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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잠언(42)/선택
제목 :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성경 : 잠22:1-16
찬송 : 314,94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00930 낙양교회 수요예배
잠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 22: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잠 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잠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잠 22: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잠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잠 22:12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잠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잠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 22: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성경학자들은 잠언 중간 부분을 “지혜의 꽃다발”이라고 부릅니다. 잠언 중간 부분은 하나님의 지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 지혜의 꽃다발을 볼 때 어느 부분은 세상적인 지혜와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만 보면 비슷하게 보이다가도 줄기나 뿌리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지혜의 꽃다발의 아주 중요한 부분,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동안 길게 설명되어 왔던 지혜의 꽃다발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그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생하고 많은 연단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선한 이름과 은총을 택하라!(1-5절)
잠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본문은 중언법을 사용한 잠언입니다. ‘많은 재물’과 ‘은이나 금’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금이나 은은 가장 가치가 있게 평가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재화적인 가치가 있고 많을수록 더 가치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가치인 명예보다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존경받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인명(人名)호피(虎皮)”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재물을 추구한다면 그는 오명(汚名)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에서 설령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을지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매우 안타까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막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선택은 중요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특히 영생을 선택하는 일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기회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 즉 이 세상의 가치를 좇아가는 사람은 영원히 이를 갈며 후회할 것입니다.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고 축복을 받지 못하여 슬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많은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 은이나 금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전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잠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마26:11a)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잘 연결되는 잠언입니다. NIV 성경의 번역이 절묘합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공통적인 부분은 여호와가 그들 모두를 지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유식자와 무식자, 지위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동일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 본연적 가치가 같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따라서 우리가 약한 자, 가난한 자 또는 소외된 자를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와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부자들이 종종 갑질을 하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교회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엄격하게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 하나님은 그 돕는 손길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악행을 기억하시고 보응하십니다.
여러분!
빈부가 결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움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본문의 ‘재앙’은 위험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사려 깊고 신중한 사람은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 적절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약합니다. 그가 가진 경보 장치는 잘 작동되지 않아서 그는 위험 신호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위험한 중 모르고 나가다가 해를 입습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반대의 어리석은 자들도 있습니다.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장치가 너무 민감하게 작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불필요하게 불안을 느끼며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인생의 길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면 길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꼭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안전한 길을 가게 됩니다. 참으로 미련한 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길은 나중에는 길이 없어지고 바로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솔로몬은 본 잠언에서 신앙인의 삶에서 핵심적인 두 가지 가치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겸손은 일반적인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생기는 겸손으로서 삶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겸손한 삶을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 선한 열매를 거둡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재물, 영광, 생명’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는 초보적인 수준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잠 22: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패역한 자’는 ‘익케쉬’라고 하는데 ‘비틀어진, 구부러진, 그릇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비틀어졌기 때문에 모든 진리를 거부합니다. 때문에 진리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말씀을 왜곡하며 불의를 행합니다. 패역한 자의 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가시와 올무가 있습니다. 가시가 무엇입니까? 고통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올무는 무엇입니까? 올무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위험과 곤경을 가리킵니다. 패역한 자의 길에 이러한 가시와 올무가 있는 것은 그가 진리를 왜곡하고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바르게 받아들이고 악을 금하여 영혼을 지키는 자는 패역자의 길로 행치 않기 때문에 가시와 올무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일반적인 고통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곤경을 멀리하기 위하여 패역한 자의 길을 피하고 영혼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로 행하라!(6-12절)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의 아주 중요한 사상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인격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조기 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른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다음 세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친다는 것은 처음부터 옳은 길, 곧 순종과 경건의 길로 가도록 훈련한다는 뜻과, 교육할 때 아이의 본성과 재능, 재질 등을 고려하여 적합하게 교육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통해 교육 받는 아이는 자연스럽게 평생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녀를 교육할 때 그 아이의 기질과 성품을 잘 고려하여 어렸을 때부터 경건한 삶의 방식이 몸에 베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작은 일이지만 아이가 그릇 행할 때 부모가 교정해 주지 않고 그냥 방임하면 성장해서 반사회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성장기에 자녀를 방치하면 나중에 그 자녀가 성격 장애가 심한 사람이 되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잠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사람은 모두 똑같지만 가진 것에 의해서 차별을 당하게 됩니다. 인도 같은 나라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불가촉천민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나라가 인도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부자에게 고용되어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꿈이 대 기업에 취직되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부자들이 시키는 일을 죽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봉을 그냥 높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일을 시키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빚진 자는 결국 채주의 종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 종이 되고 싶어서 종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수입이 없으면 결국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가능하면 빚을 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자신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증상을 반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성 성격 장애의 증상 중 하나입니다. 