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인식과정의 길라잡이 (Ⅰ) - 범주의 열거. 대림.각묵스님
제1장에서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마음은 이렇게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그 일어나는 곳과 종류 등의 기준에 따라서는 89/121가지로 나누어진다. 제3장에서는 느낌과 원인과 역할과 문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작용함을 보았다.
이제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법칙을 살펴 본다. 그러면 이 인식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조건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첫째, 모든 마음은 대상을 가진다. 그 어떤 마음이든 마음은 반드시 대상과 함께 일어난다.
둘째, 마음은 물질보다 16배 빠르다. 그래서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 최대 16번의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진다.
셋째, 이 두 가지 조건이 결합하여 인식과정은 한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최대 17심찰나를 넘지 못한다. 마음은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 16번 이상을 일어날 수 없으니 그 물질이 일어나는 찰나에 개재되어서 흘러가버린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까지 포함하면 17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과정의 중요한 밑그림이 되는 것이다.
넷째, 이렇게 최대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고정된 법칙에 따라서 순서가 분명하게 정해져 일어난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엄격한 고정된 법칙을 알게 되고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던 우리 마음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마음의 여러 현상이나 경계(오염)에 속지 않고 해탈의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이것이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가장 큰 목적이다.
범주의 열거(vatthu)
(1) 여섯 개 조의 범주(cha chakkāni): 인식과정의 길라잡이에 여섯 개 조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범주를 알아야 한다. ① 여섯 가지 토대 ② 여섯 가지 문 ③ 여섯 가지 대상 ④ 여섯 가지 알음알이 ⑤ 여섯 가지 과정 ⑥ 여섯 가지 대상의 나타남이다. 인식과정에서 벗어난 마음의 대상은 3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업(kamma)과 업의 표상(kamma-nimitta)과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다.
그 중에서 토대와 문과 대상은 이미 앞에서 설했다.
(2) 여섯 가지 알음알이(viññāṇa-chakka): 여섯 가지 알음알이는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이다.
(3) 여섯 가지 인식과정(vīthi-chakka): 여섯 가지 인식과정은 문에 따라 여섯이다. 그것은 ① 눈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 ② 귀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 ③ 코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 ④ 혀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 ⑤ 몸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 ⑥ 마노의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이다. 혹은 ① 눈의 알음알이[眼識]와 연결된 인식과정, ② 귀의 알음알이[耳識]와 연결된 인식과정, ③ 코의 알음알이[鼻識]와 연결된 인식과정, ④ 혀의 알음알이[舌識]와 연결된 인식과정, ⑤ 몸의 알음알이[身識]와 연결된 인식과정 ⑥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와 연결된 인식과정이다.
문과 연결된 마음의 일어남은 상응하는 알음알이들과 적용시켜야 한다.
이처럼 마음들은 감각의 문에서나 마노의 문에서 대상을 인식하며 일어난다. 이들은 결코 닥치는 대로 일어나지 않고 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한 마음(정신)에서 다음 마음(정신)으로 규칙적이고 통일된 순서에 우해서 일어난다. 이를 마음의 정해진 법칙(citta-niyama)이라 한다. 주석서에 의하면 각각의 인식과정에서는 필요 불가결한 조건들이 있다.
첫째, 눈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눈의 감성, ② 형색이라는 대상, ③ 빛, ④ 마음에 작의(作意)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귀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귀의 감성, ② 소리라는 대상, ③ 허공, ④ 마음에 작의(作意)가 있어야 한다.
셋째, 코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코의 감성, ② 냄새라는 대상, ③ 바람, ④ 마음에 작의(作意)가 있어야 한다.
넷째, 혀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혀의 감성, ② 맛이라는 대상, ③ 물의 요소, ④ 마음에 작의(作意)가 있어야 한다.
다섯 째, 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몸의 감성, ② 감촉이라는 대상, ③ 땅의 요소, ④ 마음에 작의(作意)가 있어야 한다.
여섯째,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① 심장토대, ② 법이라는 대상, ③ 바왕가(존재지속심), ④ 작의(作意, 意-法)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심장토대’는 감성 물질이 있을 때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한 조건이 된다. 이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은 다섯 감각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를 모두 그 대상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직 마노의 대상이 되는 법만을 언급했다.
