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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05]신돈과 운곡시사(耘谷詩史_원천석) 시집(詩史) 돈(旽) 할아버지의 “역사적인 누명”을 말끔하게 벗겨줄 객관적인 “사료” 저는 상장군 파 31대손 辛在春 이라고 합니다. 전문 역사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닙니다.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평소 역사와 특히 우리조상의 뿌리에 긍지를 가지고 살아 왔으며 , 최근 “ 신돈” 조상에 대한 평가가 그동안 우리 역사가 많은 부분 훼손된 채로 쉽게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후손된 도리로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서 본 모습을 찾아보기로 노력 중입니다. 저의 견해를 몇 자 적어 올립니다. ------------------------------------------------------------------ 원천석은 고려 말의 학자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방원(태종)의 스승이고, 고려가 망하자 원주에 내려가 산나물을 캐면서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며 일생을 보냈다. 후에 왕위에 오른 태종(방원)이 원주로 직접 말을 몰고 찾아가 뵙기를 청했지만 , 산나물 캐러 가서 산에서 내려오지 않아 결국 헛걸음으로 돌아 가야했던 일화가 전해 올 만큼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내가 원천석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조상 “신돈”에 대해서 , 그리고 려말 ,조선 초의 혼란한 정권의 날치기에 대해서 그가 당시 진실을 담은 “야사 6권”을 남겼다는 사실이고 , 그 속에는 이성계 일파의 주장과 달리 ,우왕 ,창왕은 공민왕의 아들 이며 왕위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 신돈의 아들이라고 속이고 백성(민중)을 속인 것에 대하여 정권에 대해서 굴하지 않고 그 역사적 “사실”을 적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 6권의 야사가 나중에 후환을 두려워한 후손들에게 의해서 불태워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늘 아쉬움이 있던 차에 , 혹시나 그가 써놓은 글 중에 다른 이야기가 있지나 않을 까 생각하며 , 그의 시집이나 글들을 관심있게 보던 차에 “ 耘谷詩史” 라는 원천석의 시집을 알게 되었다. (운곡- 원천석의 호) -이 인재, 허 경진 역 |혜안 |2007.01.22 잘 아는 바와 같이 “詩” 란 시를 지은 사람의 혼이 들어 있는 것이라 , 혹시라도 읽다보면 신돈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거나 , 당시의 역사의 사실에 대해서 기록해 두지 않았을까 하고 찾아 보았다. 그런데 눈이 번쩍 뜨이는 글이 서문에 나와 있지 않은 가? 원천석이 죽고 200여년 흐른 뒤에 “운곡시집”을 구해보고 읽은 당시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이 , 책 맨 앞에 남겨놓은 서문 이었다. 우왕 ,창광이 공민왕의 정통왕가라는 사실을 그 속에서 명백하게 이야기 하고 있었으며 , 이러한 내용은 고려왕조를 뒤엎은 조선왕조 행정부 관료의 “ 공식적”인 견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인 운곡시집 중에는 운곡이 손수지은 “ 辛 社主에 哭함” 이란 시가 있어 신돈의 죽음을 암시하고 애통해 하는 원천석의 추모의 마음이 글로 적혀져 있어 여기 소개해 보고 일가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하는 바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 辛 社主” 과연 신돈인가 ? 하는 것입니다. 일가 여러분의 깊은 관찰이 있었으면 합니다. ( 아래 내용 ) 운곡시사 내용 < 1 > 序-001) 박동량(朴東亮)의1) 서문 ; 운곡행록시사서(耘谷行錄詩史序)2) 내 일찍이, 원주 사람 원천석(元天錫)이 고려 말에 숨어살면서 책을 써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신돈(辛旽)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는데, 우리 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니,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는 포은(圃隱)과3) 야은(冶隱)4) 등 여러 선생과 비교할 만하지만, 자손들이 그 책을 숨겨둔 지 오래 되어 읽어 본 사람이 없고, 그 이름조차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200년 뒤에 내가 이 고을에 관찰사로5) 왔다가 마침 선생이 지으신 운곡시집(耘谷詩集)을 얻어 보니, 비록 기록한 것이 많지는 않아도 예전에 들었던 사실과 달라서, 모두 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아아! 우왕(禑王)이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적에 최도통(崔都統)6)․목은(牧隱)7)․포은(圃隱) 같은 몇몇 원로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당시에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어서 즉위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이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목은(牧隱)이 먼저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창왕(昌王)을 폐위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왕(禑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창왕을 폐위시킬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이것으로써 구실을 삼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王氏)의 후손은 이미 공민왕(恭愍王) 뒤에 끊어진 셈이니, 몇몇 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정충(精忠) 대절(大節)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죽고 말았는가. 