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했던 건축사
1981년도 한국건축사 시험에서 나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지만 합격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왜냐면 각 과목의 합격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해 응시한 수험생들 중에 가장 높은 점수로부터 50 명
만을 뽑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고, 그외 알수 없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어떤 변수가 작용될지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 늦 가을 오전에, 나는 여의도 MBC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아내로부터 온 전화를 통해서 “여보! 당신 건축사시험에 합격했어요!”
라는 아내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날 오전에 아내는 건설부로
부터
온 건축사 자격시험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여의도 MBC신축현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주택현장의
감리를 하며 교회에서는
감독(Bishop)으로 봉사하면서 무난히 건축사
시험에 합격을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꿈꾸어 왔던 건축가가 되려던
나의 꿈을
22년만에야 이룰 수 있었다.
그 때 나의 건축사 시험 합격은 그 해 9월에 회갑을 맞았던 아버지에게
좋은 선물이 되어서 늦게나마 효도를 할 수가 있었고, 많은 고생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주던 젊은 아내에게는 기쁨과 위로를 주었으며, 고향에
살고있던 일가 친척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되었으며, 내 자신도 역시 크나
큰 보람과 기쁨과 성취감을 맛 볼 수 있었다. 311

또한 그 때 나는 교회에서는 감독으로 청소년을 지도하는 책임도 가졌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자주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조언하곤 했던
때이라, 건축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청소년들을 더 떳떳히 지도 할 수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더 당당해질 수 있었으며 성도들과 친구들
에게도
기쁨을 전할 수가 있었다.
그 때 첫 기회에 건축사 시험에 합격한 요인을 생각하면 5가지가 있다.
첫 째는, 오랜 22년 동안 나는 건축사가 되려는 확실한 꿈을 가졌고.
둘 째는, 그 꿈을 이루기위해 가출까지 해서 일하며 열심히 공부했으며
셋 째는, 바로4년 전의 시공기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기초를 잘 다졌고
넷 째는, MBC공개홀 의장설계를하며 조명과 음향에 의문이 있을 때 곧 바로 자문 위원과 상의해서 조명과 음향지식을 쌓았으며
다섯 째, 건축설계 시험을 치룰 때 비록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포기않고 최선을 다 했고 고마운 감독관의 배려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노력과 배려덕분에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기회에 멋지게
건축사 자격시험의 1차와 2차 에 무난히 합격해서, 건축사가 되려던
소망을 마침내 이룬 것이고, 오랫 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고통과
외로움과 배고픔이 모두 헛되지 않고 밝게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312

부산 문화회관 현상당선 후 전시장에서
부산 문화회관 현상설계
1981년 겨울에 나는 ‘고난도 몰려서오지만 행운도 역시 함께 동무해서
온다.’ 는 말을 직접 체험했었다.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던 얼마 후 나는
임장렬, 송이호와 3인 합동으로 부산 문화회관 현상설계에 참여했었다.
그 때 두 사람을 후배 건축인 김영민의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났지만,
그 해에 함께 건축사가 된 것 알고는 서로 축하하며 인사를 나눴고, 마침
공고되었던
부산 문화회관 현상설계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중 서로 뜻이
통해 강남구 S아파트에 모여 각자가 분담해서 현상설계를 준비했었다
그 때 우리들은 건축사가 되었지만 미쳐 사무소를 개설하지 못한 까닭에,
임장렬씨가 일하던 사무소 이름으로 작품을 제출하기로
했었다
그 때 나는 많은 현상 설계를 한 경험을 살려서, 전체 건물의 배치, 형태,
동선처리, 주 단면, 대회관 내부 투시도 그리기를 맡았고, 모형을 만드는
일에도 협조했었다. 다행이 모두가 현상설계경험을 가진 덕분에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일을 거의 마무리 할 때 동참했던 임장렬의 친구와
다툼이 생겨서 하마트면 현상을 포기할 뻔했으나, 가장 연장자이던 나는
그들을 설득해서 결국은 작품을 완성해서 제출했었다
그런 그 때에 “이번 현상은 완전히 달걀로 바위 깨기다” 라고 말하면서
작품을 제출했던 우리는 당시 한국 건축계 기라성 같은 김수근, 김중업,
김정철씨등 유명한 선배 건축사들의 작품을 제치고 젊은 우리들의 안이
당선되었을 때 간혹은 그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313
그러나 좋은 일을 성사시킨 후에는 사람들 간에 이해가 엇걸리고 욕심이
생겨 서로 간에 다툼이 일어나는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지분을 약속
받은 후에 임장렬과 송이호 2사람에게 실시설계를 양보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송이호 마져 갈라져서 결국 임장렬 혼자 독차지해서 회관의
본설계를 마쳤고, 그 후 그는 승승장구해서 수원과 인천시의 문화회관을
설계를 계속했지만 돈 보다 사람이 더 중요함을 깨닫지 못해선지 아직도
약속했던 지분을 지불하지 않아서 많이 아쉽게 생각한다.
경동건축연구소 운영
나는 건축사가 된 다음 해 1982년 봄에 서울 강동지역에서, 교회 선배
요청으로 경동건축 연구소를 개설해 운영하며, 건축과 실내장식 설계와
감리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게 되면 선배 건축사들의 건축
기본 계획 설계와 투시도와 조감도를 그리는 일도 했었다
그 때그런 일을 하면서 무량 건축의 주길중 선배 건축사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아서 주택공사에서 주관해서 실시했던 상계동, 반월,
산본, 성남, 부산 망미아파트 단지 등등의 전체 조감도를 그려 제출해서
청와대 브리핑 용으로 사용했었다. 그런 1982년 6월에는 한국 건축가
협회 정회원이 되었고, 사무소도 독립해서 강남구로 이전을 했었다 314

