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城에 올라간 화요일의 사람들
이문호칼럼-25
디모데반 두 교주에게 드린 스승의 날 선물이 야릇한 잠옷
한남cbmc의 ‘화요일에 모이는 사람들’이 지난 18일 오후 남한산성에 올랐습니다. 교재가 바뀐 것을 계기로 心機一轉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산성 안의 한경직 목사 기념관에 집합, 西門과 수어장대를 거쳐 개미촌이라는 식당에서 김성수, 이혜숙 부부가 쏘신 저녁을 즐긴 후 밤안개를 뚫고 하산했습니다.
마침 스승의 날이기도 하여 성경공부반의 영원한 교주이자 스승이신 김의환 원장님과 신명철 회장님께 조촐한 선물도 전달했는데 이혜숙 사모님이 골랐을 선물이 하늘하늘 부드럽고 예쁜 여름 잠옷이라 받으신 분 연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질투성 지적이 제기되고 스승도 아닌 사람들이 주제 파악도 못한 채 분수 모르고 공연히 부러워하는 등 다소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봄비 부슬부슬 내리는 산성 저녁의 고즈넉함을 만끽한 이날 참석자는 강인구, 김성수, 김의환, 배한욱, 서선욱, 신명철, 이문호, 이혜숙, 정유근, 제영희, 조삼현, 하영숙...열두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12 제자와 같았네...그러나 가롯 유다는 없겠지요.
일행은 남한산성의 西門에서 잠실과 송파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374년 전 겨울의 스산한 광경이 떠올라 남다른 감회에 젖었습니다. 淸나라 10만 대군에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산성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두려움에 떨다 결국 仁祖가 淸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의 현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이날은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북한이 무자비한 징벌, 전면전쟁 운운하면서 공갈협박을 남발하던 때여서 더욱 국력과 안보, 지도층의 리더십 등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1월30일 삼전나루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식을 마치고 인조는 동대문을 거쳐 밤 10시 쯤 창경궁으로 돌아옵니다. 46일만의 환궁인데 한양 거리에는 시신이 즐비하고...포로가 된 양반집 부인이나 처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옷을 뒤집어쓰고...도성의 집들은 약탈당하고 불타고...目不忍見의 참상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러했겠지요.
며칠 후 인질 신세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는 세자와 봉림대군 일행을 고양까지 나가 배웅하고 임금이 서대문을 거쳐 궁궐로 돌아올 때 한 노파가 길거리에서 땅을 치며 “날마다 술만 퍼마시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다 죽게 했구나. 대체 누구의 잘못이냐. 내 자식과 남편이 다 적의 칼에 죽고 나만 남았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일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이냐”며 절규한다고 어느 책에 나옵니다.
기록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만주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60만명이라는데 ‘화냥년’(還鄕女)의 비극이 말해주는 바 너무도 참혹한 전쟁이었고 불쌍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여진족 後金의 홍타이지(太宗)가 나라 이름을 淸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자 당시 조선에서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다”며 형제관계를 단절하여 병자호란을 자초했습니다. 불과 4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또 북쪽 오랑캐에게 당한 무능한 임금과 조정 신료들에 대한 분노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때의 비극이 오늘날 재현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6.25의 참극도 불과 6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서도 김정일을 옹호하는 매국적 발언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흡사 ‘김정일의 남자’ 같은 그들은 우리의 단호한 보복론을 비난하지만 오늘날의 김정일 응징론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김정일의 위협에 굴복하는 그들은 당시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한 주화파가 아니라 從北, 親北주의자이거나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양보하다 2차대전의 참화를 당한 챔버린 같은 유화론자일 뿐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중첩되다보니 디모데반이 봄비 내리는 스산한 저녁 뜬금없이 남한산성을 찾은 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끝)
첫댓글 참 보람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거 같네요-- <이상한 소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북한으로 가서 살라고 하면 절대로, 죽어도 못간다고 한다는 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