이런 여섯 가지 인식과정은 편의상 (1) 다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과 (2)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들을 전부 포함하는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은 다시 혼합문 인식과정(missakadvāra-vīthi)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오문과 의문을 다 포함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마노의 문에서만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순의문純意門 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을 도구로 하지 않고 순전히 마노의 문인 바왕가(존재지속심)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문인식과정은 다섯 문에 각각 상응하는 감각기관에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여섯 번째인 의문인식과정은 외부의 감각의 문들과 관계없이 다양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자료: 아비담마 길라잡이(대림스님 · 각묵스님 옮김 / 초기불전연구원)
ㅡㅡ
이하에서 레디 사야도 는 각주 처리
(2)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
오문의 인식과정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체적인 감각의 문과 마노의 문 두 가지 문이 실제로 개입된다. 왜냐하면 이때의 마노의 문은 존재지속심(Bhavaṅga)인데, 인식과정이 이 존재지속심으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인식과정은 감각의 문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마노의 문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이런 인식과정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이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을 ‘순의문純意門 인식과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의문인식과정에는 ① 제한된 속행을 가진 욕계의 인식과정과 ② 색계·무색계의 고귀한 마음과 출세간의 증득과 관계되는 본삼매의 인식과정의 둘로 나누어진다.
- 제한된 속행과정(paṅtta-javana-vīthi)
이 제한 된 속행과정에는 Ⓐ 오문五門에 뒤따르는(pañcadvāra-anubandhakā) 인식과정과 Ⓑ 독립된(visuṁ-siddhā) 인식과정의 두 가지가 있다.
(a) 오문五門에 뒤따르는(pañcadvāra-anubandhakā) 인식과정: 막대기로 종을 치게 되면 종이 음파의 흐름을 계속해서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감각의 문 가운데서 하나가 감각의 대상에 의해 부딪혀서 일단 하나의 오문인식과정이 끝나면 과거의 감각의 대상은 마노의 문의 영역에 들어와서 많은 의문인식과정들을 생기게 만든다. 이런 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의 속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후속과정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이들은 전편의 다섯 감각의 문에 따라서 다섯 가지가 있다.
레디 사야도는 <빠라맛타디빠니 디까>에서 이런 인식은 오문에서● 벌어지는 맨(bare) 인식과정에서는 일어나지 못하며 이 후속 과정에서야 비로소 선명한 대상의 인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눈의 의문에서의 인식과정 다음에는 먼저 ① ‘그와 일치하는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이 생기는데 이것은 오문에서의 인식과정에서 인지된 대상을 마노의 문에 재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그 ②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이 뒤따르고, 그 다음에는 ③ 색깔을 주시하는 과정이, 그 다음에는 ④ 형태를 파악하는 과정이, 그 다음에는 ⑤ 형태를 인식하는 과정이, 그 다음에는 ⑥ 이름을 파악하는 과정이, 그 다음에는 ⑦ 이름을 인식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 가운데서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은 개인의 테두리 안에서 이전의 원래 오문에서의 인식과정과 그와 일치하는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의 두 가지 과정을 통해 반복 인식된 것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종합하는 역할을 실행하는데 대상에 대한 별개의 여러 시도들을 하나의 인식의 통일체로 융합시킨다. 이것은 마치 빙빙 돌리는 횃불을 불의 바퀴처럼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생겨야 색깔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색깔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 비로소 우리는 ‘나는 푸른색을 본다’라고 색깔을 인식하는 것이다. 형태를 인식하는 것이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형태를 인지하게 된다. 이름에 대한 인식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이름을 인지한다. 이런저런 특별한 생김새에 대해 이와 같이 인식하는 의문에서의 속행과정이 일어날 때만이 우리는 ‘나는 이런저런 특별한 생김새를 본다’라고 알게 된다고 레디 사야도는 단언하고 있다.
레디 사야도의 이런 설명은 우리가 어떻게 대상을 ‘꽃이다, 좋다, 나쁘다’ 등으로 파악하게 되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명이다. 우리 경험으로 봐도 물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만으로는 대상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이 오문인식과정 뒤에도 무수히 일어나는 의문인시과정들을 거쳐서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b) 독립된(visuṁ-siddhā) 인식과정: 독립된 인식과정은 여섯 가지 대상 중의 어떤 것이 오문인식과정의 후속으로서가 아니고 직접 자신의 인식의 영역에 들어 올 때 일어난다. 여기서 ‘어떻게 대상이 가까운 감각기관과 충돌하지 않고 직접 마노의 문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레디 사야도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출처를 열거하고 있다.