그러던 그 때 나는 청주 공군사관학교
일을 맡겼던 국제건설의
요청을
받아 또 다시 안성 중앙 대학교 신축기본 계획안을 의뢰 받아 계획을
했으며 대학교 교정의 전체 조감도를 그렸었다. 그리고 경기도청에서
시행했던 소규모 대지에다 건축을 할 수가 있는 3 가지 모범주택 안을
계획해서 조감도를 그려서 제출 했었다
그 후 1984년에는 강남 말죽거리에 신축하려던 00교회 현상설계에
당선했고, 건설부에서 시행했던 다세대 주택 현상 설계에도 당선해서
전국에 배부 할 지침도를 제작해서 납품을 했었다
그렇게 어려운 현상설계에
자주 당선 한 탓에, 강남에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던 여러 선배건축사들의 큰 부러움을 샀었고, 차츰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간혹 선배건축사들
요청을 받아 기획설계를
하기도 했었다
또한 실내 장식분야의
일은 안양 동양나이론의 상설 전시장을 꾸몄고,
벽산그룹 건축자재 전시장을 꾸몄으며, 천호동 최상섭 정신신경과 병원,
압구정동 커피샆 B & W , 논현동 마담 뽀라 여성의상점 그리고 보광동
한강변의 고급음식점 실내장식 설계를 했으며 직접 공사도 했었다
또한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몇 년 동안에 설계했던 역삼동 조정석
사장 주택은 회원주택 특집 작품으로 건축사지 표지에 실렸고, 노량진의
김창선 원장 주택은 건축문화지 창간 1주년 특집 표지에 실렸으며, 그외
주택, 상가, 사무소, 음식점, 교회, 사찰 등을 설계하고 감리를 했었다. 315


316
첫댓글 무사히 안착, 축하합니다. 피곤하시지요? 시차극복 후 뵈요.
너무 화려한 건축가의 일대기가 펼쳐 고생 끝 건축가 삶 시작!!!!
끈기와 노력, 성실성과 집념 그리고 야고보의 꿈의 성취를 누리십시요.
감동과 귀감의 글
감사. 귀가를 환영합니다.
하하하 우리 선생님 생각해서 빨리 돌아가야.
아직 봄비 내리는 여수에서 노모님의 전속 뽀이로 근무 중이며
어제는 기력을 찾으신 노모님과 이순신 대교로 봄 나들이를 했습니다.
사랑과 이해와 격려가 담긴 귀한 댓글 주심 깊이 감사드리고 속히 돌아가서
반갑게 뵐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가족들 모두와 건강 평안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기기 다하여아
지나간 후에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못할일 이뿐인가 하노라.....
Enjoy your mom every second every minute while you are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