고리를 받아 치부하는 대부업자들은 악인들이지만 고리로 돈을 빌리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고리를 물고 돈을 빌리는 자는 단견적이며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입니다. 남의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잠 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악을 뿌린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욕심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욕심이나 야망으로 일을 하게 되면 일단 자기 자신은 손해를 보는 것이 없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원한을 가지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일단 계산상으로 손해 본 것이 없어서 성공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람의 가치는 백해무익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으로 사는 사람의 영혼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이 세상의 어떤 부자도 결국 늙게 되어 있는데 이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분노밖에 없습니다. 결국 분노에 찬 늙은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잠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선한 눈을 가진 자’란 다른 사람을 볼 때 선한 쪽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꾸 다른 사람의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서 캐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도 사나워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어두운 부분은 감추고 밝은 부분을 보고 격려하고 축복을 하면 상대방은 굉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사람은 사람을 한 명 살리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준다고 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한 사람에게 몰래 양식을 줄 때 이것은 단순히 한 끼 먹을 양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며 용기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 작은 양식이 그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고난을 이기고 성공하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EX: 보아스가 룻을 선대한 이야기)
잠 22: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여기에서 ‘거만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붙드는 사람을 보면 너무 고지식한 것 같고 답답한 것 같아서 자꾸 싸우게 되고 다투게 됩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공동체에서 거만한 자를 쫓아내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쳤지만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왕이 되었을 때 자신과 함께 자라난 젊은 신하들의 말을 듣고 경험 많은 신하들의 말을 물리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조언한 젊은 신하들은 거만하고 교만한 자들이었으며 르호보암 역시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들이 교만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백성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과 북이 분열되는 커다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만한 자는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이 어디에서나 분란을 야기합니다. 교회나 교단이나 사회에 이런 거만한 자들이 적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거만한 자는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잠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왕에게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조언자와 충신이 필요합니다. 간신배는 겉과 속이 다릅니다. 입에 혀처럼 굴지만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신하는 왕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미숙한 왕이나 성격 장애가 있는 왕은 이런 사람의 말에 쉽게 넘어갑니다. 듣기에는 거북하지만 진실하고 유익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신하를 친구로 두는 왕은 성숙한 왕입니다. 그런 신하는 마음이 정결하며 덕이 있고, 그런 신하와 친구가 되는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왕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마5:8참조).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의 친구가 되시어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잠 22:12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에 ‘지식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지켜주십니다. 눈으로 지켜 주신다는 것은 눈을 떼지 않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도 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길을 갈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대가는 하나님이 그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십니다.
나태와 탐욕과 부패를 피하라!(13-16절)
잠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어떠한 말로 자기의 게으름을 변명합니까?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라고 게으름을 변명합니다. 지혜자는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게으른 자가 항상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게으른 자가 됩니다. 게으른 자는 불안을 핑계로 일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는 것 힘이 듭니다. 사고날까봐 무서워서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장롱 면허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운전하다 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감하게 도전해 보면 금방 익숙해집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게으른 자들의 핑계에 현혹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잠 22: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음녀의 입은 거짓된 사랑을 고백하는 입입니다. 음녀의 입이 달콤한 이유는 자기 아내나 남편보다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사랑은 자기 인생을 바쳐야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바치지 않으면서 사랑의 감정만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사기 치는 것입니다. 음녀의 입은 아무리 사랑을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증한 것이고 추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노를 당한 자는 음녀의 함정에 빠집니다. 성적으로 타락시키는 함정에 빠지면 웬만해서는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성적인 죄를 지속하는 자는 현재는 순간적인 쾌락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파멸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삶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듣고 사력을 다해 빠져 나와야 삽니다.
잠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아이란 육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도 해당되지만 신앙적으로도 미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릴 때는 작은 것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많은 실타래들이 얽히고설켜서 풀리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많은 격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때리는 것이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결국 여인들이 빨래를 할 때 비누칠을 잔뜩해서 방망이로 때려 때를 빼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때려서 죄의 때를 빼내야 모든 것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어린 사람들은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끔하게 맞는 것이 굉장히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랑의 매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수준으로 때릴 수 있는 부모가 건강한 부모입니다. 요즘 “금쪽이”이라는 육아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잘 양육할 수 있는가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교정하는 프로그램인데 상당히 유익한 것 같습니다. 부모도 잘 몰라서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기도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적절한 보호와 적절한 훈육을 발달 단계에 맞게 병행해야 합니다. 적절한 처벌과 좌절 경험이 없이 자라난 아이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나 반사회성 성격 장애를 가진 성인이 되기 쉽습니다.
잠 22: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두 종류의 반사회적인 인간을 만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억압하는 자들이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부자에게 선물이나 뇌물을 주는 자들입니다. 잠언 기자는 이들 둘 다 가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고용주가 직원이나 피고용인의 권익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갑질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당하는 서러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나 기업에 복을 주실까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암 2: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암 2: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부유한 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선물이나 뇌물을 주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고 어려운 자를 더 코너로 몰아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부자에게 아첨할 필요도 없고 부자를 욕하거나 깎아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끝까지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