右云
大韓復國之 三十二年 丙辰 陽月 日
豊山 柳 奭 佑 記
활천정 중수기 번역
물이 열박재로부터 굽이굽이 북쪽으로 가다가 나라의 동도(東都, 경주)에서 40리에 이르러 활천(活川)이 되는데, 시내를 따라 있는 마을 또 ‘활천’이라고 부른다. 오랑캐 왜놈이 권력을 빼앗으면서 울주군 두서면에서 잘라서 속하도록 하였다.
시냇물에 닿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또 활천이라고 편액을 달았으니, 무릇 자양(紫陽) 선생께서 한번 살피시고 연원이 있다고 한 데서 뜻을 취한 것으로서, 곧 돌아가신 처사(處士) 소헌(小軒) 이공(李公)이 늘그막에 모아서 지은 것이다.
그 원림(園林)과 경물(景物)의 빼어남에 대한 것으로는 공(公)의 벗 수헌(修軒) 최공(崔公, 崔鉉弼을 가리킴)이 지어서 일찍이 문설주에 걸어 놓은 기문(記文)이 있다.
무릇 공은 태어나서 옛 한말(韓末)을 맞이하였는데, 학문을 하고 글을 쌓다가 어지러운 세상을 맞게 되자 문득 나라를 위해 힘써도 펼친 만한 것이 없음을 보고, 세상에서 벗어나서 걱정이 없고자 하였다. 이에 선왕의 바른 말씀을 외우고, 선민(先民)의 아름다운 교훈을 좇아서 후진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휘장을 내릴 이가 없어지게 되니, 정자 또한 비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오래 되어서 장차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그의 증손(曾孫) 동필(東苾)이 그것을 걱정하고 집을 얽을 방도를 모색하니, 그 고모부 최재림(崔在林) 군이 듣고 좋게 여겼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공역을 서로 도와서 완성하고 나서, 다시 그를 위하여 나에게 전말(顚末)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옛날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를 댁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모시면서 좌상에 앉으신 분들 중에서 공의 거동과 풍도(風度)를 몰래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몇 차례였다.
그때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치 꿈속과 같다. 꿈을 기억해 보건대 자세하게 깨닫고 이해할 수 없어서 이제 흐릿하기만 하다.
그 단아하고 조심스러운 모습과 거동, 법도 있는 태도는 다시 그 전해지는 말에 부합됨이 많으니, 이것은 심성의 미묘함이요 고금의 서열인 것이다. 어느덧 6,70년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은 옛날과 다르고 감개가 그것을 따르게 된다. 마침내 그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감을 즐거워하여, 스스로 천박하고 열등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이상과 같은 글을 쓰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권을 회복한 지 32년(1976년) 병진년(丙辰年) 시월(十月) 일 풍산(豊山) 유석우(柳奭佑)가 기록하다
活川亭 重修紀
伏 惟
公의 諱는 奎現 字는 學汝 號는 소헌(小軒)이다.
어려웠던 朝鮮末蔚山泉谷에서
呱呱聲을 올리셨네.
志學에 李奎龍에게 勉學하시고
弱冠에 慶州 旺洞으로 移徙하여
惺巖에게 私師하시니
學問의 境地가 深海같도다.
中年에 斗西面 伏安으로 移住하시어 後學
가르침에 專念하셨네
平生을 讀書精進과 筆墨을 벗하시고
禮儀 凡節과 孝行 삶의 德目삼아
궁행(躬行)하시니
家門과 고유의 밝은 등이 되셨고,
고매(高邁)하신 人品과 깊으신 학문의 結實을
文集 三卷에 담았으니
後孫의 自負心이요 家門의 榮光이도다.
晚年에 活川亭 지어
一生 業積 더욱 빛나다.
癸酉年에 準備하여 甲戌年 仲秋에 完工하나 그 莊嚴한 모습 보시고 八旬의 甲戌 元月에 仙하시니 哀悼하는 弟子 知人 人山人海 이루었고, 後日에 弟子들은 以食契를 만들어서 推仰하고 追慕하는 儒生들이 年年이 모여들어 시를 읆고 글 지으며 文友가 되었도다.