① [이전에] 직접 본 것(diṭṭha)을 통해서
② 직접 본 것을 바탕으로 추론함으로써
③ 들어서 배운 것(suta)을 통해서
④ 들어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추론함으로써
⑤ 믿음이나 견해나 추론이나 숙고함을 통해 견해로 받아들임으로써
⑥ 여러 가지 업력이나 여러 가지 신통력이나 사대四大의 부조화나 천신의 영향이나 이해나 깨달음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오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의문에서 인식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다. 그는 만일 어떤 사람이 대상을 단 한 번이지만 분명하게 경험했다면 그 대상을 의지하여 어떤 조건이 생겨나서 나중에 존재지속심을 동요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백년 후든 다음 생이든 수십 생 다음이든 상관이 없다. 수행을 하다 보면 수십 년 전 단 한 번 경험했던 것이 바로 지금 일어난 것처럼 뚜렷하고 강렬하게 마음의 문에 대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보면 레디 스님의 이런 주장은 아주 타당하다 하겠다.
이렇게 이전의 경험들이 투입되어 그 대상을 공급받은 마음은 그들의 영향을 받기 십상이다. 그처럼 우리의 마음은 극도로 예민하고 민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어떤 감각의 대상을 만나면 그 대상은 단 한 찰나에 이전에 경험한 수천수만의 대상들에까지 퍼져나가는 정신적인 파장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마음의 흐름(●相續, santati)은 끊임없이 이런 인과관계의 영향에 자극받아 항상 존재지속심의 흐름으로부터 나올 기회를 찾으면서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려 한다. 그러므로 존재지속심에 같이하는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의 마음부수법은 존재지속심이 계속 동요하도록 만들며 그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일어날 조건을 이미 갖춘 대상들로 거듭거듭 전향하게 한다. 그래서 레디 사야도는 비록 존재지속심이 자기의 대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다른 대상으로 기우는 형태로 일어난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바왕가에 내재해있는 영속적인 ‘경고음’의 활동 때문에 그 대상에 작용하는 다른 조건들의 힘으로 그 대상이 아주 현저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은 바왕가로부터 알음알이의 흐름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대상은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영역으로 바로 들어온다.
욕계에 관계된 의문인식과정은 대상이 선명하고 희미한 것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선명한 대상과 관계된 인식과정에서 대상이 마노의 문의 통로에 들어오면 존재지속심은 동요한 뒤 끊어진다. 그러면 의문전향의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게 되고 바로 이어 일곱 번의 속행과 두 번의 등록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다시 그 과정은 존재지속심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욕계의 존재들에게 해당되고, 색계와 무색계들에게는 대상이 아주 선명하더라도 여운의 찰나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상이 희미할 때는 속행의 끝에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 여운은 일어나지 않는다.
ㅡㅡ
(3) 여운의 법칙(tadārammaṇa-niyama) 등록? 결정
특정한 찰나에 일어나는 특정한 마음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엄격히 정해진 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
모든 경우에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때 ●5가지 알음알이[前五識]와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여운의 마음은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다. [보통으로] 원하는 것일 때 그들은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다. [대상이] 열렬히 원하는 것일 때 조사하는 마음과 여운의 마음은 기쁨이 함께 한다. 그곳에서도 기쁨이 함께한 작용만 하는 속행 끝에는 여운의 마음이 기쁨과 함께 한다. 평온이 함께한 작용만 하는 속행 끝에는 여운의 마음은 평온과 함께 한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대상에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그 대상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상을 경험하는 자의 기질이나 선호도에 따라서 다르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위방가>의 주석서인 ‘삼모하위노다니’는 어떤 사람이 원하지 않는 대상을 원하는 대상으로 여기거나 원하는 대상을 원하지 않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전도[想顚倒]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보더라도 그 사람의 개인적 선택과 상관없이 대상은 그 대상의 고유성질에 따라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대상이 가지는 고유성질의 차이는 보통 사람에 의해서 알아진다고 한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대상을 경험하는가, 보통으로 원하는 대상을 경험하는가, 열렬히 원하는 대상을 경험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의 업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러므로 대상은 업이 과보의 마음으로 익도록 업에게 기회를 부여한다. 과보의 마음들은 아무런 고의성이 없이 대상의 성질과 자연히 일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실제 얼굴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과 같다.
