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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잊게 하시는 하나님
창 41:50-52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모든 고난은 애굽 총리로 세움을 받으면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수고도 곧 끝이 날 것입니다.
이제 잠시 잠간 후에 오실 이가 오시면 우리 성도님들 하신 일에 따라 보상이 주어 질 것입니다.
그날까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해 나가게 되길 바랍니다.
요셉은 애굽나라의 총리로 세움을 입고도 지금까지 하던 대로 충실하게 행하였습니다.
그의 삶에 대하여 증언의 말씀은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부조 222 “요셉의 성품은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한결같이 시험을 견디어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 있을 때나 감방에 있을 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하나님께 충성을 나타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었을까요?
증언의 말씀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상동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가장 높은 데 이르기까지 어떤 위치에서든지 자기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 최고의 봉사를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연마하는 것이 되었다. 창조주의 뜻에 일치되게 사는 사람은 가장 참되고 가장 고상한 품성을 계발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까?
창조주의 뜻에 일치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창조주의 뜻을 알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활용하게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일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우선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일을 우선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살아가는 형편이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날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시는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요셉은 애굽왕 바로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궁중에서 충실한 사람이었던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의 아내로 줍니다.
창세기 41장 46절에 보면 요셉의 나이가 나옵니다.
창 41:46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 나이가 얼마라고 합니까? 삽 십 세라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얼마나 하였습니까?
17세에 종으로 팔여 갔다면 약 13년을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였고 가치 없었고 손해 가는 그런 시간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 나라는 이집트 왕자로 더 잘 알려진 모세는 젊고 혈기 왕성하던 나이 때에 왕궁에서 다음 왕의 후계자의 반렬에서 아주 우수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왕자가 있었지만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모세가 너무 뛰어 났기에 왕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받은 교훈으로 그는 자기가 어느 민족이었는지 알았고요.
그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이런 자리에 있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혈기로 자기 동족을 위한다고 한 것이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요.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도망을 갔어야 했습니다.
갈곳 없는 방랑자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 도착하여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서 그곳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으십니다.
40년의 시간이 허비한 듯한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들 있죠? 무엇을 계획을 하면 착착 진행되어 계획하고 생각한 일들이 순조롭게 잘 되어 가는 것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우리의 생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와 다를 수가 있습니까?
요셉이 종살이 할 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모세가 애굽의 촉망 받는 다음 군주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던 왕자의 자리를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절망감을 느꼈겠습니까?
이제는 양치기로 늙어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요셉은 감옥에서 이제 남은 생애 일생을 종살이 밖에 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러면 절망감이 와서 죽고 싶은 그런 마음도 들었을까요?
종살이 하는 것이 나을까요 죽는 것이 나을까요 라고 물으면 종살이 보다는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곳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종살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하였습니다.
근데 이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잘못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그 댓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정도 되면 하나님 원망하고 비관할 만 하지 않습니까?
욥이 까닭없이 고난을 당하였을 때 자식들 재산들 다 잃어버렸다는 연락을 듣고 욥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욥 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런 기도가 나옵니까?
그것도 재산을 조금 잃었을 때는 그런 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많은 자녀들 가운데 하나를 잃었을 때는 그런 기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시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다 날라가고요. 사랑하는 열 아들과 딸이 하루 아침에 다 죽었는데도 그런 기도가 나오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간계로 인하여 욥의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어서 가려워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재에 앉습니다.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부인이 보고 뭐라고 합니까?
욥 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라고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내님들이시여 신앙을 하시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관련된 심한 말들은 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 라는 말을 듣고 욥은 무슨 말을 합니까?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저는 이런 욥의 신앙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셉도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고 죽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셉은 잘 견딥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계가 알람이 울릴 때 바로에 의하여서 요셉은 석방이 되고 함께 그 나라 왕 다음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바로가 직접 요셉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1: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나는 너보다 높음이 뭐 뿐이라 합니까? 보좌 왕의 자리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이름을 줍니다.
예전에는 왕으로부터 이름이나 성을 하사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나라도 그렇죠.
원로 목사님 한 분은 자신의 성씨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그분의 관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평산신씨의 시조가 누군지 아십니까? 신숭겸 고려 장군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과 함께 거닐 때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 때룰 보고 저거 하나 잡을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럴 때 신숭겸은 몇째 기러기 옵니까 라니까 두 번 째다 하니 바로 활을 쏘아서 그 두 번째 날라가는 기러기를 떨어 뜨렸다고 합니다.
왕은 장하다고 칭찬을 하면서 평산 신씨라는 성을 하사 하였다고 하죠.
나중 신 숭겸은 팔공산 전투에서 패전하였을 때 왕의 옷을 입고 왕을 피신 시키고 왕 대신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자랑할 만한 시조라 생각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요셉은 성을 하사받지 않고 무엇을 하사받았습니까? 이름을
어떤 이름이었습니까?