하물며 당시에는 조정의 기강이 그다지 문란하지 않고 군국(軍國)의 큰 정사도 몇몇 분들에게 일임되어 있었으니, (그분들이) 거짓 임금을 쫓아내고 나라 왕실의 성(姓)을 존속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설 분들이 아니었던가. 그분들이 취할 태도는 이미 마음속에 강구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를 쓰는 저 무리들도 일찍이 왕씨(王氏)의 국록을 먹은 자들이건만 죽음으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왕(禑王) 부자를 신돈(辛旽)의8) 출생으로 덮어씌웠으며, 그것도 모자라 공민왕이 병풍 뒤에서 홍륜(洪倫) 등의 외설스런 짓을 보았다고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읽는 자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다. 우왕의 한 가지 사실만 근거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니,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선생의 한 마디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천백년 뒤까지도 반드시 그릇된 기록을 답습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나라에 역사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나라에 유익함이 바로 이와 같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이 조정에 계셨기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난 뒤에도 (고려왕조가) 수십 년 동안이나 부지할 수 있었다. 선생같이 재야에 숨어 계시는 분이 시를 읊고 회포를 서술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 썼으니, 말씀 한 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의 글로 인해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부자(父子)로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 가운데 어지러운 말과 망녕된 글들도 이로 말미암아 변증할 여지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궁하게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한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시의 임금들이 일찍이 충(忠)과 사(邪)를 판단해 처음부터 끝까지 국정을 위임하고 그 경륜을 펼치게 했더라면 목은과 포은(圃隱)이 어찌 문천상(文天祥)이나9) 육수부(陸秀夫)같이10) (죽게) 되었겠으며, 지초(芝草)를 먹고 국화를 먹는 것도11) 어찌 선생이 좋아서 스스로 택했으랴. 슬픈 일이로다. 선생의 시고(詩稿) 2권은 모두 선생이 스스로 쓰신 것이고, 대부분 산인(山人)이나12) 석자(釋子)들과13) 오가며 주고받은 것인데, 그 가운데 약간은 바로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라서 빨리 세상에 널리 퍼뜨려 표식(標式)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곧 베껴내어 한 책으로 만들고, 연대순으로 편집하여 제목을 ��시사(詩史)��라고 하였다. 풍속을 살펴보려는 자들이 보지 않으면 안될 책이니, 붓을 잡는 자들이 (이 책에서) 채집할 수 있도록 대비해 둔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여름.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은 삼가 쓰다. 耘谷行錄詩史序14) 嘗聞原州人元天錫在麗末隱居著書。言禑․昌父子非辛出事甚悉。逮我朝。閉門終身。其淸風峻節。直可與圃․冶諸公相伯仲。而子孫秘其書久益密。人無得以見者。幷與其名遂泯泯不傳於世。後二百年。余按節到是州。適得其所爲詩耘谷集。雖所紀不多。與向所聞異。要之不失爲特筆也。嗚呼。方禑之嗣王位也。數三元老如崔都統․牧隱․圃隱諸公猶在也。不惟當時上下無異議。牧隱首曰。當立前王之子。及昌之廢也。始曰。禑父子乃旽之子孫。盖不如是則昌無可廢之道。特爲此以籍之耳。不然。王氏之祀已絶於恭愍之後。而以數公精忠大節。竭誠盡瘁。死而後已者。果爲誰乎。況朝廷綱紀不甚潰裂。而軍國大政。一委之數公。則廢僞君存國姓。必不出他人之後。其所進退取舍。講于中者固已審矣。彼修史輩亦嘗食王氏之祿者。旣不能一死。又以禑父子冒之辛。此猶不足。至記恭愍從屛後觀洪倫等褻行事。至今觀者莫不醜唾。據禑一事。不足知其誣。微公一言。千百載下。必將襲謬不已。可謂東國有史乎。若是乎忠臣義士之有益於爲人國家也。有牧隱․圃隱諸公而立於朝。則當天命人心已去之後。能有所扶持。至於數十年之久。其隱而在下也有如公者。則吟咏陶寫之間。據實直書。一言一字無非忠憤所激。不但王氏之爲父子者定。麗史中亂言妄書亦將因此。而或有辨證之地。則窮達出處雖不同。其爲邦家之光一也。當時之君。早辨忠邪。終始委任。得以展布所蘊。牧隱․圃隱豈終爲文天祥․陸秀夫之徒。而茹芝餐菊亦豈公之所欲自托者哉。可悲也夫。公之詩二卷。皆公所自書。多與山人․釋子所嘗往來酬唱。而其中若干首。卽公之大節所寓以存者。亟當廣布於世。爲之標式。遂抄而爲一冊。編其歲月於其間而名之曰詩史。盖觀風者之所不可已。而亦以備秉筆者採焉。 萬曆 癸卯 夏。江原道 觀察使 朴東亮。謹書。 ( 운곡시사 중에서) Ⅰ-059) 신(辛) 사주(社主)를 곡(哭)함 인생이 허깨비 같음을 일찍이 알아 마침내 조사(祖師)의 선(禪)을 닦아 얻었으니,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은 빙호(氷壺)의 달이고233) 세상을 피해 한가로운 몸은 설악(雪岳)의 하늘일세. 절234) 아래 눈과235) 바람 일어나고 유루(庾樓)236) 앞에 거문고 꿈이 끊어졌으니, 지난 일 생각해봐야 이미 묵은 자취라 흰 구름 푸른 산도 함께 슬퍼하네. 哭辛社主237) 早識浮生夢幻緣 晩年參得祖師禪 出塵心淨氷壺月 遯世身閑雪岳天 玉麈風輕祇樹下 瑤琴夢斷庾樓前 回頭往事成陳跡 雲白山靑共慘然 자료출처 : “운곡시사” : 원천석 저 이인재, 허경진 역 |혜안 |2007.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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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좌를 수탈한 명분을 정당화할려면 그런모략이 있어야 명분이서기 때문이겠지요
在春일가님! 저는 판서공 후손 辛弘燮 입니다. 올려주신 사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료가 발견되어 훼손된 부분이 바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