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5일 오후 8시 출연: 민영기, 김법래, 안재욱, 최민철, 백민정, 최유하
"넌 사랑을 해, 난 살인을 할게...."
내가 처음 이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 매력적인 카피뿐이었다.
아니, 안재욱, 김원준, 유준상이 캐스팅된 뮤지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셋이 예능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는 것을 꼴사납게 바라보고 채널을 돌리곤 했다.
기본적으로 난 스타 캐스팅의 뮤지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준상의 경우, 옛날에 '그리스'를 할 때 보았는데. 예전에 뮤지컬 경험이 있다고 해서 뮤지컬 스타의 귀환이니 뭐니 이런 말들로 그를 포장하는 것도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장이 유니버설 아트센터라는 것도 사실 좀 마음에 안 들었다. 1층 객석이 경사가 하나도 없는 평면(?) 극장으로 유명한 유니버설 아트센터라니....
이번에 가보니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1층 객석엔 경사가 생겼고 다행히 사이드 좌석에서 보아도 시야를 가리진 않았다.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원작이 무엇인지 어느 나라 작품인지 연출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에겐 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연을 본 후, 나의 처음의 이 부정적 생각들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으니까.
공연이 시작되었다.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적 배경 등의 분위기나 느낌은 <지킬 앤 하이드>와 비슷하다.
이 장면은 <지킬 앤 하이드>의 'New life'가 떠올랐고,
이 장면은 <지킬 앤 하이드>의 'Bring on the men'이 떠올랐다.
요 구도 또한 너무 낯익지 않은가.
글로리아와 다니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미스 사이공>에서 킴과 크리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과 똑같았고.
먼로 기자가 특종을 외치는 이 장면은 <프로듀서스>의 세무서 장면이 떠올랐다.
이건 좀 억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주인공이 화상을 당해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다니엘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오페라의 유령>이 떠올랐다.
자!!!! 그래서 이 작품이 유명한 여러 컨셉트와 장면을 따라한 이류 작품이냐.
절대 아니다.
처음에는 너무 낯익은 장면들이 많이 나와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공연이 진행될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일단 스토리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작품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세기 말 런던에서 있었던 현대 역사상 최초의 연쇄 살인.
희생자들은 모두 매춘부였고, 그들의 시신은 모두 내장이 정교하게 도려내어져 있었다.
실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은 <스릴미>도 있지만, 그 사건의 경우, 범인이 모두 잡혔고 그래서 사건의 전말도 모두 밝혀졌지만, 이것은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영구미결 사건으로 남아있다.
과연 누가, 왜 그녀들을 죽이고 내장을 가져갔을까.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는 상상력이 더해지고 아름다운 음악이 더해져 흥미로운 뮤지컬로 탄생했다.
사실 다니엘이 겨우 몇 시간 만났을 뿐인 글로리아를 왜 그렇게까지 사랑했는가는 의문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랑에 빠질 무언가가 있었나.
그래서 <미스 사이공>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킴과 크리스는 전쟁 중에 만났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늘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인간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를 인간답게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을 것이다.
글로리아와 다니엘은 고의적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죽였다. 다니엘은, 그 공범의식에다가 자신이 주었던 꿈 때문에 더욱 힘들게 사는 글로리아에 대한 죄의식이 더해져 글로리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글로리아는, 밑바닥까지 치달아 온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을 사랑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시 만난 다니엘 앞에서 글로리아는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소리친다. 그러면서 몇 년동안 그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간직했던 그 편지를 다니엘 앞에서 찢어버린다.
정말 글로리아가 다니엘을 보고 싶지 않았다면, 그 편지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바로 다니엘 앞에서 찢어버릴 이유도 없다.
다시 희망을 만났다고 생각했기에 이제 편지는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하게 되었고 다시 만났다.
그리고 살인이 시작되었다.
잔인한 살인을 하는 잭. 그와 거래를 하는 다니엘. (내용을 모두 말씀드리면 안 되니까 요기까지만...^^;;)
그 살인 사건을 쫓는 형사 앤더슨과 사건을 흥미롭고 비싼 기삿거리로만 보는 기자 먼로. 그리고 예전 앤더슨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매춘부로 살아가는 폴리.
이 작품의 정말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가 훌륭하고 구성이 탄탄하고 캐릭터가 각각 강렬하게 잘 살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해내는 배우들의 역량이 정말 뛰어나다.
앤더슨 형사 역할의 민영기 씨.
그동안 난 민영기에 대해 너무 몰랐다. 2003년도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를 보고, 그냥 '꽤 잘하는 신인배우'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대단한 뮤지컬 배우'가 되어 있었다.
'이 도시가 싫어~~~~~~'라고 노래할 때. 휴. 정말 남자 목소리가 그렇게 맑고 청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직도 귀에 맴도는 '이 도시가 싫어.....'
자신의 옛 연인이 매춘부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계속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 도시를 좋아할 수 있을까.
염세주의자에 코카인 중독자인 앤더슨이 이해가 될 정도로 연기를 잘 해주셨다.