為先의 精誠으로 偉業을 길이 保存하고자 금年에 管理舍와 亭子를 重修함에 後便 기와 反瓦하고 마당에 자갈 깔고 정자기둥 대들보 마장의 쌓인 때 벗겨내어 번듯하게 重修하니 尊靈께서 洋洋 歌格하옵소서
二千五年 乙酉 桂月 日 曾孫 東苾삼가 쓰다
「活川亭願」 활천정에 바램
溪畔營亭聚俊賢(계반영정취준현)시냇가에 정자 지어 어진 선비 모으고
開門講學育英賢(개문강학육영현)문을 열어 학문 강론하여 후학을 기르네
朝夕論經明大道(조석논경명대도)아침저녁 경전을 논하여 큰 도리를 밝히고
往來賦詩結雅緣(왕래부시결아연)오가는 이 시를 읊으며 아름다운 인연 맺으리
不逐浮名守素心(부축부명수소심)헛된 명예 좇지 않고 소박한 마음 지키며
惟願後生承古傳(유원후생승고전)오직 후학들이 옛 가르침을 이어받기를 바라네
一亭長作傳燈所(일청장작전등소)이 한 정자 길이 가르침을 전하는 곳이 되어
千載流芳育俊賢(천재류방육준현)천년토록 그 향기 흐르며 인재를 길러내리라
이 한시는 소헌 선생의 뜻을 「학문을 가르침 → 후학을 기름 → 시문을 논함 → 뜻있는 사람들이 모임 → 가르침을 후대에 전함」의 흐름으로 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의 「傳燈」(전등)은 등불을 이어준다는 뜻으로, 소헌 선생의 학문과 정신이 제자와 후손에게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학문을 가르치는 자리, 제자와 벗들이 모여 시를 논하는 공간, 후학을 기르는 정자, 스승의 뜻이 후대에 이어지는 모습
최현필 선생이 남긴 「활천정기」의 뜻을 살려, 오랜 벗 소헌 이규현 선생이 정자의 완공과 상량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슬픔, 그리고 그리운 벗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한시로 다듬어 보았습니다.
追友小軒先生(추우 소헌선생) 소헌 선생을 추모하며
小軒早逝亭初成(소헌조서정초성) 소헌께서 먼저 가셔 정자가 처음 완성되었건만
遺恨空餘溪水鳴(유한공여계수명) 남은 한은 시냇물 소리에 부질없이 맴도누나
未待上樑身先逝(미대상량신선서) 상량의 순간 기다리지 못하고 몸 먼저 떠나시니
丹心留與後人情(단심류여후인정) 붉은 충정만 후손과 후학에게 남겨 주셨네
松風猶似君聲語(송풍유사군성어) 소나무 바람 소리 아직도 그대 말씀 같고
溪月長明舊亭楹(계월장명구정영) 시냇가 달빛은 오래도록 옛 정자 기둥을 비추네
六十年交今夢隔(육십년교금몽격) 육십 년 깊은 우정 이제 꿈으로만 가로막혔으니
活川流水寄哀情(활천유수기애정) 활천의 흐르는 물에 애끓는 그리움을 부치노라
소헌 이규현 선생을 향한 60년 벗의 그리움과 활천정 완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안타까움을 표현함
이 시의 중심은 “정자는 완성되었으나 정작 그 정자를 꿈꾸던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활천정기」의 애절함입니다. 특히 “未待上樑身先逝”는 상량을 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 선생에 대한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담은 구절이고, 마지막의 “活川流水寄哀情”은 활천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친구를 향한 그리움도 오래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림에서는 학문을 가르치는 자리, 제자와 벗들이 모여 시를 논하는 공간, 후학을 기르는 정자, 스승의 뜻이 후대에 이어지는 모습을 활천정 주변에 함께 배치했습니다.
「활천정기」의 내용과 최현필 선생이 소헌 이규현 선생을 그리워한 정서를 중심으로, 현판이나 추모 글에 어울리도록 조금 더 고풍스럽고 간결하게 다듬어 보았습니다.
追悼小軒先生(추도 소헌선생) 소헌 이규현 선생을 추모하며
小軒先逝亭方成(소헌선서정방성) 소헌 선생 먼저 떠나시고 정자는 이제 막 완성되었네
未見上樑空有恨(미견상량공유한) 상량식도 보지 못하셨으니 부질없는 한만 남았구나
六十年交今隔夢(육십년교금격몽) 육십 년 사귄 벗 이제 꿈으로만 만날 수 있고
一溪流水泣幽聲(일계류수읍유성) 한 줄기 시냇물은 그윽한 울음소리로 흐르네
松風似聞君舊語(송풍사문군구어) 소나무 바람에 그대의 옛 말씀이 들리는 듯하고
月照空庭獨對楹(월조공정독대영) 달빛은 빈 뜰을 비추며 홀로 정자 기둥을 마주하네
遺志百年傳後學(유지백년전후학) 남긴 뜻은 백 년을 넘어 후학에게 전해지고
活川長水寄哀情(활천장수기애정) 활천의 긴 물줄기에 애틋한 그리움을 부치노라
이 시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
「未見上樑空有恨」은 바로 활천정기의 애절한 대목을 살린 구절입니다.
정자를 세우는 큰 뜻은 이루었지만 정작 상량하는 날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소헌 선생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았습니다.
또한 마지막의 「活川長水寄哀情」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활천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소헌 선생을 향한 최현필 선생의 우정과 그리움도 세월 속에서 끊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현판에 새길 경우에는 제목을 「追悼小軒先生」보다 조금 더 품격 있게 「哭小軒友」(곡 소헌우, 벗 소헌을 애도하며)또는 「懷小軒友」(회 소헌우, 벗 소헌을 그리워하며)로 바꾸는 방법도 잘 어울립니다.
그림에는 시의 핵심인 소헌 이규현 선생이 활천정 완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슬픔, 60년 벗의 우정, 달빛과 시냇물에 남은 그리움, 그리고 후학에게 이어지는 유훈을 중심으로 추모화를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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