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4. 삼국의 불교전래 의의
인과응보사상 등 수용, 한국 종교 문화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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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 삼륜대좌석조여래좌상> |
사진설명: 경주 남산 용장계곡 탑상곡 용장사지에 있는 여래좌상. 멋진 부처님인데 불두가 없어 안타깝다. |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 불교가 공인된 이래 백제와 신라에도 불교는 전파됐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던 모습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경문을 함께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이었다.
2년 뒤 아도스님도 고구려에 왔다. 불교를 받아들인 지 3년 뒤인 소수림왕 5년,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해 순도스님과 아도스님으로 하여금 각각 머물게 했다.
공식 사절과 함께 온 순도스님이 머물렀다는 점에서 성문사는 관청 건물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순도(順道)스님이 고구려에 들어온 지 12년 뒤의 일이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에 따르면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 인도 출신의 마라난타스님이 동진(東晋)에서 들어오자, 왕은 환영해 궁중에 모시고 예경했다”고 한다.
〈해동고승전〉엔 “왕이 교외에까지 나가 맞은 후, 궁중에 모시고 공경히 받들어 모셨다. 다음해 2월 한산에 절을 짓고 10인을 득도시켜 출가자가 되게 했다”고 나온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초전(初傳)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전래와 백제의 전파엔 차이가 있다.
중국 전진(前秦)의 국가적 사절(使節)로 순도스님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면, 마라난타스님은 개인적 차원에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온 한 스님을 맞이하기 위해 왕이 교외 까지 나갔다는 기록에서 당시 백제도 불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특히 9월에 들어온 스님을 위해 다음해 2월에 사찰을 짓고, 게다가 10명의 출가자까지 배출했다는 점에서 백제가 불교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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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있었던 곳. 지금은 많은 당우들이 복원됐다. |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는 불교수용에 진통이 적지 않았다. 신라 제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불교는 신라 땅에 이미 상당히 퍼져 있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연대는 크게 네 가지설이 존재한다.
제13대 미추왕 2년(263) 고구려 아도(我道)스님이 신라에 전교하러 온 것(박인량수이전. 삼국유사),
제19대 눌지왕 때(417~458)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도착한 것(삼국사기),
21대 비처왕 때(479~500) 아도(阿道)스님이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도착해 전파한 것(삼국사기),
양(梁) 대통 원년(법흥왕 14. 527) 3월11일 아도(阿道)스님이 모례의 집에 왔다가 “정방스님과 멸구자스님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은 것(해동고승전) 등이 ‘이차돈 순교 이전’ 전파를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시간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삼국은 각기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발전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문제는 “삼국은 왜 불교를 수용했으며, 수용 이후 불교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다. 각종 문헌자료에 남아있는 기록과 고고학.미술사적 자료들이 보여주듯,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삼국사회에 수용.신봉된 것은 중요한 사회적.역사적 현상. 때문에 의미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전제왕권 강화 이데올로기” 주장도 있어
불교수용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치적으로 해석한 경우와 신앙적으로 분석한 것이 그것이다. 교학적(敎學的) 입장이 아닌 사학적(史學的) 견지에서, ‘불교와 사회’.‘불교와 정치’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해석한 선구자는 전 서울대 김철준 교수와 한림대 이기백 교수로 꼽힌다.
김철준 교수는 ‘신라 상대사회의 이중구조’(〈역사학보〉 2. 1952)라는 논문에서 “부처님의 권위를 빌려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한 것이 불교수용의 의미”라고 분석했다.
이기백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삼국시대 불교수용과 그 사회적 성격’(〈역사학보〉 6. 1954)이라는 논문에서 “불교의 전래는 절대적인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형성의 관념 형태적 표현”이라고 못 박았다.
“삼국시대 불교의 의의는 왕권과의 결합에 있었고,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층의 독점물이며, 피지배층인 일반 민중은 불교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관심이 있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불교는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왕권을 옹호하고 신장시키는 구실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기백교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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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
김철준.이기백 교수에 의해 주장된, ‘불교는 왕권강화의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은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거의 정설화되다시피 했다.
안계현.서경수.정중환.고익진.김두진 교수 등이 이 학설에 동조했다.
