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32) 황 생원의 유언
경기 안성의 황가네 방짜 유기가 혼수에 없으면 사대부 집안의 혼인은 이뤄질 수 없었다.
유기점들이 앞다퉈 한양 종로통 포목점 근처에 가게를 내려고 안달인데 황가네 유기공방은
안성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한양 대갓집 마님들이 가마를 타고 왔다.
황가네 방짜가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어릴 적부터 유기공방에 매달려 온 황 생원의
땀과 눈물 덕택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형제들 중간에 낀 황칠용. 황 생원은 동네 또래들이
서당에 가는 아홉살에 저잣거리 유기공방에서 풀무질을 해주고 밥만 얻어먹었다.
공방 일꾼들의 밥이 남으면 호박잎에 싸다가 집에 가져가 동생들의 허기를 달래줬다.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남다른 데다 이를 악무는 샘도 있어 빠르게 방짜 만드는 기술을 익혀갔다.
열네살에 한몫을 했고 이듬해부터는 돌 틀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놋쇠 물을 부어 바둑을 떠냈다.
방짜에 칠용이 혼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칠용이는 공방에 홀로
남아 방짜와 씨름했다. 그의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 불똥이 튀어 얼굴은 깨엿이 되고 놋쇠 물을
흘려 발가락이 붙어버렸고 헛 망치질에 손가락이 으깨졌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이제 늙고 병든 황 생원은 병석에 누워 살아온 한평생을 되돌아보는 신세가 됐다.
가난에 찌든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땐 눈물을 훔치다가도 자기 집 헛간에 유기공방을 차렸을 때를
돌아보며 황 생원은 자기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뭣이 그리 좋아서 그렇게 웃소?”
옆에서 병시중을 드는 오포댁이 황 생원에게 물었다.
“내 공방을 차려 놋쇠 물을 용해해서 처음으로 돌 틀에 붓고 나니 이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지.”
마누라가 죽었을 때를 생각하자 웃음은 싹 가시고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생원 나으리, 좋은 때만 생각하세요. 한달에 얼마를 벌었어요?”
오포댁 물음에 황 생원은 오백냥이라고 다섯손가락을 펼치며 환하게 웃었다.
황 생원은 자신이 어릴 때 하도 어렵게 자라서 아들 둘은 금이야 옥이야, 고생하고는 담을 쌓게 했다.
둘 다 장가를 보내서 장남은 수저·그릇 등 반상 유기가게를, 차남에게는 촛대·화로·향로 등 생활용품
유기점을 차려줬다.
그런데 이제 병석에 누워 있는 황 생원이 아들 둘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가게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안성 건달들과 어울려 기생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허구한 날 부부싸움이다.
아버지 황 생원이 병석에 누워 있어도 아들 두놈은 가뭄에 콩 나듯이 슬쩍 들여다보고 며느리 둘은
서로 짠 듯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생원 어른, 또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얼굴이 그렇게 어두우세요?”
오포댁이 묻자 황 생원이 손을 저었다.
황 생원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지만, 정신은 초롱초롱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오포댁에게
“나하고 결혼하세”라고 말했다.
오포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원 어른이 마침내 노망을 시작하네.’
삼년 전에 죽은 오포댁의 남편은 황 생원보다 두살 위지만 한평생 황 생원을 도와 황가네 유기점에
뼈를 묻은 형제 같은 사람이었다. 오포댁 남편이 몇해 동안 일을 못하고 누워 있을 때도 황 생원이
약값에다 생활비를 넉넉하게 대줬다.
오포댁이 어이가 없어 “어머머~” 하는 사이 황 생원은 대서방 영감님을 불러
혼인서류를 만들어 현청에 넣어버렸다.
며칠 못 가 황 생원이 이승을 하직했다.
삼일장을 치르고 나자 이방이 포졸 둘을 대동하고 와 황 생원의 일가친척을 모아놓고
황 생원이 맡겨놓은 유언장을 공개했다.
‘아들 둘이 운영하던 가게 두개 중 반상 유기가게는 나의 처 오포댁에게 주고
나머지 한 가게는 나의 형제 다섯에게 이할씩, 황가네 유기공방은 지금 일하는 여섯사람과
퇴직한 네사람에게 각자 일할씩 지분을 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남에게는 논밭 열두마지기,
차남에게도 똑같이 논밭 열두마지기를 주도록 하라.
남아 있는 돈으로 아들 둘이 기생집·요릿집 등에 깔아놓은 외상값을 모두 갚아주어라.
그리고 내년 봄 씨앗값으로 각자 이백냥씩 주고 남는 돈은 서당 짓는 데 보태주도록 하라.’
모두가 ‘어~’ 입을 벌리고 아들 둘은 털썩 주저앉았다.
황가네 방짜 유기점만 해도 문전옥답 백마지기 값어치도 넘고 공방은 모르긴 몰라도
사오백마지기값이 나갈 것인데 아들 둘에겐 각각 열두마지기 논밭뿐이라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고 당사자인 아들 둘은 얼이 빠져 하늘이 노래졌다.
두아들에게 준 논밭이 왜 열두마지기인가?
서른마지기·마흔마지기를 주면 머슴을 들이고 자신은 일도 안하고 술이나 마시고
기생머리 얹어줄 때는 서슴없이 논밭 몇뙈기 팔아치울 것이 뻔할 뻔 자다.
열두마지기는 머슴 새경 주고 나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없어 제 손으로 손수 땀 흘려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만큼의 농토다.
첫댓글 오늘 휴일 하루도 넉넉한 시간
활용하시면서 행복가득한 시간
되시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