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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받는 선물 중, 가장 좋았고, 기다렸던 것이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과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요즘도 마트에 갈 때마다 진열대에 잔뜩 쌓인 과자들을 보면, 그 때의 생각이 종종 납니다. 이렇게 많은 과자들 중, 오랜 세월 속에서, 변함없이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오는 몇몇 제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영양갱”입니다. 단팥으로 만든 것으로, 제가 어릴 적, 외할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가거나, 외할아버지께서 출타하셨다가 귀가하실 때면, 저를 준다고 사오신 것이 영양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으면, 옆에 있던 막내 이모가 “아빠, 나는”하면, “너는 이모잖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양갱이 1945년에 출시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에는 별 인기가 없는 것 같아도, 매달 100만개 이상이 판매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 다음으로는, 새우깡입니다. 1971년에 출시되어,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제품으로, 윤형주씨가 작사한 광고송,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 어른 손 아이 손 자꾸만 손이 가”라고 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즐기는 제품이죠? 몇 년 전만 해도, 약 70억 봉투가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새우깡을 보면, 어릴 적 생각이 또 납니다. 제게는 이모가 여럿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모인데, 이모 한 분이 새우깡의 글씨를 오려서는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응모한 것이죠.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우체부로부터 소포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는 새우깡 응모에 당첨됨을 축하한다면서, 티셔츠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제가 가장 힘들고, 배고플 때, 위안이 되었던, 제품입니다. 쵸코파이입니다. 훈련나갈 때, 어김없이 챙겼습니다. 군장을 꾸리면서, 구석구석에 꽉꽉 눌러서 넣어놓고는, 훈련받다가 힘들 때면, 안에 있는 쵸코파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군장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가는, 주변에서 꺼내어 먹는 것을 보고, 생각나서 꺼내었더니, 쵸코파이가 빈대떡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는데, 그것이, 1974년에 출시된 이후로, 약150억개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들 제품이 팔린 수만 해도, 아마, 지구를 여러 바퀴 감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과자든, 뭐든, 손이 가고, 정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보면,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있어도 손이 가지 않는 과자가 있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픈 사람이 있는 가하면,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축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기는,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돌보는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 그 중심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는 사람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곧, 마음이 가난하거나, 심령에 통회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입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마 5: 3을 새 번역이나 현대어역으로 보시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본문의 상황이나 예수님 당시에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 57: 15을 보시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합니다. 또, 미 6: 8을 보시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중심, 생각의 중심, 선택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뒤에 주어진 상황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나오는 것도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기에, 예배를 선택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오신 줄 압니다. 둘째, 심령에 통회한다는 것은, 이것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마 5: 4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소리보다 울음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통회”는 히브리어의 “나케”로, “얻어맞거나,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의 “애통”은, 헬라어의 “펜데오”로, “애도하거나,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의 공통점은, 그냥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닥을 치며, 대굴대굴 구르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통하여 첫 아이를 낳았을 때,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이가 죽게되자,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이를 삼하 12: 16 - 17을 보시면,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통하는 표현을,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욜 2: 12 - 13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합니다. 또, 시 51: 17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통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만,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부를 빼앗기거나 잃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실성하지 않는 한, “다 잃었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펄쩍펄쩍 뛰며, 소리치며, 분을 토할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눈물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감사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자신의 경험과 맞지 않아도,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해도, 내 마음의 이해가, 내 삶의 경험이 자꾸만 앞섭니다. “이건 불가능해. 이건 아니야. 이건 비현실적이야. 이건 내게 맞지 않아. 하나님도 이해하실거야”라며, 스스로 평가하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시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나 사도 바울등은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다고 화형당한 쟌 휴스등 역사 속에서 제시된 믿음의 선배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이성,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라면, 우리의 견해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두려움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도 우리말을, 따라주는 사람에게 더 정이 가지 않습니까? 여러 부하직원 가운데, 남보다 눈에 띄는 사람, 더 정이 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일 겁니다. 일을 시키면, 이러저러한 것으로 말만 무성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은 오죽 하겠습니까?
대하 34: 21을 보시면,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라고 합니다. 요시야는, 서기관 사반이 읽은 율법 책의 내용을 듣고 “자기의 옷을 찢으며”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율법책의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모든 백성과 함께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욘 3: 5 - 10을 보시면,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왕과 모든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아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회개하여, 멸망을 면했다고 합니다. 또, 느 8: 5 - 9에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남녀노소, 무릇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였을 때,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 낭독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나무 강단에 서서 책을 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모두 일어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낭독할 때,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울었다”고 합니다. 또, 손을 높이 들고 “아멘. 아멘”하며, 응답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묻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도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자기가 없는 틈에 적군이 와서 가족들과 종들을 다 잡아갔습니다. 일반 사람 같으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쫓아가서 전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다. “쫓아가서 싸울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싸움의 전략까지도 다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니, 승리하는 겁니다.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도,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행한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다윗을 가리켜, 행 13: 22을 보시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시라도 우리에게서 관심을 늦추지 말고, 우리를 돌아보며,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이루는 길은, 본문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먼저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것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떤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에 대해, “다음에 하지”등으로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 가지를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 대대로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에 대해 말씀하신 후, 원치 않는 삶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고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대한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예배를 시간 떼우기 식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성전에 오르면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그 뿌리까지 말랐습니다. 이 사건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성전 정화사건입니다. 막 11: 15 - 17을 보시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정화사건이 하나인 것 같지 않습니까?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제사 드리고자 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제물을 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는 언제나, 순례자들과 제물을 파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하기에, 열매가 있을 것 같은데, 하나도 없는 것이나, 제사를 드리고자 원근각처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들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에게 말한 사무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삼상 15: 22을 보시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말 1: 8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라고 합니다. 또, 1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의 이유가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을 멸시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기에, 소를 제물로 받치는 것을, 살인에 비유했고, 양에는, 이스라엘이 가증하게 여기는 개의 목을 꺾음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다는 말에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가리켜, “가증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가증”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쉬쿠쯔”라 하여,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신 27: 15을 보시면,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라고 합니다. 또, 겔 14: 6을 보시면,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고 합니다. 또, 롬 2: 22을 보시면,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가증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없는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우상숭배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14절을 현대어 번역본으로 보시면, “그러므로 나도 그들이 당할 재앙들은 모두 골라서 내리고 그들이 치떨리게 두려워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내리겠다. 내가 불렀으나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며, 내가 미리 경고하였으나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너희는 내가 악하게 보는 일들을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만 골라 하여 나를 모욕하였다”라고 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사도바울은 롬 1: 21 - 23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듯,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의 죄악이 쌓이도록 방치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소홀히 대강대강 하는데도 불구하고, 형통하다면, 그것은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함에 있어서, 책임지지 못할 말만 무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우리의 겉모습만 있지는 않습니까? 눅 18: 10 - 13을 보시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누구를 의롭다고 하셨겠습니까? 14절을 보시면, “세리”였습니다.
이제,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가운데, 우상숭배를 하듯 섬기는 습관이 있지는 않습니까? 있다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고 싶게 하고, 궁금하게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만을 바랄 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겁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성도들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책임져 주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