고(故)고익진 교수(동국대)는 ‘한국고대의 불교사상’에서 “인도불교가 인간의 무지를 깨우쳐 출세간적인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순수한 종교적 이념을 지향했던 것과는 달리 삼국의 불교는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이라는 현실적인 목적에 집중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국민대 김두진 교수 또한 ‘고대인의 신앙과 불교수용’(〈한국사〉 2. 1978) 등의 논문을 통해 “초기불교를 전제왕실에 유리한 종교, 정복국가에 필요한 종교”라고 파악했다.
삼국이 불교를 수용한 것을 왕권강화를 위해서였다는 이런 관점을 비판한 최초의 논문은 고려대 김정배 교수(전 고려대 총장)에 의해 발표됐다.
‘불교 전입기의 한국 상대 사회상’(〈숭산 박길진박사 화갑기념 한국불교사상사〉에 실림. 1975)에서 김교수는 “불교의 수용과 역할 문제가 왕권강화 같은 정치적 차원에서만 강조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정과 불교를 지나치게 결부시켰기 때문”이라며 “국가의 기원은 삼국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불교의 전입(傳轉)과 국가의 형성과는 별도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김교수는 삼국 사이의 전쟁에 주목했다. 김교수에 따르면 불교가 수용된 4~5세기 전후부터 삼국통일이 이뤄질 때까지의 삼국관계는 전쟁의 연속이었으며, 잠정적 평화와 동맹관계는 약세를 면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물심양면의 보상은 백성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치관을 필요로 했고, 여기에 불교수용의 의의가 있다는 것이 김교수의 주장. “왕권이나 국가라는 정치적 입장보다는 전쟁이나 개인이라는 각도에서 삼국시대를 볼 필요가 있으며, 이렇게 볼 때 삼국의 불교수용과 발전은 전제왕권 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만이 아닌, 일반백성을 위한 종교적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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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집안 시내 민가의 채마밭에 있는 이불란사지 석주로 추정되는 돌기둥. |
‘피지배계층인 민중은 불교에 무관심했다’는 이기백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장지훈씨는 〈한국고대미륵신앙연구〉(집문당. 1997)를 통해 “영묘사 장육상을 조성할 때 성중의 모든 남여가 다투어 진흙을 나른 것, 의상대사의 제자 진정스님의 집안은 다리 부러진 솥 하나만 있을 정도였지만 불교에 귀의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서 보듯, 당시 일반민중들도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불교를 지배계층을 위한 사상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삼국시대 불교수용과 의의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종교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상 특히 인과응보사상이 삼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은 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제시해 그것을 보다 잘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백성들에게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랑 설화’ ‘김대성 설화’ ‘욱면비 설화’. ‘죽지랑 설화’와 ‘김대성 설화’는 남을 위한 선행(善行) 때문에 가난한 백성이 최고계층 집안에 태어난다는 이야기고, ‘욱면비 설화’는 비천한 노비가 지극한 신심과 수행 덕분에 육신의 산 몸으로 하늘을 날아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이야기. 신라인들이 인과응보를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例)들이다.
지배.피지배계층에 두루 희망 줘
인과응보사상은 귀족들에게도 새로운 윤리의식을 갖게 했다. 백성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사고방식을 귀족들에게 인식시켰다. 최하층 사람이 선행으로 하루아침에 지배계층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귀족이라도 악행을 하면 언제 노비로 태어날지 모르며, 심지어 개나 소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과응보사상은 귀족들에게 가르쳤다.
사실 불교의 성립은 왕권과 전혀 관련이 없다. 강대한 정복군주에 침략당해 멸망할 운명을 지난 소국 출신의 싯다르타 태자가 인생무상을 느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해 만든 종교가 바로 불교. 싯다르타 태자가 수행할 때도, 심지어 대각을 이뤄 전도할 때도 권력의 비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국왕들이 부처님을 찾아오듯, 최하층 신분의 사람들도 자유로이 부처님을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고 설법을 듣고 갔다. 때문에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 시기에 불교가 수용됐다고 해 불교가 전제왕권을 정당화.합리화시켜 주었다고 보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교를 통해 삼국은 새로운 사상과 사유체계를 받아들였고, 불교는 이후 한국사상사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삼국시대 불교수용의 의의가 아닐까.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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