해로운 업의 힘으로 우리는 원하지 않는 대상과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인식과정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보의 마음들은 그 해로운 업이 익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경우에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알음알이[前五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여운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해로운 과보의 마음들이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는 느낌은 고통을 수반하는 몸의 알음알이[身識]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평온한 느낌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과보의 마음들은 대상의 성질에 의해서 지배가 되지만 자와나(속행)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경험자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상이 열렬히 원하는 것일지라도 자와나들은 평온과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로운 마음들로서 무관심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을 뵙고도 회의론자들에게는 의심과 함께하는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도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평온이 함께하거나 지혜와 결합된 유익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열렬히 원하는 대상에 대해서까지도 적의나 불만족이 함께하는 자와나들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원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자와나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학대 음란증 환자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 기쁨이 함께하는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로 응답할 수 있으며, 부정관을 닦는 스님은 썩어가는 시체를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와 결합된 유익한 마음으로 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만족이 함께한 속행 끝에 있는 여운의 마음들과 존재지속심은 평온이 함께 한다. 그러므로 만약 기쁨이 함께한 재생연결식을 가진 자의 경우 불만족이 함께한 속행의 끝에는 여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이전에 익숙한 어떤 작은 대상에 의지하여 평온이 함께한 조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다음에 곧바로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고 스승들은 말씀하신다.
(4) 속행의 법칙(javana-niyama)
속행(javana)도 역시 정해진 법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① 욕계의 속행: 속행 중에서 제한된 속행과정에서 욕계의 속행은 일곱 번 혹은 여섯 번 일어난다. 그러나 임종 시와 같은 느린 과정에서는 다섯 번만 일어난다. 세존께서 쌍신변(雙神變, 경이로운/놀라운)을 나투는 때와 같은 빠른 과정에서는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반조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그들은 설한다.
② 증득에서의 속행: 본삼매의 첫 번째 과정에서 처음으로 증득하는 자에게 일어난 고귀한 속행과 신통지의 속행은 한 번만 일어난다. 그다음에는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 네 가지 도의 일어남은 하나의 심찰나 동안만 유지된다. 그다음에 두세 개의 과의 마음이 적절하게 일어난다. 그다음에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 멸진정에 들 때 네 번째 무색계(비상비비상처)의 속행이 두 번 일어난다. 그다음에 멸진정에 든다. [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할 때 불환과 혹은 아라한과가 적절하게 한 번 일어난 뒤 멸할 때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 증득의 과정에서는 존재지속심의 흐름에서처럼 인시과정의 법칙이 없다. [고귀한 속행과 출세간의 속행은] 많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
3. 개인에 따른 분류
(1) 두 개의 원인을 가진 자와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
아비담마에서 원인(hetu)이라는 단어는 모두 탐·진·치와 불탐·부진·불치의 여섯을 뜻하는 용어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란 이런 원인을 가지지 않는 마음을 재생연결식으로 하여 태어나는 자라는 뜻이고 두 개의 원인을 가진 자란 불탐·부진·불치 가운데 두 개의 원인을 가진 마음을 재생연결식으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욕계의 원인 없는 평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 두 가지가 재생연결식과 존재지속심과 죽음의 마음의 역할을 할 때 그들은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있다. 지혜와 함께하지 않는 네 가지 큰 과보의 마음들 중의 하나가 이런 세 가지 마음의 역할을 할 때 그들은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존재들에게는 아라한들에게만 일어나는 작용만 하는 자와나(속행)들이 일어나지 않으며 이런 존재들은 선禪을 통해서 본삼매도 얻지 못하고 도를 통해서 성자의 경지도 이르지 못한다.
지혜(앎)가 없는 재생연결식으로 인간이나 천상 등 욕계의 선처에 태어난 존재들에게는 재생연결식이 하열하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을 가진 큰 과보의 마음이 여운의 마음으로 일어나지 못한다. 이런 존재들에게 여운의 마음들은 원인을 가지지 않거나 두 개의 원인을 가진 것이다. 불가항력으로 원인이 없는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태어난 악도의 중생들의 경우 두 개의 원인을 가진 큰 과보의 마음들조차도 여운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지 원인 없는 과보의 마음들이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일어날 뿐이다.
(2) 세 개의 원인을 가진 자
지혜와 함께한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세 개의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고 한다. 범부이거나 유학이거나 아라한이 이런 존재들에 해당한다. 물론 여기서 유학이나 아라한은 태어난 다음에 그렇게 된 것이지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유학이나 아라한이 된 것은 아니다.
4. 세상에 따른 분류
욕계 세상에서는 모든 인식과정의 마음들이 적절하게 일어난다. 색계 세상에서는 적의와 연결된 속행과 여운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어난다. 무색계 세상에서는 첫 번째의 도와 색계의 마음과 미소짓는 마음과 낮은 무색계의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가 일어난다.
모든 세상에서 어떤 감성이 결여된 자들은 그 문과 연결된 인식과정의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식이 없는 중생들에게 인식과정이란 아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