창 41: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고고학을 통해 요셉의 애굽 이름이 발견되었는데 그래서 그 이름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브앗바네아 라는 이름의 의미는 “신이 살게 하셨다”라는 의미를 가진 애굽나라 말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통해서 애굽 왕이 요셉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들어서 안 것 같죠?
저도 요즘 집사람의 지금까지 살아 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왕이 요셉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금까지 살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브앗 바네아라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살게 하셨다 라는 이름을 준지 모르겠습니다.
요셉은 이름만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부인까지 얻었습니다.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누구의 딸을 아내로 얻게 하셨다고 합니까?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성경에는 비슷한 같은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지난번 다니엘 시간에 누구와 누구의 이름이 같았다고 들으셨습니까?
벨사살왕과 다니엘의 바벨론식 이름이 같았다고 했죠?
이곳에 또 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요셉이 애굽에 들어 왔을 때 요셉을 종으로 사 간 사람 누구죠? 보디발
보디베라와 보디발은 같은 이름입니다.
히브리어에도 보디발은 보디베라이고 보디베라는 보디파르입니다만 의미도 발음도 같은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보디발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시위 대장이고요 보디베라는 누구라 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온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은 그 당시 큰 태양의 신전의 도시였던 온이라는 성의 태양신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방 나라에서는 종종 왕가는 제사장 가문과 결혼으로 많이 맺어진다고 합니다.
서로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그런 마음에서이겠죠.
그러니 요셉은 애굽나라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명문가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과 결혼을 하다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날은 선택할 수가 있었지만 그 당시 요셉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신부감을 고를 수가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자녀교육은 애굽의 부도덕하고 탐욕적인 궁궐에 살면서도 성공한 이야기로 전해 집니다,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 다음 기록에 나오던가요?
나오지 않지요. 그것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까?
요셉이 원하기만 하였다면 두 아들을 애굽의 주요한 자리에 앉혀서 호의 호식 하면서 살아가도록 할 수 있었을까요?
이 다음에 우리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후에 야곱과 가족이 왔을 때 그들 중에 능력있는 자를 등용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요셉은 형들을 바로 앞으로 인도하면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창 46: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왕궁에 있다고 왕궁에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생각을 차단하는 말 같지 않습니까?
왕궁의 생활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된 요셉은 형제들도 자기의 자녀들도 왕궁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애굽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목축업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자녀들을 요직에 앉히기 위하여 애를 쓰겠습니까?
형제들을 정치에 입문시켜서 자기의 입지를 더 강화 시키려 애를 쓸 수가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런 머리를 굴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땅에 살았지만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모두도 하늘 사람들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주어진 기회들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생활로 증거 하면서 살았던 요셉처럼 우리 모두의 삶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얻은 요셉은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어떤 이름들입니까?
창 41:51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아들을 얻고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그러한 이름을 지은 이유를 무엇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
이 말씀 속에 무엇을 잊지 못하는 요셉의 모습이 있는 거 같습니까?
받은 고난과 또 무엇요? 아버지 집에서의 모든 일을....
성경에 요셉의 눈물에 대하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만났을 때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온 기록을 우리는 다음에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이 울었을까요?
울었다는 다른 기록은 없지만 요셉은 눈물이 많았던 사람 같습니다.
사랑받던 아들이 종 살이 하면서 아버지가 그리웠을까요?
하나뿐인 친 동생이 보고 싶었을까요?
요셉도 사람 맞습니까?
사람이라면 그렇게 사랑 받았던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동생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포악했던 형들을 생각하니 동생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요셉은 밤마다 울면서 밤을 새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하셨다고요? 잊게 하셨다.
저는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모든 생활은 하늘에서 부를 노래의 곡조와 가사를 쓰고 있다는 말을 잘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하늘에서 부를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노래의 가사를 언제 쓰고 있다고요? 지금
그리고 악보를 언제 만드느냐고요? 지금
그래서 고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곡조가 어떠하겠습니까? 높낮이의 차이가 많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하늘에서 부를 새 노래 가사와 악보를 잘 준비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고난이 오고 고생이 되는 생활들은 하늘 새노래의 가사가 더 은혜스럽고 곡조가 더 아름다운 멜로디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작업이라 생각하신다면 그것도 은혜가 될줄 믿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이렇게 짓습니다.
창 41: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나의 수고 한 땅에서라고 하죠? 요셉의 13년간의 생활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요셉만이 알고 있었겠죠?
그러한 것을 누가 잊게 해 주었다고 합니까? 요셉의 가정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모든 수고와 고난들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다 잊어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다 잊을 수 없다 할지라도 주님 오시는 날 그 모든 것들을 생각나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나오는 날을 기다린 것 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자유의 몸이 되기를 더 기다렸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늘 가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더 사모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시지 않으십니까?
아직 우리 마음에 죗된 생각과 세상의 욕심 그리고 이기심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들 제거되어야만 하늘에 데려다 놓아도 진정한 하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동참하시어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날을 압당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