잭의 미끼가 될 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빨간 꽃을 주고야 말았던, 그래서 결국 그녀의 죽음을 보아야 했던 그 마음이 어떠할까.
그래서 범인이 밝혀진 뒤에도 범인이 동정 받을 것을 경멸하여 사건 현장을 은폐하는 그의 사랑은 결코 다니엘의 사랑에 뒤지지 않는다.
먼로 기자 역할의 김법래 씨. 아.... 김법래 씨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그 중후하고 깊은 저음의 목소리. 너무 오랜만이다.
대부분 점잖고 진지한 역할만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속물적이고 뻔뻔(?)한 역할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소화해 내셔서 역시 배우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해 주셨다.
글로리아 역할의 최유하 씨. 위 사진이 최유하 씨의 사진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대에서 처음 뵙는 분이라 얼굴 매치가 잘 안 된다.
소녀시대 수영의 친언니 최수진 씨와 더블캐스팅 되었는데. 일단 신인을 캐스팅한 역할인데 의외로 비중이 커서 놀랐고. 신인이심에도 너무 잘하셔서 놀랐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목소리가 좀더 곱고 맑은 톤의 배우였다면 더 캐릭터에 잘 어울렸을 것 같다.
폴리 역할의 백민정 씨. 폴리 역할에는 백민정 씨와 양소민 씨가 더블 캐스팅 되셨는데. 이렇게 비중있는 배우들이 의외로 비중이 별로 없는 역할에 캐스팅 된 게 의아했지만, 그만큼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 낼 만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역할이었다.
잭 역할의 최민철 씨. 아.... 정말.... 최고다 최고. 저 멀리 객석까지 내뿜어지는 강렬한 카리스마.
그 늑대 소리 내는 부분, 웬만한 배우가 했으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을 텐데. 최민철 씨였기에 멋있을 수 있었던 듯. 한쪽 발을 살짝 들고 몸을 기울이며 두 팔을 들고 '아우~~~~'하는 그 자세. 아무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절도 있는 군무 장면. (위 사진 바로 다음 장면) 내가 최근에 뮤지컬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어쨌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몇 작품들 중에 안무로서는 최고의 장면이다.
그리고 안재욱 씨. 이 자리를 빌어 안재욱 씨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 공연 보기 전에 안재욱 씨 무시했던 거 사실이다. 연예인이 그냥 드라마나 할 것이지 왜 뮤지컬은 한다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재욱 씨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 하셨다. 난 안재욱 씨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 처음 알았다.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해봤다.
방송작가였던 남편이 '우리가 TV로 보기엔 우스워 보여도, 뜬 사람들은 분명 뭔가가 있다'고 했는데, 안재욱 씨를 보면서 정말 절감했다.
그래, 그가 한류스타가 된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다.
내가 공연을 본 날, 공연장에는 일본 아줌마들이 아주 많았다. 안재욱 씨의 이 작품 때문에 일본에는 이 공연을 껴서 2박3일 패키지 한국 여행 상품이 나왔다고 한다.
처음에 내가 무대에서 멀리 앉아서. 안재욱 씨가 나와도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했는데. 등장하는 순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공연 보는 동안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기럭지가 안타까웠지만..... 어쨌건 이번 공연은 안재욱 씨의 재발견이랄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안재욱, 유준상, 김원준 씨가 하나의 역할에 캐스팅 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호.... 난 처음에 세 분이 다 같은 역할인 줄 알았다.' 보통 그렇지 않나.
알고보니, 안재욱 씨는 다니엘, 유준상 씨는 앤더슨, 김원준 씨는 잭 역할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역할에 뮤지컬 전문 배우와 더블, 혹은 트리플 캐스팅 되었다.
제작사의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궁금한 건 김원준 씨의 잭. 아직까지 김원준 씨의 연기를 보지 못해서. 지금의 나는 안재욱 씨 연기를 보기 전까지의 안재욱 씨에 대한 생각과 다름이 없지만. 실제로 공연을 보면 또 안재욱 씨의 공연을 본 이후처럼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무대. 무대가 멋지다.
세련된 회전 무대는 적절하게 사용되며 여러 공간을 만들어주고, 사건 현장의 앞과 뒤를 표현해주며 배우의 동선을 넓혀준다.
그동안 뮤지컬 보면서 무대가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다. 이제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고....
이건 딴 얘기지만, 티켓.
오랜만에 클립서비스 티켓. 클립서비스에서는 전혀 모르겠지만ㅋㅋㅋㅋㅋ 내가 너무 사랑해마지 않는 클립서비스 티켓.
다른 예매사이트처럼 단순한 컴퓨터 인쇄 티켓이 아니라 작품마다 개별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클립서비스 티켓. 오랜만이다.
언젠가 시간 나면 클립서비스 티켓 좀 모아서 사진 찍어봐야겠다.
간만에 글이 길어졌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마구 쓴 거라 어떨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모처럼 추천해주고 싶은 공연.
<사진 출처 : 엠뮤지컬컴퍼니 & 뮤지컬인사이드 제공> |
출처: 날자의 맛있고 즐거운 생활 원문보기 글쓴이: 날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